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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제주의 가장자리, 5월의 꽃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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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14 00:00 수정 : 2010-02-0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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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께 긴 시간 돌아온 이병형 씨가 만든 제주의 라이브 카페…빈집을 직접 꾸며 음악만 채웠으니 마음대로 계산하고 쉬었다 가시오

▣ 제주=사진·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병형씨는 낮에는 카페를 비워둔 채 인테리어 공사로 돈을 벌고, 야간에는 카페를 찾는 고객에게 봉사하는 차원에서 매일 밤 9시에 직접 색소폰을 연주한다.

‘5월의 꽃.’

먼저 인생 유전 스토리부터 살펴보자. 1967년, 까까머리 중학교 2학년인 이병형. 강원도 횡성중 밴드 부원이던 아이는 밤에 친구랑 악기 창고를 부수고 들어가 클라리넷을 훔친 뒤 원주까지 걸어가 서울행 기차에 무임 승차를 한다. 제천에서 검표원한데 걸려 도망치느라 친구와 헤어지고, 돈 한 푼 없는 아이는 제천 시내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며 숙식을 해결한다. 그러던 중 중국집에서 우연히 기타를 둘러멘 소경을 만나 그와 함께 여러 요정을 돌아다니며 클라리넷 연주를 하게 된다. 돈도 꽤 벌며 평택 쑥고개 K55 앞 외인 클럽, 인천 ‘위스키 메아리 클럽’, ‘유니온 클럽’ 등에서 연주하다가 지금 돈 400만원쯤 되는 색소폰을 사야겠다는 생각에 1년 만에 횡성 집으로 갔다. 그가 돌아온 것을 눈치챈 경찰의 조사를 받고 훔쳤던 클라리넷은 넘겨줘야 했다. 아버지에게 색소폰을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빚을 내서 장남인 병형을 서울 종로 2가로 데려가 색소폰을 사준다. 미 8군 쇼프로에서 보컬 그룹 ‘사랑과 평화’의 멤버로 최이철씨 등과 함께 그 색소폰으로 연주하고 노래를 하며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부산 공연 때는 남포동 여관에서 전인권, 전유성씨와 한방을 쓰며 고생하기도 했다.


올해 쉰여섯인 이병형씨는 1978년 결혼을 한 뒤에도 한동안 음악을 했지만, 음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생각에 1985년 돌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목수와 페인팅 기술 등을 배우며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변신한다. 그러나 손재주 좋은 이씨가 아무리 멋있는 인테리어를 해도 학벌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씨는 “무인 카페는 내 집이 아니라 만인의 집”이라며 “돈이 아니라 믿음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적자를 보더라도 절대로 문을 닫지 않겠다”고 말했다.

2002년 제주시 연동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는 후배가 색소폰을 불어달란 말에 무일푼으로 인테리어 장비를 싸들고 혼자 제주도로 왔다. 낮에는 인테리어를 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색소폰을 불었다. 카페 운영이 여의치 않았다. 후배 눈치가 보였다. 2004년부터 한경면 저지리로 가 14평 남짓한 다 쓰러져 가는 빈집을 빌려 카페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씨는 둘째아들과 단둘이서 2년가량 해안가에 떠밀려온 나무 쪼가리와 화물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나무 팔레트 등 폐자재만을 주워다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5일, 작지만 아름다운 카페를 완성하고 ‘5월의 꽃’이라고 이름 지었다. 인테리어 작업 때 폐자재에서 뽑아낸 못만 18kg들이 상자로 6개나 나왔다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간다. 얼마나 많은 인생의 굴곡이 담겨 있는 카페인가.

카페 운영이 이채롭다. 주간에 이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커피, 녹차, 주스, 맥주를 마시고 자신이 내키는 만큼만 카운터 앞 함에 돈을 넣고 나오면 된다. 야간에는 이씨가 나와 피자와 안주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색소폰을 불며 생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이씨는 “무인 카페를 연 뒤 얼마간은 음식 값을 한 푼도 안 내고 가는 사람도 있고, 인테리어 소품까지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다”며 “그러나 세상에는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고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카페는 별 이득 없이 가까스로 운영되고 있지만 카페 옆에 조그만 원룸을 지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약간의 돈만 내고 이용할 수 있는 무인 방갈로도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제주시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박종훈(40)씨가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가고 있다.

이씨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서울에 있는 부인과 재즈 피아노를 하는 큰아들(27), 노래를 하는 둘째아들(22), 베이스기타를 하는 셋째아들(20)이 모두 올해 말 제주로 내려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3∼4년 정도 더 카페를 운영하고 인테리어 작업을 해 돈을 모아 3천∼4천 평 부지를 확보할 계획이다. 여기에다 자연적인 소재만으로 인테리어를 한 10실 규모의 숙박 시설과 라이브 카페를 지을 예정이다. ‘5월의 꽃’은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분재예술원으로 가는 군도 17호선 변에서 만날 수 있다.

제주시 일도동에 사는 김나미(32)씨가 커피를 마시고 설거지한 잔을 놓고 있다. 김씨는 혼자 와서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갔다.

서울에서 여행을 온 남궁혜선(26)·박재현(26)커플. 주방에서 이병형씨가 피자 만드는 것을 구경하다 벽에 재료와 그 양을 적어놓은 메모를 보며 웃고 있다. 이씨는 미 8군 공연을 다니며 어깨너머로 피자 만드는 법을 배웠단다. 맛이 좋았다.

가족과 함께 온 고옥순(73)씨. 그는 생전 처음 카페에 와본 것이라 했다.

“본인이 드신 컵은 옆 세면대에서 닦아서 원래 자리에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여기서는 모든 게 ‘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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