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영남권 중진들 불출마 대열에 대거 합류… 정당 민주화 · 전방위 사정 등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
“국회의원의 소원은 국회장(葬)을 치르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면 재선을 위해 뛰고 또 뛰면서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한다는, 정치인에 대한 과장된 ‘비아냥’이다. 이 짓궂은 비아냥은 그동안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웠다. 공천 과정이나 선거에서 떨어지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이들은 극히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정치권에 변화가 일고 있다. ‘희망퇴직’ 바람이다. 불출마 선언이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지난해 말 한나라당의 ‘물갈이 파동’ 와중에 양정규 의원 등 중진 의원 3명이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물갈이를 요구했던 소장파 의원들조차 “두 자릿수만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희망을 피력했다. 그런데 1월10일 현재 여야 통틀어 20명(표 참조)에 달한다. 주로 60대 후반 이상의 다선 의원들이며, 지역적으로는 한나라당 영남권 의원들이 대부분이다. 물갈이 논의를 주도해왔던 오세훈 의원이 갑작스럽게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속도가 붙는 양상이다. 지금 추세로라면 각 당이 본격적인 공천작업에 들어가면 현재보다 곱절 이상 늘어날 수도 있다.
공천제도 변화·정치개혁 흐름에 밀려
역대 총선에서 볼 수 없었던 ‘불출마 선언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의원들의 ‘불출마 사유’는 갖가지지만, 우선 정당 민주화에 따른 공천제도 변화와 지난 2002년 대선 전후로 불어닥친 정치개혁 바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 총선만 해도 공천권을 쥔 당의 총재나 몇몇 영향력 있는 중진들에게 ‘충성’을 다해 공천을 따내기만 하면 이미 당선이 되거나 절반 이상 다가선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공천 제도의 급격한 변화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공천을 보장해주지 않는 만큼, 자생력이 강하지 않고서는 본선에 나가기 전에 고꾸라질 수 있는 것이다. 불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는 한나라당으로 문제를 좁혀보면, 앞에서 언급한 큰 흐름에다 당내 권력투쟁 성격도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당내에서는 시기적으로 초선인 오세훈 의원 이후 정창화·유흥수 의원 등 중진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오세훈 효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최병렬 대표 주도의 물갈이 공천 의지가 서청원 전 대표의 반발을 누르고 대세를 장악한 뒤 불출마 선언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서 전 대표의 ‘투쟁’에 힘을 실어주면서 ‘혹시나’ 했던 의원들이, 서 전 대표를 믿고 버티다가는 더 추한 꼴을 당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느냐”며 “‘명예로운 퇴진’이라고 포장됐지만 사실상 최 대표쪽의 헤게모니에 의해 밀려나가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소속 의원과 지구당위원장들을 A~E 등급으로 나눈 당무감사 자료 유출로 분당 위기까지 치달았던 내분 사태가 1월5일 운영위원회를 기점으로 소강 국면으로 접어든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최 대표가 직접 칼을 휘두르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2000년 ‘이회창식 공천’과 다를 바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최 대표의 ‘개혁 공천’ 드라이브에 반기를 들어온 쪽에서는 “이회창 총재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는 불평을 공공연히 털어놓는다.
최 대표쪽은 출마… 민주 · 우리당도 영향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들이 주로 최 대표와 거리를 둬온 의원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들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이나 배경을 가진 의원들 가운데, 출마 의지를 강하게 밝히고 있는 중진들은 주로 최 대표 체제에 협조했거나 적어도 반기를 들지 않은 의원들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정치권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인 사정이 이들의 불출마를 부추겼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영남권에서 출마를 준비중인 한 정치신인은 “중앙당에서 수백억원을 모금해 상당액을 지구당에 지원했지만 실제 선거운동에는 그만큼 쓰이지 않았고 지역구의 핵심 당직자들은 의원들을 의심하고 있다”며 “이들이 불출마 선언으로 검찰의 사정권 밖으로 벗어나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오간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에서 시작된 불출마 도미노 현상은, 벽을 뛰어넘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쪽으로도 옮겨가는 분위기다. ‘호남 물갈이 논란’이 일고 있는 민주당에서는 장태완·김운용 의원이, ‘비리 의원 공천 배제’ 주장이 제기된 열린우리당에서는 참회를 이유로 송영진 의원이, 그리고 건강이 악화된 설송웅 의원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불출마 선언이 한나라당만큼 번져나갈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한나라당이 최 대표를 중심으로 한 확고한 헤게모니를 넓혀가는 과정인 반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그만한 당내 리더십이 형성되지 않았고 집단지도체제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면 재선을 위해 뛰고 또 뛰면서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한다는, 정치인에 대한 과장된 ‘비아냥’이다. 이 짓궂은 비아냥은 그동안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웠다. 공천 과정이나 선거에서 떨어지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이들은 극히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정치권에 변화가 일고 있다. ‘희망퇴직’ 바람이다. 불출마 선언이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잇따른 불출마 선언은 당내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서청원 의원이 지난 1월8일 의원총회에서 당무감사 자료 유출에 대해 따지고 있다.
역대 총선에서 볼 수 없었던 ‘불출마 선언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의원들의 ‘불출마 사유’는 갖가지지만, 우선 정당 민주화에 따른 공천제도 변화와 지난 2002년 대선 전후로 불어닥친 정치개혁 바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 총선만 해도 공천권을 쥔 당의 총재나 몇몇 영향력 있는 중진들에게 ‘충성’을 다해 공천을 따내기만 하면 이미 당선이 되거나 절반 이상 다가선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공천 제도의 급격한 변화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공천을 보장해주지 않는 만큼, 자생력이 강하지 않고서는 본선에 나가기 전에 고꾸라질 수 있는 것이다. 불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는 한나라당으로 문제를 좁혀보면, 앞에서 언급한 큰 흐름에다 당내 권력투쟁 성격도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당내에서는 시기적으로 초선인 오세훈 의원 이후 정창화·유흥수 의원 등 중진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오세훈 효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최병렬 대표 주도의 물갈이 공천 의지가 서청원 전 대표의 반발을 누르고 대세를 장악한 뒤 불출마 선언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오세훈 의원의 불출마 선언은 한나라당 중진들을 압박하는 구실을 했다. 오 의원이 지난 1월8일 국회본회의장에서 최병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