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공천혁명은 ‘희망사항’

494
등록 : 2004-01-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4·15 총선 정치권 물갈이 잣대로 떠오른 여론조사… 지지자 외면한 위로부터의 혁명일 뿐이라는 지적도

4·15 총선 정치권 물갈이는 누가 어떻게 주도할 것인가. 일단은 3김이 주도한 ‘낙점 공천’의 자리를 여론조사가 차지할 태세다. 정치적 지지자를 외면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공천혁명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정치가 확 바뀔까. 이 물음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제도와 사람, 정책과 정치 행태의 변화 등 따져봐야 할 것이 많다. 그 중 사람으로 문제를 좁혀봐도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4·15 총선을 앞두고 물갈이 여론이 드높고 과거와 달리 불출마를 선언한 현역 의원들이 30여명에 달하는 등 분명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유권자들이 각 정당이 내놓은 ‘최상품’을 놓고 고민하는 단계까지 이를 것인지는 공천 윤곽이 드러나는 2월 말께나 돼야 확인될 전망이다.

여론조사를 통한 공천은 정치적 지지자를 도외시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총선 정당연설회에서 유권자들이 후보 연설을 듣고 있다.(김진수 기자)

여론조사 기관이 공천권의 권좌 넘봐

일단 주목할 대목은 각 정당의 공천 방식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등 각 정당은 앞다퉈 “공천 혁명”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공천권을 행사할 보스나 계파가 사라지면서 정치권이 떠안아야 할 숙제가 됐다. 민주화 이후 짧게 잡더라도 20여년 정도 한국 정치의 ‘문법’이던 ‘3김식’ 정치질서가 해체됐지만, 그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지 않은 탓이다.


정치권은 여론조사라는 열쇠를 찾아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등 기성 정당들은 지난 대선 이후 국민참여 경선 방식을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해왔으나, 4·15 총선이 다가오면서 여론조사를 통한 공천으로 급격한 쏠림 현상이 일고 있다. 국민참여 경선 방식이 조직 장악력이나 현금 동원력 면에서 월등히 앞선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유지해줄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많은데다, 경선 후유증으로 내부 출혈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이제 여론조사 기관이 공천권의 권좌를 넘보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한나라당- 전문성 물어 정치꾼 걸러낸다

여론조사 의존도가 가장 높은 정당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은 설 이후 영남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여론조사에 들어갔다. 당 부설인 여의도연구소 주관이다. 이미 공천 신청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천심사위원회의 서류심사를 거쳐 3배수 이내로 압축한 예비후보들을 놓고 지지도를 조사하는 방식이다. 이 여론조사의 질문 문항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보들의 지지 여부 이외에 현역의원들의 교체 여부, 정치 신인의 선호도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각 정당은 정치권 물갈이 여론을 여론조사로 돌파하려고 한다. 한나라당에서 강력한 공천 권한을 행사하는 공천심사위원들이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한나라당의 한 핵심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질문 문항에는 이번 공천의 핵심 테마가 담겨 있다. 전문성이다. ‘일하는 한나라당’에 적합한 후보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꾼’으로 낙인찍힌 3선 이상급 인사들은 이 문턱을 넘기 힘들 것이다. 공천 신청을 한 현역의원들은 3배수 이내로 압축한 여론조사 대상에는 포함되겠지만 전문성과 후보 교체 여부를 묻는 두 관문을 통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한나라당에서 현역의원과 신인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항목이 ‘교체지수’다. 지역구 유권자를 대상으로 교체를 바라는 정도가 재지지하겠다는 여론보다 일정 수치 이상보다 높을 경우 아예 다른 공천 신청자들과의 경쟁에서도 배제되는 것이다.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은 교체/재지지 수치의 경계점을 2.5로 밝힌 바 있다. 부산에서 현역 의원과 맞붙은 한 신인은 “자체 여론조사를 해보면 2.3 정도 나온다”며 “현역 의원이 설 이후 검찰 소환 대상자로 거론되는 만큼 검찰에 왔다갔다하면 2.5를 무난히 넘길 테고 그럴 경우 공천받을 가능성은 커진다”고 말했다. 신인들은 2.5 이하로 낮추기를, 의원들은 높이기를 주문하고 있다.

1차 조사 결과 후보자의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 지역은, 당 바깥의 여론조사 기관으로 넘겨진다. 공신력 있는 전국 단위의 여론조사기관 2곳에서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여기서도 가려지지 않을 경우 지역 유권자 90%와 당원 10%로 선거인단을 꾸려 2월 말까지 경선을 치르게 된다. 공천심사위는, 경선 지역이 전체 지역구의 3분의 1가량인 70~80여곳으로 영남과 수도권에 집중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열린우리당- 국민경선은 살아 있다

열린우리당도 여론조사를 공천의 주요 잣대로 삼고 있다. 최근 공직후보자격심사위가 김근태 원내대표 등 11곳의 후보를 확정한 근거도, 여론조사 결과 다른 당 후보에 비해 경쟁력이 있고 단일 후보가 신청했다는 것이었다.

열린우리당에서 공천이 확정된 11명의 출마 예정자들이 필승을 다짐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우리당은 해당 지역구 유권자의 0.5% 이상이 참여하는 국민경선을 원칙으로, 성별·연령별·지역별 비례에 맞춰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해왔다. 한 지역구의 유권자를 10만명으로 볼 때 선거인단이 500명 이상 돼야 한다.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최소 350~1500명가량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런데 선거인단을 모으는 게 쉽지 않다. 일단 우리당을 지지하거나 어떤 당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여야 하고, 경선 당일 투표장에 참석할 의사가 확인돼야 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우리당이 내놓은 편법이 여론조사 방식에 의한 후보 확정이다. 후보자들이 합의할 경우 여론조사 방식으로 후보자를 확정하는 ‘뒷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후보자들이 일단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지겠지만, 계산이 분명치 않은 경우엔 경선보다는 손쉬운 여론조사 방식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민주당 탈당파가 “국민경선을 치르려면 기간당원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육성할 시간을 확보하려면 빨리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데 비춰보면, 신당 창당의 주요 근거가 되던 기간당원에 의한 상향식 공천이라는 원칙에 상당 부분 훼손이 가해질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당은 서울 강서 을, 대전 대덕, 경기 안성, 전남 여수 등 네 지역을 시범실시 지역으로 선정해 2월 초에 국민경선을 치를 예정이다. 선거인단을 성별·연령별·지역별 인구비례에 맞추는 것이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는 판단 아래, 일단 연령별(40살 전후) 비례에 10%가량의 가중치를 두고 나머지 항목은 크게 구애받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선거인단을 무작위 추출해 후보들에 의한 동원 부작용을 막겠다는 계산이다.

우리당의 공천은 4곳의 경선을 치러본 뒤 큰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보완책을 마련해 다른 지역까지 국민경선을 확대할 수도 있고, 여론조사 방식이나 당원 대상 경선 등으로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 후보자 청문회 인터넷 생중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공천작업에 이미 돌입한 상태인 데 반해, 민주당은 아직 ‘총론’ 부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공직후보자심사위원회를 결성했지만, 조순형 대표의 대구 출마 선언과 김홍일 의원의 탈당 등 여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다 호남 중진들의 ‘결단’을 압박하는 당내 분위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호남 공천혁명’을 내세우며 지역구 이동 등을 꾀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민주당은 중앙당의 운영위원회 격인 각 지구당의 상무위원회가 △당원 직선 △국민 경선 △여론조사 중 한 가지 방식을 채택하도록 돼 있다. 문제는 지구당위원장이 임명한 상무위원들이, 공천 신청을 한 현역의원들의 영향력하에 있다보니 현역의원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신인들의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에서는 신인들이 요구하는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하는 의원들이, 대단한 기득권을 포기한 것으로 존중받는 분위기다.

이 밖에 민주당은 후보자간의 경쟁이 치열하거나 인지도가 낮은 신인들이 몰려 있는 곳은 공직후보자심사위원회 주최로 공개청문회를 열기로 해 눈길을 끌고 있다. 강운태 사무총장은 “후보자들이 심사위원들에게 직접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설명하는 방식이며 전 과정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될 것”이라며 “서울 강서을 등 수도권과 호남 일부 7~8개 지역이 청문회 실시 대상으로 1월 말께부터 실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각 정당들이 ‘밀실공천’이라는 구태를 벗기 위해 공천심사기구에 외부 인사를 절반가량 참여시키고 공천 방식의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사실상 여론조사에 의한 공천 방식에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진성당원이라는 토대가 취약한 정당들이 고육지책으로 택한 방식이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처럼 정당정치가 뿌린내린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라며 “경선장을 찾는 수고를 감수하고 던진 1표의 의미와 전화를 받고 이름을 들어본 후보를 택하는 방식은 그 선택의 진지성, 책임성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난다”고 진단했다. 정당은 정치적 지향점을 공유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정당 지지 여부를 물어 그 범위를 축소한다고 하더라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방식으로 후보자를 결정하는 방식은 무리라는 설명이다.

진정한 상향식 공천은 아직 멀었다

현재는 국민경선 등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정치 신인들이 인지도 면에서 절대 열세인 여론조사 방식을 선호하고 있지만, 이런 방식이 공고화될 경우 새로운 진입장벽이 될 가능성도 있다. 또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어렵게 후보자가 결정되더라도, 당원 혹은 지지자 결집 과정이 생략된 채 선거운동을 벌여야 하는 신인들이 과거와 다른 행태의 선거운동을 치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각 정당이 꾀하고 있는 변화가, 1인 보스에 의한 공천 이후 보스가 주는 돈으로 선거를 치르고 배지를 달고 나서는 그 보스를 위해 충성하는 식의 정치 행태를 극복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하겠지만, 정당정치의 발전과 진정한 의미의 상향식 공천이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정치 발전을 꾀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정당이 자랑하는 “공천 혁명”이라는 표현을 존중해준다고 하더라도, 굳이 따지자면 ‘아래’로부터가 아니고 ‘위’로부터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공천 방법의 개선인 셈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