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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산’은 너희에게 힘이 되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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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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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골 부연분교에 남은 세 아이들…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했던 2000년의 기억을 꺼내보며

▣ 강릉=사진·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강원 산간에 대설주의보란다. 미리 전화를 넣었다.

“여보슈?”

“할머니, 저 찍사예요. 기억나세요?"


“어, 오랜만이래요.”

“눈 많이 와요?"

“무릎까지 왔대요. 눈꽃이 활짝 폈대요.”

“지금도 와요?”

“온통 하-야.”

“저 지금 가려구요.”

“어딘데?”

“인천이요.”

“어이구 눈 녹구 와요, 차 못 다닌대요.”

“저 눈 사진 찍으려구요.”

“안 된대요, 못 넘어온대요.”

1월17일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어느새 ‘진부 오대산’ 표지판이 보인다. 자동차 와이퍼가 뿌득뿌득 눈을 걷어내며 운전을 돕지만, 간간이 날리는 눈에 전후재에서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헛도는 바퀴, 잔뜩 무리한 엔진. 6·25를 모르고 지나쳤다는 부연동 입구가 시끄러워졌다. 몇번 와본 길인데도 낯설고 무서워진다. 그러던 차에 나지도 들지도 못하는 차가 앞에 보인다. 아, 장동환 선생님 승용차다. 나도 차를 멈췄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전조등이 해발 700m 전후재에서 빛을 뿜어내고 함박눈 내리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등산용 삽으로 2, 3m 눈을 긁어내자 간신히 차가 움직인다. 멈추고, 긁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드디어 동현이네 집에 도착했다.

01. 오대산 가마소에 첫눈이 왔네

강릉시 연곡면 삼산 3리.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저 이 동네를 ‘부연 마을’이라 부른다. 원래는 맑은 계곡에 가마솥처럼 널찍한 웅덩이가 있다고 해서 ‘가마소’라 했는데, 일제시대 때 한자어 ‘부연’(釜淵)으로 바뀌면서 그대로 굳어졌다. 고갯마루에 오르면 오대산 줄기가 끝간 데 없이 장엄하게 펼쳐진 모습이 드러난다. 아련한 산 끝에서부터 발 아래까지 안개가 어려 있는 모습이 하늘에서 발원한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듯하다.

올겨울 첫눈이 내린 터라 두환이와 동현이 형제도 마냥 즐겁다. 온 사방이 눈이니 어디든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강아지도 덩달아 좋아한다. 두환이는 학교운동장에서 아롱이와 몇 차례 씨름을 하더니 결국 녹초가 되고 말았다.

02. 3학년 동현이의 사회 수업

부연분교는 9시30분에 수업이 시작한다. 하지만, 겨울엔 시간 지키기가 쉽지 않다. 눈이 오면 승용차가 다닐 수 없어 수로원(?)의 지프나 학교의 세렉스 승합차를 이용해야 한다. 1953년 설립인가를 받아 한때 예순명의 아이들이 다녔던 이곳엔, 이제는 한분의 선생님과 세명의 아이만이 남아 있다. 오는 2월에 주형이가 졸업하면 형제 둘만이 남게 된다.

“시냇물은 어떤 소리를 내며 흘러가지?” 3학년 사회 수업 시간, 장동환 선생님이 질문을 던진다. 주형이(6년), 두환이(5년), 동현이(3년)가 재잘댄다. “쉬이, 하고 흘러요.” “쏴아, 쏴쏴 흐르지 않나?” “아냐 임마. 철퍽철퍽 해!” 교과서에는 ‘졸졸졸’이라고 돼 있지만 아이들은 그저 제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한다. 선생님이 당황한다. “그, 그래 그렇게 흐르기도 하지. 그런 소리 말고는 뭐 없나? 졸졸졸이라고 흐르기도 하는데….” ‘쉬이’ 흐르고 ‘쏴쏴’ 흐르는 시냇물에서 자란 아이들, 그 옆엔 버들치와 꺽지와 쉬리가 있다.

아이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자연스럽게 커간다. 형에게서 노래를 배우고, 셈을 배우고, 몇시에 조용히 제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뿐이랴. 봄이면 어디에 참칡이 많은지, 어느 개울에 가야 물고기가 잘 잡히는지, 이 뱀이 독이 있는지, 사소하게 중요한 것들을 전수받는다.

03. 그땐 조금 더 신이 났었지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니?” “도시는 싫어요. 수돗물에서 냄새가 나요.” 냉큼 대답하는 주형이. 2년 전 서울에서 전학 온 이 아이는 처음 봤을 땐 그저 잠시 이 마을에 놀러온 아이 같았다. 하지만 뽀얀 얼굴에 도전적인 말투를 가졌던 그 아이는, 지금은 천생 부연 촌놈이 됐다. 봄이 오면 교복을 입고 강릉 시내의 중학교에 다니게 된다.

2000년엔 학생 수가 지금보다 많았다. 두환이가 1학년이었던 그해 전교생은 9명이었고, 선생님도 두 분이 계셨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학교 식구들이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던 동현이까지 끼어들어 사진엔 12명이 등장한다. 누나, 형들이 많았던 그땐 무엇을 해도 지금보다 더 신났다.

동네에 이발소가 없다 보니 강릉 시내에 있는 이발사 아저씨가 학교에 들러 아이들 머리를 다듬어 줬다. 1999년, 그 때도 용천이용소의 함준기 아저씨가 40여일마다 찾아와 주셨다. 물론 이날도 선생님과 동네 어르신 모두가 이발하는 날이었다.

04. 어느 스쿨버스도 부럽지 않아요

부연 마을에는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다. ‘눈곱파리’만이 날아다닌다. 일년에 4, 5일을 빼곤 항상 방에 불을 넣어야 하는 산골이라 한여름에도 멱을 감을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기껏 물에 들어가서도 두 시간 이상 놀 수 없을 만큼 물이 차다. 그때 동네 개울에서 같이 물놀이를 했던 정아는 가족을 따라 강릉 시내로 이사를 갔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니던 기환이도 졸업 뒤엔 시내로 갔다.

그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은 트럭을 타고 등하교를 했다. 산골이라 다들 떨어져서 살았던 9명의 학생은 특히 눈이라도 많이 내린 아침이면 정아 아빠의 트럭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곤 했다. 자갈길을 20분 동안 털털거리며 달리면 아이들은 온몸이 얼얼해졌지만 짙푸른 나뭇잎의 터널 속을 달리는 트럭에 올라서면 세상 어느 스쿨버스도 부럽지 않았다.

카메라를 거두고 인천으로 돌아와서 얼굴을 닦았다.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물을 보니 부연분교에서 묻혀온 아이들의 냄새까지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아서 마냥 아쉽다. 맑은 개울과 푸른 산이 아이들이 대처로 나가 삶을 꾸리는 데 짐이 되어줄지 힘이 되어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9명의 아이들이 함께 뒹굴면서 개울물에 실어보낸 장난들, 남은 아이들이 여전히 눈밭에 뿌려놓는 씩씩한 웃음들, 그리고 넘어진 동생을 일으켜세우며 아파해본 마음들은 모두 이 아이들을 더 큰 사람으로 만들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런 믿음이 머리 속에 새겨진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위로 또렷하게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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