국가보안법 폐지 문제 당론 유보한 채 좌고우면 계속… 화난 개혁 성향 의원들 ‘결단’ 촉구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 당론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민주노동당, 민주당과 공조해 폐지 법안을 내기로 정치적 합의까지 끝냈다. 더 이상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는데 왜 미적대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천정배 원내대표가 결단할 때다.”(열린우리당 개혁 성향의 한 재선 의원)
“지도부가 빨리 결심하고 밀고 나갔더라면 지금처럼 당내 분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겉으로 표출된 세상 여론에 너무 민감하게 처신했다.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개혁 과제를 완수하겠다는 당 지도부로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다.”(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
청와대의 교시만 기다리는 여당?
17대 첫 정기국회에서 ‘100대 개혁 입법 과제’ 실현을 공언해온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 체제가 당의 정체성을 가늠할 핵심 지표로 평가받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조차 명확한 결론을 내놓지 못한 채 좌고우면을 거듭하자, 열린우리당 개혁 성향 의원들 사이에서 천 대표의 지도력과 개혁 추진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몇몇 개혁파 의원들은 “원내 과반수를 확보한 여당이 스스로 폐지 당론을 확정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눈치만 살피면서 최종 방안을 확정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목청을 높였다.
이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천정배 원내대표 체제가 국가보안법 폐지 방안에 대한 최종 결단을 장기간 유보하면서 당 안팎에 적잖은 후유증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소속 의원의 절반이 넘는 다수가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에 서명했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당까지 폐지 원칙에 공감하는 정치 지형에서조차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면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 불필요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의원 다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개혁적 진보주의자’로 규정한 열린우리당 안에서 지난 8월 중순 이미 소속 의원의 절반이 넘는 83명이 임종석 의원 등이 주도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에 서명하는 등 폐지론이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 천정배 대표도 당시 8월26일 정책의원총회에서 최종 당론을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폐지를 위한 요식 행위만 남은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의총 당일 아침 당 제2정책조정위원장인 안영근 의원을 중심으로 조성태·유재건·조배숙 의원 등 이른바 ‘실용파’를 자처하는 관료나 기업가 출신 의원 17명이 “국보법 폐지는 시기상조”라며 ‘개정론’을 제기하자 천 대표는 머뭇거렸고, 뚜렷한 의견 표명 없이 당론 결정을 전격 유보했다.
고무된 개정론자들은 이후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을 결성하는 등 세력화를 시도하면서 폐지론자들과 전면적인 세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여당의 분열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천 대표는 뚜렷한 자기 태도를 정하지 못한 채 고심만 거듭했다. 결국 지난 9월5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구시대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라고 말한 뒤에야 부랴부랴 당론을 모아갔고, 나흘 뒤인 9월9일 정책의총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당론을 확정했다.
그러나 주도적으로 당론을 정하지 못한 채 좌고우면하다 노 대통령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론을 확정한 천 대표 체제의 모습은 “청와대의 교시만 기다리는 여당”이라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표적이 됐고, 국가보안법 폐지 여론에 불을 댕길 대의명분을 선점하는 데도 실패했다.
천 대표의 한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폐지당론은 결정했지만, 정작 자신의 책임 아래 구체적인 폐지 방안을 최종 확정하지 않고 또 다른 분란의 싹을 잉태한 국가보안법 태스크포스팀을 출범시키는 오류를 다시 자초했다.
바보가 된 국보법 태스크포스팀
천 대표는 ‘국보법 태스크포스팀’을 폐지 뒤 형법 조항으로 보완할 것인지, 특별법 형태의 대체 입법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구로 설정했다. 하지만 팀원인 9명의 의원 가운데 4명을 국가보안법 개정론을 주창해온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 소속의 인사에게 배분하면서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조직을 만들었다.
실제, 태스크포스팀은 9월22일까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구체안을 마련해 추석 연휴 전인 9월23일 정책의총에서 당론을 최종 확정한다는 내부 시간표에 따라 모두 4차례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폐지론자’와 ‘개정론자’들이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소모적 논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태스크포스팀 첫 회의에서 최용규 의원장을 비롯해 우원식, 최재천, 우윤근 의원 등은 ‘국보법 폐지 뒤 형법 보완’을 주장했다. 소폭의 형법 개정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로 생기는 안보 공백과 국민의 불안 심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게 핵심 논리였다. 이에 조성태·김종률·박상돈·오제세 의원 등 태스크포스팀에 포진한 ‘실용파 4인방’은 ‘특별법 제정론’으로 맞섰다. 국민 정서상 대안 없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조직적인 친북 행위에 대한 처벌 등을 규정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반박 논리였다. 노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 이후 개정 소신을 공언하기 어려워진 실용파들은 태스크포스팀에서 대체입법론으로 재무장하고 반격전에 나선 것이다.
이후 열린 세 차례 회의에서도 양쪽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경우 현행 국가보안법에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북한을 어떻게 규정할지 등을 놓고 논란을 벌였으나 시각차만 확인했다.
여권을 더욱 심각한 수렁에 빠뜨린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된 태스크포스팀이 폐지 당론을 뒤집기 위한 언론플레이 창구로 악용됐다는 점이다.
태스크포스팀 회의가 끝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일부 언론에 태스크포스팀 소속 의원의 익명 발언을 인용해 △국보법 제7조의 찬양·고무죄를 유지하는 방안 검토 △국보법상 반국가단체 개념을 유지한 헌법수호 법안 마련 등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이런 보도는 여당 내부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근거로 이용되면서 여권의 국가보안법 폐지 의지에 의구심을 더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결국 최용규 위원장, 우원식 의원 등 태스크포스팀 소속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들은 “팀 내부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거나, 아예 언급도 안 된 사안들이 개정론자들에 의해 언론플레이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폐지 당론을 약화하고 있다”며 천정배 대표에게 “태스크포스팀 해체”를 요구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기획자문회의 소속 개혁 성향 중진의원들과 임종석 의원 등 소장개혁파들까지 “여당의 국보법 폐지 의지가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거들었고, 결국 천 대표는 지난 9월21일 태스크포스팀 해체를 지시했다.
그러나 천 대표는 여전히 좌고우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태스크포스팀 해체 발표 뒤 제1정책조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폐지 법안을 만들어 23일 의원총회에서 최종 당론을 결정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뚜렷한 설명 없이 추석 이후로 결정 시기를 늦췄다. 천 대표는 24일 “처리 시한을 정하면 한나라당이 밀어붙이기로 생각하는데 이는 오해”라며 “형법 보완과 보완(대체) 입법에 대해 각각 복수안을 마련해 민주노동당, 민주당과의 3당 정책 협의를 통해 협상한 뒤 한나라당과도 토론·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천 대표는 한나라당을 향해 “이론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지만 입법에는 타협이 있을 수 있다”라고 우호적인 몸짓을 거듭했다.
하지만 천 대표의 이런 처신은 한나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 안에서까지 공격받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9월30일 “여권이 국보법 폐지를 강행하면 체제와 안보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면서 “빨리 국보법 개정의 장으로 들어오라”고 역공을 취했다.
한나라당엔 우호적 몸짓 계속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온 여권 내 폐지론자들도 “논의는 이제 충분하다”며 “천 대표가 결단할 때”라고 비판했다. 임종석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국보법에 대한 대체 입법으로 간다면 ‘게도 구럭도 다 잃는’ 꼴이 될 것인 만큼 이제 지도부가 최종 책임을 진다는 자세로 결정해야 한다”며 “계속 오락가락한다면 마냥 웃는 낯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천 대표가 계속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일 경우 전면적인 압박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반면, 실용파의 핵심인 안영근 의원은 “당 지도부가 국보법 폐지 뒤 대안을 마련할 자신이 없으니까, 괜한 빌미를 잡아 국보법태스크포스팀만 해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보법을 다른 이름으로 바꾼 대체 입법이 국민들의 반공 정서를 고려한 최선책”이라며 “친북 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은 대체 입법안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라고 공언했다.
천정배 원내대표의 최종 결단이 없는 한 국가보안법은 폐지 당론만 존재하는 상태에서 끝없는 분란만 부추기는 깊은 수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청와대의 교시만 기다리는 여당?

기자들과 만난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당내 분란의 수렁에서 우유부단의 극치를 보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 / 박승화 기자)

임종석 의원(가운데)으로 대표되는 국보법 폐지론자들과 안영근 의원(오른쪽)으로 대표되는 실용파 의원 사이에서 천정배 원내대표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사진 / 한겨레 탁기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