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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교동을 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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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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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내부서 거세게 이는 인책성 당정쇄신론… 전면적 물갈이로 이어질까

(사진/동교동계 주류의 좌장격인 권노갑 최고위원과 김옥두 사무총장. 당내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다)
“전면적인 당쇄신이 필요한 시기다. 당 3역은 물론이고 동교동계가 2선으로 전격 후퇴해야 국민들이 납득할 것이다. 적절한 조처가 없다면 초선들이 다시 한번 나설 것이다.”(민주당 초선의원) “동교동계가 더이상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 동교동계가 앞에 나서서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당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민주당 중진의원)

“동교동계는 2선후퇴하라”

동교동계가 뭇매를 맞고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을 비롯한 김옥두 사무총장,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 남궁진 정무수석 등 동교동계 주류쪽에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검찰총장과 대검차장 탄핵소추안 파동을 계기로 당정쇄신론이 불거지면서 그동안 전면에 서서 정국을 이끌어 왔던 동교동계 주류의 2선후퇴 요구가 여권 내부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민주당에서 쇄신론이 제기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7월24일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파동 이후 국회가 장기파행을 겪자 당지도부의 무능력을 성토하는 목소리와 함께 당직개편론이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이번 당정쇄신론의 경우 과거 초·재선 중심이었던 것과는 달리 초·재선을 비롯해 당 중진과 최고위원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또 과거처럼 당직개편에 한정하지 않고 당을 포함해 청와대, 정부 등 여권 내부의 전면적인 쇄신을 주장하고 나서는 등 변화의 폭이 훨씬 광범위하고 강도가 높다.

현재 여권 내부의 분위기는 당정쇄신론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은 11월3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정기국회를 마친 뒤 여러 사람들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해 당정의 고칠 것은 고치고 개편할 것은 개편할 것이라는 게 대통령의 심정이고 생각”이라고 말해 ‘정기국회 뒤 당정개편’을 가시화했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도 12월2일 청와대에서 당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4일 총재특보단과 오찬, 6일엔 서영훈 대표를 비롯한 당 4역으로부터 당무보고를 받는 등 당정개편을 포함한 민심수습책 수렴에 나섰다. 여권 내부에서는 김 대통령이 정기국회를 마치고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다녀온 뒤 12월 중순께 당정개편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당정개편은 그동안 정국을 이끌어온 동교동계의 위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떠밀려 이뤄지는 듯한 당정개편은 어떤 형식으로든 청와대와 민주당의 핵심요직에 포진한 동교동계 주류에 대한 인책성격을 띨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지난 1월 민주당 창당과 함께 강력한 개혁추진을 이유로 동교동계가 전면배치돼 정국을 이끌었지만 이후 한빛은행, 동방금고 사건 등 권력형 비리의혹 사건에 동교동계 핵심인사들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등 여론을 악화시켜왔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국민불신을 증폭시킨 것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누가 동교동계 밑에 줄을 서려 하겠느냐. 그동안 당직이나 그런 것 때문에 줄을 섰지만 이제는 정치적 장래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동교동계의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과연 DJ가 받아들일까

(사진/당내 최고위원들과 만나는 김대중 대통령. 동교동 가신들을 전면배제하는 인사를 단행할지 주목된다)
사실 동교동계 주류쪽은 당정쇄신론이 불거지자 적극 대응에 나섰다. 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검찰총장과 대검차장 탄핵소추안 파동 이후 당정쇄신론이 꿈틀거리자 김옥두 총장은 서영훈 대표를 만나 “정기국회 와중에 당이 분란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며 당정쇄신론에 쐐기를 박았다. 민주당의 어떤 최고위원은 “김 총장을 만나 당내 여론 등을 감안해 자진사퇴하는 방안을 권고했으나 김 총장이 ‘사퇴할 이유가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고 전했다. 민주당의 중진의원도 “권노갑 최고위원이 최근 사석에서 ‘대표교체는 대안부재이기 때문에 어렵고 총장도 굳이 바꿀 이유가 있는냐. 또 총무는 선출직이라 바꾸기 어렵다’고 밝히는 등 전면적인 당정개편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긋고 나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11월17일 검찰총장과 대검차장 탄핵소추안 파동 이후 당 안팎에서 당정쇄신론이 잇따라 제기되고 서 대표가 직접 나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느낀다”며 대표직 사퇴까지 포함된 당정개편론을 적극 제기하면서 동교동계의 반발은 한풀꺾인 분위기다. 다만 동교동계쪽에서는 당정개편이 불가피하더라도 개편의 폭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권 최고위원과 가까운 동교동계 의원은 “당정쇄신론의 폭과 시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여권 내부의 분위기 일신을 위해 당정쇄신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 애초 정기국회 이후에는 당직개편을 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 당정쇄신론이 동교동계의 전면적인 2선후퇴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우선 김 대통령의 인사스타일 때문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김 대통령의 경우 말을 잘 듣고 편한 사람을 좋아하는 등 낯을 가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동교동 가신들을 전면배제하는 인사를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김 대통령의 현실인식도 당정쇄신의 폭을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은 ‘지금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총체적 위기까지는 아니다’라고 보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경제난이 시급한 현안으로 경제문제 해결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게 김 대통령의 기본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정개편이 정국해법의 핵심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이라면 전면적인 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은 적은 편이다.

동교동계 주류쪽의 반발도 여전히 만만찮다. 우선 인책성 당정쇄신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당의 중심으로서 당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김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교동계의 역할이 남아 있다는 태도도 분명하다. “정국불안은 기본적으로 야당이 다수당이고 여당이 소수당이라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사안이 아니다. 또 동교동계는 정권창출의 핵심으로서 국민의 정부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다. 동교동계의 전면 배제 요구는 문제해결을 위한 해법이 아니다.”(동교동계 한 의원)

권노갑-한화갑 갈등 재연될 수도

그렇지만 이번 당정쇄신론을 계기로 동교동계 주류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는 등 여권 내부 역학관계의 변화 가능성이 엿보인다. 특히 이 과정에서 권노갑 최고위원쪽의 주류와 한화갑 최고위원쪽의 비주류 사이의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 당정쇄신론의 기폭제가 됐던 것이 한화갑 의원의 발언이라는 점이다. 한 최고위원은 김근태 최고위원, 조순형 의원 등과 함께 11월20일 의원총회에서 “정기국회 이후 새로운 당정관계를 전반적으로 점검해봐야 한다”고 당정쇄신론에 무게를 실었다. 한 최고위원은 의총 뒤 자신의 발언에 대해 “누가 물러나야 한다든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고 당정 관계, 자민련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하고 나섰지만, 다음날 한 최고위원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장성민 의원이 연세대 국제대학원 강연을 통해 “선출직 최고위원을 대표로 임명해 강력한 정국 운영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등 당정쇄신론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 때문에 당정쇄신론을 계기로 한화갑 최고위원쪽이 그동안 권력핵심에서 주도권을 행사해온 권노갑 최고위원쪽을 상대로 당권경쟁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특히 내년부터 대선정국을 앞두고 본격적인 판짜기에 들어간다는 시기적 미묘함 때문에 권 최고위원과 한 최고위원 사이의 경쟁은 향후 대권구도와 맞물려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김 대통령 이후의 주도권을 겨냥해 독자세력화를 꿈꿔온 한 최고위원으로서는 향후 대선정국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이번 당정개편을 통해 당정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권 최고위원으로서도 여기서 밀리면 대선정국 초반 판짜기에서 주도권을 놓치기 쉽고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갈수록 만회가 어려워진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 주변에서는 차기 사무총장 후보로 권 최고위원쪽에서 박광태 의원을 밀고 한 최고위원쪽에서는 문희상 의원을 밀고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박병수 기자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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