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인 불로소득 챙기기 수단으로 전락… 증시기반 무너뜨릴 악재로 작용해도 감독 소홀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을 계기로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제도의 전면 손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두 가지 변종채권이 기업의 원활한 자금조달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대주주와 특수관계인들의 재산불리기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에서 특정인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자본이 증액되었을 때에는 회사와 다른 주주에게 그만큼 피해가 돌아간다. 이는 주식회사제도의 핵심인 ‘주주평등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반자본주의적 행위이다.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이나 유일반도체 장성환 사장 등 동방금고 사건의 연루자들에게 CB나 BW는 ‘도깨비 방망이’나 다름없었다. 먼저 유일반도체 장성환 사장의 경우, 회사로 하여금 지난해 6월 30억원짜리 BW를 발행하도록 해 전체 물량의 90%를 자기가 샀다. 이때 회사에 낸 돈은 고작 9천만원. 채권의 만기는 50년, 연이율 7%로 조건을 달아 현재가격으로 할인함으로써 헐값 인수가 가능했다. 또 신주인수권의 행사가격은 당시 코스닥에서 유일반도체의 한달평균 주가 7만원보다 훨씬 낮은 2만원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장 사장은 75억원 상당의 주식평가이익을 얻은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도 지난해 1월부터 전환가격 1천∼2천원대에 불과한 자기 회사 CB를 10여 차례나 배정받았다. 당시 한국디지탈라인 시가가 최고 3만8천원대까지 육박한 점을 감안하면 정씨의 주식평가이익이 수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도깨비 방망이’ 구실하는 CB나 BW 
   
 
 
  어떻게 이런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길 수 있을까? CB와 BW는 채권과 주식의 성격을 혼합시킨 금융상품이다. 발행자가 미리 약속한 대로 이자가 붙는 동시에 필요할 경우에는 주식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발행한 회사로서는 회사의 지분구조나 재무구조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잠재주식이다. 그런데 일반 주식과는 달리 발행절차가 까다롭지 않고 발행조건에 대한 규제도 허술하다. 투자자를 공개 모집할 때는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장외에서 50명 미만의 특정인들에게만 CB나 BW를 배정하는 사모방식을 채택하면 발행조건이나 기간 등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특히 최근까지 코스닥 등록기업은 정부의 벤처육성정책에 따라 CB와 BW의 사모발행을 통해 ‘검은 돈놀이’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코스닥기업의 발행절차에도 상장기업과 똑같은 수준의 제한이 내려진 것은 지난 8월부터이다. 증권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7월 말까지 모두 26개 코스닥기업이 69건의 사모CB 및 BW를 발행했다. 리타워테크놀로지, 바른손, 옌트, 서울시스템, 텔슨전자 등 주가가 이상 급등락해 주목을 받은 기업들이다. 발행 이유는 대부분 시설투자 재원마련이나 재무구조 개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주주와 특수관계인들이 사적이익을 챙기기 위한 경우가 더 많다. 
  수법도 유일반도체나 한국디지탈라인과 비슷하다. 한때 ‘인수후 개발’(A&D) 재료보유주의 대표종목으로 꼽힌 바른손은 지난 6월 최대주주인 미래랩에 1주당 신주인수권 행사가격을 고작 500원으로 한 BW 7억4천만원어치를 배정했다. 이 행사가격은 바른손의 11월3일 현재 주가 6170원보다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미래랩은 7억원 이상의 평가이익을 얻게 되는 동시에 이 회사 전체 지분의 9%를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서울시스템은 지난해 7월 50년 만기의 BW 80억원짜리를 발행했다. 80억원짜리이지만 50년을 현가할인하는 바람에 실제로 회사에 들어온 자금은 1억원에 불과하다. 이 BW는 일단 한 벤처투자회사로 넘어가 석달 뒤인 지난해 10월 당시 서울시스템 대표이사였던 박향재씨와 그뒤 대표이사에 취임한 장천민씨에게 반반씩 배정됐다. 발행 당시 신주인수권 행사가격은 2만원으로, 당시 주가 3만6450원의 55%에 불과했다. 이처럼 사모방식으로 발행을 하면 발행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또 누가 인수했는지 알 수 없다. 인수자 가운데는 증권이나 투신 등 기관투자자들도 있지만 중간다리 구실만 할 뿐 나중에는 대부분 대주주나 특수관계인에게 흘러들어간다.  
   
  검은 돈놀이… 증시 수급상황 악화시켜 
   
  전환가격 및 행사가격에 하한선을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채권을 가진 사람이 언제든지 주식으로 바꿀 때 유리한 가격을 매길 수 있다. 주가가 전환가격이나 행사가격 밑으로 떨어지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령 1주당 2만원으로 전환가격을 매긴 CB를 들고 있는데 주가가 1만원으로 떨어지면, 채권보유자가 전환가격을 5천원으로 조정해 2주를 받아 두배의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거저 먹는 장사이다.  
  이런 식의 CB나 BW은 해외에서도 많이 발행된다. 코스닥기업들만 올 들어 해외에서 모두 50여건에 7천여억원의 CB와 BW를 발행했다. 발행사들은 외국인투자자들이 ‘하한선(No Floor)이 없고 만기조정 등이 가능한 조건’을 요구한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하지만 장소만 해외로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국내 대주주의 자금이 해외로 나간 뒤 재유입되는 사례도 부지기수라고 증시관계자들은 전한다. 해외에서 발행하면 국내 감독당국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고 잘하면 외자유치라는 화려한 포장까지 곁들인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무분별하게 발행한 CB와 BW는 곧바로 국내 증시에 물량압박을 초래해 건전한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안긴다. SK증권은 최근 거래소보다 코스닥시장의 상대적인 침체가 더 심해진 요인은 11∼12월중에 돌아오는 CB와 BW의 대규모 주식전환 가능성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꼽았다. 지난해 코스닥시장 활황을 계기로 무차별적으로 발행됐던 CB와 BW가 11월에 6천억원대, 12월에는 1조원가량 주식으로 바뀔 것이라고 SK증권은 내다봤다.  
  CB와 BW를 이용한 불법·편법행위의 부작용이 단지 증시 수급상황 악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국내외 투자자들의 불신을 심화시켜 증시 기반자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특정인들에게만 유리한 시장이라면 발길을 돌리는 투자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지경까지 온 데에는 시장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정부와 금융감독당국의 책임이 크다.        
  금융감독원은 자본시장에서 부당한 거래유형이 발생하면 항상 뒷북치기로 대응해왔다. 금감원은 코스닥시장이 뜨기 시작한 지난해 6월부터 CB나 BW를 이용한 부당행위가 극성을 부렸는데도 1년이 지난 뒤에라야 제한규정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6월에 발생한 유일반도체의 불법 BW발행에 대해서도 그해 8월부터 조사를 했으나, 법적인 제재근거가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올해 1월에 겨우 경고조처하는 선에서 끝냈다. 금감원의 유일반도체에 대한 경고사유는 사업보고서의 주석을 불성실하게 기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회계처리 서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그야말로 ‘경범죄’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최근까지 코스닥시장의 보호와 육성에만 치중하다보니까 시장규율에 대한 법적 정비가 미흡한 게 사실”이라며 “단지 금융감독 차원에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일반도체의 장성환 사장이 구속된 이유도 ‘상법상 특별배임 혐의’이며, 이는 금감원이 건드릴 수 없는 사안이다.   
   
  삼성의 배임행위에도 공정하게 법적용해야 
   
  주식시장에서 대주주와 특수관계인들의 불법·부당행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코스닥기업들은 지금까지 재벌에 견주면 ‘새발의 피’이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코스닥기업들이 ‘왜 우리만 문제삼느냐”고 항변을 하면 사법당국으로서는 할말이 없다. 특히 특수관계인에 대한 BW의 헐값 배정과 관련해서는, 유일반도체나 삼성그룹이 똑같은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검찰과 법원이 유일반도체건만 형사처벌을 해 형평성 시비가 일고 있다.  
  삼성SDS는 지난해 2월 BW 230억원어치를 발행하면서 당시 장외에서 15만원 안팎에 거래되던 SDS주식을 이재용씨 등 이건희 회장의 네 자녀에게 1주당 7517원에 넘긴 일로, 참여연대와 전국 법학교수와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재벌의 불법세습 척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위원장 함세웅 신부)로부터 여러 가지 소송과 고발을 당했다. 공동대책위 집행위원장인 곽노현 교수(방송대 법학)는 “검찰과 법원의 같은 사안을 놓고 이중잣대를 들이대 ‘피라미’만 잡고 ‘대어’는 놓치고 있다”며 “유일반도체에 대한 경징계와 관련해 검찰이 금감원을 제대로 수사하려면 삼성 대주주와 경영진들의 배임행위에 대해 법적용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하지 않고 있는 스스로의 직무유기부터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사진/국내외에서 무분별하게 발행된 CB와BW는 증시에 물량압박을 초래한다. 결국 건전한 증권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안기는 셈이다)

(사진/'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긴 유일반도체 장성한 사장이 구속수감되고 있다)

(사진/재벌은 변종채권으로 사기를 쳐도 처벌받지 않는다? 삼성의 불법세습을 반대하는 법학교수들이 '스톱 삼성 캠페인'을 논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