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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은행 좀 그만 팔아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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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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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차익 노리는 외국자본에 넘어간 국내 은행들…토종 은행 지키려는 ‘이헌재 펀드’ 성공할까

“은행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다. 은행은 순수하게 우리 국민이 소유해야 한다.” 1832년 미합중국은행의 외국인 소유지분이 30%에 달하자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국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허가를 취소하면서 남긴 말이다. 은행은 경제에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할 때 금융시장 안정의 돛 역할을 한다. 그만큼 경제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외환은행 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11월 대주주인 론스타의 투명경영을 촉구하고 있다.(연합)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상당수 국내 은행이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갔다. 외국자본의 주요 국내 은행 지분참여를 보면 뉴브리지(제일은행 48.5%), 론스타(외환은행 51%), 알리안츠(하나은행 8.16%), 칼라일-JP모건 컨소시엄(한미은행 36.6%·스탠더드차터드의 한미은행 지분은 9.40%), 뱅크오브뉴욕(국민은행 9.4%) 등이다. 이 가운데 제일·외환·한미은행은 외국인이 대주주로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금융지주회사 인수를 목표로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당장 외자유치에 목매달다보니 이러한 외국자본의 금융산업 장악을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외국자본에 맞서 국내 대항자본을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 점령에 대한 ‘우려 표명’을 넘어 행동으로 나서는 흐름까지 등장했다. 최근 갑자기 부상한 ‘이헌재 펀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헌재 펀드는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설립을 추진 중인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로, 펀드 규모는 2조∼3조원 정도로 잡고 있다. 내년에 정부 지분 매각을 통해 민영화되는 우리금융지주회사를 직접 인수한다는 게 당면 목표다. 사모펀드는 비공개로 수십명의 투자자를 대상으로 자금을 모집한 뒤 특정 회사의 주식을 100%까지 매입할 수 있다. 펀드 조성 실무책임자인 김영재 전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현 솔로몬신용정보 회장)은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 인수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서 (펀드 조성이) 뒤늦은 감이 있다”며 “하지만 우리가 번듯하니 성공하면 새로운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헌재 전 장관은 건전한 외국자본이 들어와 선진 경영기법을 전수한다면 좋지만 실제로 상당수 은행이 외국자본에 넘어간 이후 소비자금융에 치중하고 단기차익 위주의 경영을 하고 있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자본이득만 챙기는 외국계 펀드의 은행 장악을 방치할 경우 기업금융 기피가 가속화하면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진/ 이헌재 펀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은행 인수를 위한 사모펀드 설립에 나선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한겨레21)
김 전 대변인은 이어 “자본의 국적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국자본이 투자수익을 따먹는 것을 넘어 경영을 주도하면서 국민경제와 금융시장 안정성을 해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헌재 펀드가 설립되고 우리은행을 인수할 경우 소유지배구조는 여러 투자자들이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로 짠다는 구상이다.

이헌재 펀드에 투자할 국내자본은 연·기금, 금융기관, 기업 중심으로 구성될 공산이 크다. 특히 이 전 장관 홀로 펀드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 점령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일정하게 모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기업 및 기관투자가 상당수가 이미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김 전 대변인은 “우리은행 인수라는 타깃 프로젝트를 통해 10여명 안팎의 대규모 투자자들을 모아 (외국자본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연 · 기금 참여 등에 의문도

과연 이헌재 펀드는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 장악을 견제할 수 있을까? 물론 이헌재 펀드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쪽도 있다. 현실적으로 2조∼3조원이란 거대자금을 모으려면 연·기금이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우량 주식보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높은 사모펀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연기금이 나올지 의문이다. 김 전 대변인은 “연기금쪽과 공식적으로 접촉한 것은 아니지만 이헌재가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연기금이 판단하면 우리 펀드에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금융지주회사라는 한 곳에 올인 투자하는 게 성사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분산투자가 아니라 전액을 우리금융그룹 인수를 위해 사용할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금융연구원 이병윤 연구위원은 “시중에 떠도는 부동자금이 많은데 다만 조직화가 안 돼 있을 뿐”이라며 “이헌재 펀드가 돈을 끌어모은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정부가 은행지분을 잠정적으로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에게 이전(parking)한 뒤 전략적 투자자에게 매각하거나, 특별펀드법을 제정해 국민주 형태로 개인 및 연기금 등이 들어오게 해서 이른바 ‘금융전업자본’을 육성하고 거기에 은행을 매각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펀드 역시 사모펀드라는 점에서 “외국계 투기성 벌처펀드와 국적만 다를 뿐 단기 고수익을 추구하는 점은 같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헌재 펀드는 외국계 사모펀드와는 성격이 다르다. 국내 은행에 진출한 외국계 사설펀드는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보다는 오직 단기 수익에 열 올리며 잇속만 챙기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로 제일은행의 대주주인 뉴브리지캐피털은 제일은행 인수 뒤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돼 은행 경영이 정상화되자 재매각을 통한 차익실현 작업에 나섰다.

사진/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이 지난 8월 론스타와 매각 본계약을 체결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기자)
외환은행을 인수한 미국계 대형 사모펀드 론스타의 벌처펀드 행태도 LG카드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김영재 전 대변인은 “LG카드 정도면 금융시장에 주는 쇼크가 엄청나다. 당연히 금융시장에서 장사하는 참여자들이 국적 불문하고 그라운드 보수작업에 나서야 하는 게 장사하는 사람들의 기본 태도”라며 “그러나 제일은행, 외환은행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가만히 놔두면 다른 데서 고칠 것이고 뒷짐지고 있다가 단물만 빨아먹겠다는 심산”이라고 말했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공동으로 나서야 할 경우 부담은 모두 국내 은행이 지고 외국자본이 인수한 은행은 나몰라라 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돈 놓고 돈 먹는 부실채권 정리사업과 부동산투자로 막대한 차익을 챙긴 론스타 같은 외국자본의 성격상 예고된 일이었다.

특히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LG카드 사태가 터진 직후 각각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LG카드 채권을 급히 회수해 발을 뺀 뒤 채권단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두 은행은 “다른 은행에 비해 채권액이 적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외국자본의 논리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뉴브리지캐피털의 제일은행 인수 이후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 등 제일은행과 거래해온 여러 기업들은 주거래은행을 다른 은행으로 바꿔야 했다. SK네트웍스쪽은 “뉴브리지가 들어오면서 제일은행이 기업금융을 대폭 줄여 거래가 확 줄었다”며 “함께 성장해온 은행이라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지난해 말 거의 거래가 없다시피 한 상태까지 갔고, 불가피하게 주거래은행을 하나은행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LG 카드 사태, 발 빼는 외국자본

시중은행장 사이에도 이대로 가다가는 토종 금융기관의 설자리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지난 12월16일 열린 금융협의회에서 시중은행장들은 “정부가 보유 은행지분 매각을 통해 민영화할 때 연·기금 등 국내자본의 참여를 사실상 제한한 채 주로 외국자본에 넘겨온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자본에 맞설 국내자본 육성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전광우 우리금융그룹 부회장은 “외국계 자본이 금융을 장악하면서 토종은행이 없어지고 있다. 기업금융에 주력해온 우리 은행이 가진 이점을 살리려면 국내에서 투자 여력이 있는 여러 자본에도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이병윤 연구위원은 “금융기관 소유가 한쪽(외국자본)으로 편중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국내계와 외국계의 상호 견제 및 균형을 통해 경쟁구도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계 은행이 수익성만 좇아 대기업 및 부유층만을 주고객으로 할 경우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과 서민에 대한 자금 공급이 크게 위축될 수 있고, 저소득층이 사채시장 등 지하금융으로 밀려나 빚이 누적되고 부실이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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