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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치권 공천, 이공계 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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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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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상희 의원이 탈당 선언한 속사정… ‘이공계 세대 교체’에 대해 ‘장 · 노년층 희망’ 주장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과학기술 정치’로 독특한 브랜드 파워를 쌓아온 한나라당 이상희 의원(66·4선)이 17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을 선언했다. 그는 부산 수영구 공천을 희망했다가 당 공천심사위가 예비심사 격인 면접 대상에도 넣어주지 않자 이런 선택을 했다. 그는 2월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와 국회 본회의 5분 신상발언을 통해 ‘정치권의 이공계 홀대, 인문계가 다해먹는 풍조’ 때문에 자신이 배제됐다며 한나라당의 자세를 비판했다.

4·15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상희 의원. 이 의원은 지난 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해 ‘과학 대통령’을 부르짖기도 했다.(이용호 기자)

면접 대상에도 끼지 못한 4선 의원


그러나 한나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유흥수 의원(67·4선)이 용단을 내려 불출마를 선언한 수영구에, 그가 공천을 신청한 것은 좀 그렇지 않느냐”라고 설명했다. 이 당직자는 또 “4선까지 한데다 비례대표를 하던 이 의원이 지역구를 또 하겠다는 것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요컨대 ‘문과·이과 문제’라기보다는 해먹을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둬달라는 것으로, 역시 ‘나이’가 문제였던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와 함께 과학계의 최연소 여성박사로 유명한 윤송이(29)씨를 영입하려고 교섭 중이다. 윤씨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에서 3년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과거 SBS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탤런트 이나영이 열연한 천재 공학도의 실제 모델로 널리 알려졌다. 이공계 배려와 함께 한나라당의 노쇠한 이미지를 바꿀 깜짝 카드로 탐낼 만해 보인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이공계 간판 교체’가 성공할지는 불투명한 것 같다.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던 한글과컴퓨터 이찬진 사장이 1996년 신한국당에 영입돼 전국구 배지를 달았지만 6개월도 못 버티고 1998년 5월 의원직을 사퇴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이찬진씨 사례는 정치적 역량의 검증 없이 ‘화려한 빛깔’ ‘젊은 피’ ‘액세서리 구비’ 성격으로 진행된 ‘인위적 세대교체’의 실패로 꼽혀왔다.

이런 맥락에서 이상희 의원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공계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공계 관련 입법 활동에는 훨씬 더 풍부한 의정 경험과 경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송이씨 같은 ‘청년 스타’가 선거전의 ‘치어 리더’ 효험이 있을진 몰라도, 실제 국회에서 과학기술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그는 여야간 정쟁보다는 내내 과학기술·정보통신 관련 상임위 활동에 주력해온 탓에 의정활동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그가 주도해 입법을 성사시킨 법률도 ‘생명공학육성법’ ‘항공우주산업촉진법’ ‘국가기술공황 예방을 위한 이공계 지원 특별법’ ‘e-Learning산업 발전법’ 등 수두룩하다.

“그래도 나이만으로는 밀어낼 수 없다”

이 의원은 또한 “내 나이에 탈당이 어울리지 않고 주책 맞아 보이는 점도 잘 안다”며 “그러나 능력과 관계없이 나이를 먹었다고 무조건 잘라내면 나이 든 세대는 무슨 희망을 갖게 되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고령화 사회로 가는 추세에서 장·노년층의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주저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그는 한나라당 공천이 좌절됐음에도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당을 통해서든 아니면 또 다른 형태로든 정치활동을 계속할 의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17대 국회에 들어가면 국민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의 뜻이 이뤄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한나라당이 자세를 바꿀 리 없고, 다른 정당들도 빛깔 좋은 젊은 피에 솔깃하기는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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