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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스러져가는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상처들

식민지배가 끝난 지 70년 지났지만 전쟁 및 피폭 피해 보상은 미적거리는 일본… 일본 포토저널리스트가 북한에서 포착한 식민지배의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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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02 16:15 수정 : 2015-09-0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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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프리랜서 기자인 이토 다카시는 북한의 아시아·태평양 전쟁 피해자를 오랫동안 취재했다. 그가 지난 6월 중순 보름 동안 평양 등에서 일제 잔재와 그 피해자를 취재한 기사와 사진을 <한겨레21>에 보내왔다. _편집자

철도성혁명사적관에 전시돼 있는 녹색의 여객 차량과 사적관 안내인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난 지 70년. 하지만 일본은 북한에 대해서는 아직도 과거 청산을 하지 못했다.

평양역 가까이에 있는 철도성혁명사적관에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던 시절 운용하던 철도 차량이 전시돼 있다. 본관 옆 ‘차량관’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녹색의 여객 차량은 금강산 관광을 위해 ‘금강산전기철도’가 도입한 것이다. 1930년대에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일본 히타치제작소가 만든 볼록형 전기기관차와 ‘남만주철도’라는 로고가 들어간 유개화차가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함께 전시돼 있다. 일본의 철도 마니아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사적관 안내인의 설명은 (일본인이 듣기에는) 불편했다.

“일본은 대륙 침략과 석탄, 광석 등을 약탈할 목적으로 조선에 철도를 부설했다. 철도 기술을 조선인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해방 뒤에는 기관차를 파괴하기도 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피해 국가에 많은 문제를 남기기는 했지만 전후 보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필자는 30년 넘게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피해자들을 취재해오고 있다. 북한의 피해자는 1992년부터 취재해왔다. 이번 방북은 33번째. 지난 6월16일부터 30일까지 평양과 일부 지방 도시에 머무르며 취재를 했다.

폭격을 피해 남은 일본 가옥들


‘청암 혁명사적지’에 복원돼 있는 여관과 식당

북한에는 일제강점기 건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 투하한 양의 3.7배가 넘는 60만t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 가운데 드물게) 폭격의 피해를 면했거나 파괴는 되었지만 복원돼 소중히 보존된 일본 가옥이 남아 있다.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혁명사적지’ 건물들이다.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 혁명사적지’에는 여관,식당, 사진관 등이 충실하게 복원돼 있다. 일부 콘크리트나 돌 부분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나남 신사’ 유적의 긴 콘크리트 계단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끝까지 올라가자 둥근 구멍이 있는 돌 한 쌍이 보였다. 석등 같았다. 이 유적의 바로 옆에 있는 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초로의 부부에게서 이야기를 듣었다.

‘나남 신사’ 유적 근처에서 만난 초로의 부부

“일본은 조선의 어떤 도시건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휴일이면 많은 일본인이 모여들었지요.”

지금까지 북한에서 약 80명의 식민지 지배 피해자를 취재했다. 이번 취재에서는 이들 가운데 4명을 다시 만났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을 도쿄의 메구로구 유텐지(祐天寺)에 보관했다. 한반도 남쪽에서 소집된 사람의 유골은 한국으로 반환됐다. 하지만 북이 고향인 425인위의 유골은 방치된 상태다.

김경원(1937년~)과는 2005년 처음 만났다. 육군 군속이었던 아버지 김정표는 인도네시아의 세르베스섬에서 전사했다. 2004년 12월 아버지를 길버트제도에서 잃은 김용호와 함께 일본을 방문해 아버지의 유골과 대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입국을 거부했다. 김용호는 2010년 12월 사망했다. 김경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유텐지에 가서 유골을 확인하고 싶다. 비록 그것이 아버지의 유골이 아니더라도 조선인의 유골이라면 모시고 와서 어머니 무덤 옆에 묻고 싶다.”

2001년 취재했던 김치린은 1924년생이다. 1944년에 소집돼 ‘제4농경근무대’ 소속으로 아이치현에서 농사일을 해야 했다. 육군 병사였기 때문에 명부가 남아 있었다. 필자는 약 2500명의 명부 안에서 ‘쇼와 19’(1944년)에 본적 ‘순천군’에서 소집된 ‘가네무라 치린’(金村致麟)이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을 찾았다. 본인의 증언과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사람은 그의 장녀 김찬순(1959년~)이었다. 아버지 김치린은 2009년에 사망했다.

김찬순 씨

“일본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버지의 분노를 기억합니다. 일본은 철천지원수입니다. 아버지가 품으셨던 한의 대가를 유족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왼쪽 박문숙 씨, 오른쪽 리계선 씨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폭을 당한 박문숙(1943년∼)은 1998년에 처음 만났다. 이번이 11번째다. “매월 한두 번씩 심장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간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피폭자협회’ 부회장이다. 1992년 ‘원수금(原水禁) 대회’ 참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때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았다. 일본 정부는 ‘피폭자 원호법’에 근거해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자에게는 국적을 불문하고 건강관리 수당 지급 등 지원 조치를 실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국교가 없는 대만을 비롯한 해외의 피폭자에 대해서는 이미 실시하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한 리계선(1941년~)과는 9번째 만남이다. 위장과 담낭·췌장이 좋지 않았다. 필자를 만나기 위해 링거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리계선의 어머니가 ‘건강수첩’을 취득했을 때 문서에는 딸도 함께 피폭됐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청을 하면 ‘건강수첩’을 취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영화 <히로시마·평양>(2009년 공개)에서 리계선은 ‘건강수첩은 피폭의 증거’라며 건강수첩 취득을 강력하게 요구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체념한 듯 “우리가 죽기를 바라는 일본 정부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에 이어 박문숙이 말했다.

“오랫동안 많은 일본인들이 활동을 해주었지만 일본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북한에는 건강수첩을 취득할 가능성이 높은 피폭자가 리계선을 포함해 최소 8명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건강수첩을 취득해 북한에 있는 피폭자도 원호를 받을 수 있게 하려는 민간 운동이 있었다. 일본 정부와 히로시마현 의사회가 의료 지원을 위해 움직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큰 기대를 가졌던 북한 피폭자들이 농락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리복순을 만나러 갔는데 모세혈관이 파열돼 얼굴이 부어 있었다. 일본에서 사죄와 보상을 받아 피폭 2세 문제도 해결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한 지 3일 만에 돌아가셨다.”

이 이야기는 벌써 몇 번이나 박문숙에게서 들었다. 상당히 억울한 것이다. 리계선과 박문숙의 이번 발언은 북한의 피폭자가 사죄와 보상만을 요구하는 원칙적 입장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피폭자협회 등이 2007년 실시한 조사에서는 피폭자 1911명을 확인했지만 이미 그중 1529명이 사망한 상태다.

북한에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이름을 밝히고 증언한 사람은 219명. 이름과 함께 얼굴도 공개한 피해자는 46명이다. 필자는 이 가운데 14명을 만나 사진을 찍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현재 생존자는 1명. 13명이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 피해자도 건강 상태가 극히 좋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만들어 보상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국가에 의한 보상이 아닌, 일본 정부도 출연하지만 민간에서 모은 돈을 함께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방식이었다. 이 조치는 한국 등의 피해 여성들에게 큰 혼란과 반발을 가져왔다. 필자도 강력하게 반대한 사업이었지만 북한에서는 실시도 하지 못한 채 2007년에 종료됐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북한을 제외했다.

역사 부채 청산, 일본에도 필요한 것

필자가 이전에 만났던 피해자와 목격자는 대부분 사망한 상태다. 하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가 없어지더라도 일본은 부정적인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해 과거의 전쟁 책임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이것이 피해자는 물론 일본의 미래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수도 평양 거리에는 ‘조국 해방 70주년’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조선중앙TV에서는 <방탄벽>이라는 항일 무장투쟁에 관한 총 14편의 연속 드라마가 황금시간대인 저녁 8시30분부터 방송되고 있었다. 이례적으로 예고편이 방송됐다. 일본인 역을 하는 배우는 일본어로 연기를 했다. 그 대사에 한글 자막을 넣어 방송할 정도로 제작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양 거리의 ‘조국 해방 70주년’ 간판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조선에서 수많은 청년을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강제동원 했다. 이 가운데 많은 조선인 여성을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로 동원한 것은 식민지 정책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일본군은 위안소를 군사점령한 (동남아) 국가만이 아니라 조선에도 설치했다. 한반도에서 위안소 건물이 최초로 확인된 곳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동이다.

일제강점기에 방진은 약 150가구가 사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가까이에 큰 거리는 없었다. 약 1km 떨어진 해군기지 ‘나진방면 특별 근거지대’를 위한 시설이었다고 추정된다. 민간인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해군이 관리하는 군인·군속 전용의 위안소였다.

‘은월루’라 불리던 위안소

필자는 16년 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곳을 취재했다. ‘은월루’라 불리던 위안소는 해방 뒤 ‘방진진료소’로 사용됐지만 외관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위안소 맞은편에는 군의관이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하던 건물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남아 있던 또 한 동의 위안소 ‘풍해루’의 흔적도 밭으로 변해 있었다. 귀중한 역사적 증거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유감이었다.

일제강점기 방진의 위안소에 대해서 상세히 증언해줄 사람들은 거의 죽었다. 몇몇 주민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위안소’ 건물

청진시 나남지구에서 (일본) 육군의 위안소 지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2002년 현장을 방문했다. 나남은 육군이 새롭게 건설한 도시로 ‘제19사단’의 시설이 시가지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교외의 나지막한 산과 철도 고가로 둘러싸인 장소에 ‘미와노사토(美輪の里)’가 조성됐다. 민간인이 운영하는 수십 채의 ‘유곽’에 일본인·조선인을 합쳐 약 120~200명의 여성이 있었다. 조선인은 60여 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육군의 위안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곽 ‘미와노사토(美輪の里)’

이 미와노사토 근처에서 1941년부터 4년 동안 살았다는 한 남성(1929년~)을 취재 오기 전 일본 교토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미와노사토 안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어요. 일요일이 되면 도로가 군인으로 가득 찰 정도였어요. 이곳은 군인을 위한 위안소라 민간인은 이용할 수 없었어요.”

미와노사토는 유곽이었지만 군의 위안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최북단에 있는 나선특별시. 이곳의 인민위원회가 나진지구 안화동에 남아 있는 위안소 흔적으로 안내해주었다. 지역에서는 이전부터 그 존재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차에서 내리자 부근에 살고 있는 김명희(1948년~)가 손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앞장서고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경사에 건물의 기초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명희 씨

“이 건물 바로 아래에 일본군 장교 숙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장교들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건물 윗부분이 파괴됐다.”

건물 중앙에 콘크리트 통로가 있었고 양옆으로 같은 크기의 작은 방들이 나란히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직선거리로 약 13km 떨어진 방진의 위안소와 매우 유사한 구조였다. 이 가까이에는 다른 위안소도 있었다고 했다. 부근에 남아 있는 일본 가옥의 흔적이 위안소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더는 알 수 없었다. 김명희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일본의 죄악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 위안소 흔적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나도 지금 아들과 손자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방진과 나남에 남아 있던 위안소 건물은 풍화가 진행되면서 철거된 곳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소속의 한 간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일본에 대해 과거 청산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의 가해 역사를 증명하는 위안소의 보존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일본의 죄악 잊지 않기 위해”

일본에는 패전 뒤 태어난 사람이 80%를 넘어서고 있고, 북한에서도 식민지배를 모르는 세대가 증가하고 있다. ‘대외사업국’의 윤국섭 부국장은 48살.

“지금까지 성노예 피해자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이토 선생의 취재를 받으면서 방진과 나남의 위안소에 처음 가보고 실태를 알게 되었다. 일본과 이런 불행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6월9일룡북고급중학교’로 갔다. 학생들의 나이는 14~16살. 역사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에 들어가자 ‘일제의 조선 점령과 반일의병투쟁·애국문화운동’이라는 글이 화이트보드에 쓰여 있었다. 수업 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여학생은 “일본이 조선인의 이름과 문자를 빼앗은 악독한 침략자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한 남학생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일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세력”이라고 말했다. 교사인 한은희는 이렇게 말했다.

‘평양6월9일룡북고급중학교’의 한 교실

“일제의 조선 침략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은 3년 동안 33시간이다. 새로운 세대는 식민지 지배를 피부로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빨리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당시의 물건 또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조선혁명박물관’ 등을 가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체험자들은 세상을 떠나고, 역사적 사실은 풍화한다. 가해 국가인 일본은 과거의 역사를 미화하면서 다시금 전쟁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한편 피해 국가는 체험 계승을 하는 과정에서 단순화하거나 과장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양자의 관계 계선이 늦어질수록 화해는 더욱 어려워진다.

지난해 5월 ‘북-일 스톡홀름 합의’에서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쌍방은 조-일 평양 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 문제를 해결하며 국교 정상화를 실현할 의사를 다시금 밝히고 일-조 간의 신뢰를 조성하고 관계 개선을 지향하여 성실히 임하기로 하였다.”

진정한 비정상의 정상화를 향해

식민지 지배 40년과 식민지 지배의 종언으로부터 70년. 110년 동안 북한과 일본의 관계는 비정상 상태에 있었다. 북-일 간 최대 과제는 식민지 지배의 청산이다. 이를 통해 일-조 국교 정상화는 동아시아에 큰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일본 정부는 전략적 관점에서 ‘스톡홀름 합의’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금 장기간 북-일 간에는 어떠한 과제도 해결하기 힘들 것이다.

평양= 글·사진 이토 다카시 프리랜서 기자·포토저널리스트

번역 코디네이터 안해룡(아시아프레스)

이토 다카시 : 포토저널리스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해 군인과 군속, 피폭자,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지속적으로 취재해오고 있다. 다큐멘타리영화 <히로시마·평양>의 감독. 남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취재한 <무궁화의 슬픔> 등 다수의 사진집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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