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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빚더미 농가, 출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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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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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농정’에서 정부 자금 투입은 농가부채만 불려… 근본적인 해결방안 과연 없는 걸까

지금 ‘농업개방’과 ‘농가부채’가 우리 농촌을 짓누르고 있지만 ‘개방농정’ 논쟁은 이미 1970년대 말부터 등장했다. 식량(쌀) 자급을 달성한 1977년 정부 안에서 비교우위를 명분으로 농산물 시장을 열자는 주장이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

“전업농 육성은 반농민적 대책”

쌀은 국내 생산비가 비싸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므로 시장을 열고 대신 공산품 수출을 늘리자는 논리였다.


사진/ 정부가 향후 10년간 농촌에 119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지만, 농민들의 한숨과 분노는 여전하다.(김진수 기자)
농가부채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농촌의 이슈로 등장했다. 물가안정 목표 아래 쌀 수매값이 계속 동결된 반면 농가 소비와 교육비 지출이 늘면서 농가부채도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지난 1983년 소값 파동을 겪으면서 농가 빚은 더 쌓였고, 급기야 1985년 군 단위에서 미국의 농산물 개방 확대요구 반대 및 농가부채 해결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산발적 시위가 전개됐다. 그 뒤 정부는 1987년부터 농업정책을 ‘자급자족’에서 ‘상업화’로 전환해 농업정책자금을 저리 지원하는 등 농촌 투자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자연히 이 과정에서 농가 빚은 더 늘어났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앞둔 지난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투입된 농촌 구조개선자금은 무려 62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농업경쟁력 강화는커녕 농가마다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다. 성난 농민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당장 돈부터 쏟아붓다 보니 돈은 돈대로 퍼붓고 농촌 들녘에 빚과 한숨만 남긴 것이다. ‘기업농’이니 ‘규모화’니 부르짖으면서 농민들을 무턱대고 시설투자에 나서도록 부추긴 결과 헛돈만 쓰고 만 꼴이 되었다.

정부가 대주는 농업보조금에다 융자까지 받아 농기계를 구입하고 축사를 지었지만, 과잉공급으로 농축산물 값이 폭락하고 빚만 떠안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졌다. 수차례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최근 10여년 동안 도시근로자 가구에 대한 농가소득 수준은 90%대에서 70%대로 떨어졌다. 농가당 부채는 1992년 788만원에서 지난해 1989만원으로 갑절 이상 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성재 연구위원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뒤 도시에서 사는 삶이 한 세대 안에 이뤄질 정도로 우리 농촌이 빠르게 압축 변화를 겪어왔다”며 “농민들한테 ‘너희들은 개방을 몰랐냐 왜 빨리 구조조정하지 않고 정부에 대책만 요구하느냐’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지난 11월11일 내놓은 119조원 규모의 ‘향후 10년 농업 투·융자’ 계획은 △경쟁력을 갖춘 대규모 전업농 육성 △직불제를 통한 농가소득 보전 확대 △농촌관광산업 활성화 등 농외소득원 다양화 △농산물 수출산업 육성에 투자를 주력하기로 했다. 농림부는 “이 계획이 실현되면 10년 뒤 농가 1인당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의 105%로 늘어나는 등 농민과 농촌의 모습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정부가 ‘우는 애 사탕 주듯’ 내놓은 119조 투·융자계획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 통과를 위해 급조된 대책일 뿐”이라며 “소수 전업농만 선택적으로 지원하고 대다수 중소 영세농은 농촌을 떠나게 만들겠다는 반농민적 대책”이라고 비판했다. 개방농정이란 기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정부 대책도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진/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1월11일 농어업인의 날 행사에서 농민 대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한국 농업이 처한 위기의 한복판에 농업개방이 있지만, 농촌에 당장 급한 불은 27조7500억원에 이르는 농가부채다. 농가소득에서 농가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1991년 39.6%에서 2001년 85.2%로 대폭 높아졌다. 부채가 5천만원 이상인 농가는 1997년 7.5%에서 2001년 13.2%로 증가했다. 농가부채비율(부채/자산)이 평균 40%를 넘는 위험한 농가는 2001년 말 10.8%에 이르고, 30∼39살까지의 농가 빚은 평균 4700만원으로 젊은 농가 및 대규모 시설농가일수록 더 많은 빚을 안고 있다. 농업개방 이후 농가소득이 정체되면서 70대 고령 농가의 부채 역시 규모는 작지만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원리금 상환 연기, 이자율 인하, 저금리 자금 대체 등 농촌부채 대책은 해마다 되풀이됐다. 처음에는 부채 대책이 단 한번 있는 긴급대책으로 나왔지만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선거철마다 나왔고,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다시피했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연구위원은 “정부가 자꾸 형평성 논리로 농민들한테 똑같이 나눠줬기 때문에 푼돈에 불과하게 됐다”며 “돈은 많이 들었지만 지원 효과는 약해 부채가 갈수록 더 늘기만 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부채를 갚지 않는 농가만 혜택을 본다”는 비판까지 제기되는가 하면 연체 농가는 지원이 절박한데도 정작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농촌경제연구원 박성재 연구위원은 “이제 부채 구조조정만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며 “자산매각과 원금축소 등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강력한 자구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또 “부채문제에 직면한 농가가 발생하면 신속히 개입해 부실규모 확대와 부채문제 전염을 방지해야 한다”며 “농가 경영회생 프로그램은 경영규모와 부채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이고 농업 생산으로 승부를 거는 전업 농가에 맞추고, 은퇴가 가까운 고령 농가 및 영세농은 복지 차원의 대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부채-소자산형’으로 전환

그러나 부채규모가 너무 크면 평균 농업수익률로는 부채를 정상적으로 갚을 길이 없다. 따라서 재무구조를 ‘소부채-소자산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농업경쟁력 강화는커녕 빚더미와 씨름하기도 벅찬 만큼 개방이 더 진전되기 전에 농가의 몸집부터 줄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농가자산관리기금위원회(가칭)을 설치하자는 제안으로 이어진다. 이 위원회는 재무구조 개선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지원자금 운용을 총괄하는 기구로, 농가도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농가 재무구조 개선은 정책적 지원만으로는 어렵고 농가의 자구노력이 결합돼야 한다.

사진/ 지역의 문화자원을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평창군의 효석문화제.(한겨레 강창광 기자)
그러려면 농가와 기금위원회 사이에 자구노력 및 경영개선 이행을 위한 이행협약(MOU)을 맺어야 한다. 농촌경제연구원 박성재 연구위원은 “나중에 농가가 경영개선 계획을 이행하지 않으면 지원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농가가 스스로 자산을 매각해 부채규모를 축소하면 이에 상응해 더 많은 지원을 해줌으로써 부채규모 축소를 유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지의 유동화가 뒷받침돼야

그런데 이런 재무구조 개선안은 농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농지의 유동화가 뒷받침돼야 효과를 낼 수 있다. 현재 토지는 유동성이 아주 낮기 때문에 농지를 통해 부채규모를 줄이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농가들도 보유 농지를 처분해 부채를 줄일 생각은 쉽사리 못하고 있다. 별다른 농외소득 수단이 없는 탓에 논마저 처분해버리면 소득 기회가 아예 없어지고, 한편에서 농지값 인상의 기대심리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농지를 팔고 싶어도 마땅히 사줄 데가 없고, 앞다퉈 팔려고 내놓으면 논값이 폭락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농지 유동화를 위한 ‘농가자산관리기금’(가칭)을 신설해 중간에 개입시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농가자산관리기금이 농지를 사들이고, 판 농가가 원한다면 해당 농지를 다시 그 농가에 임대해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농지매각으로 소유권은 잃었지만 대신 빚을 갚고 종전처럼 같은 경영규모로 소득을 창출할 수 있게 된다. 박 연구위원은 “농지 유동화가 촉진되면 농가가 종전에는 농가부채의 이자를 지불했으나, 이제 농가 이자보다 더 싼 지대(임차료)를 내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농가자산관리기금은 농지를 판 농가에 매입권리(옵션)를 부여할 수도 있다. 적정 표준가격에 농지를 매입한 뒤 일정 기간 이내에 농가가 해당 농지를 되사고 싶어하면 금융비용만 받고 처음 매각가격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사진/ 함평군 나비축제.(연합)
경영회생이 아예 어려운 농가에 대해서는 부채 원금탕감도 필요하다. 이들에게 상환유예나 이자율 인하 혜택은 부채를 ‘연기’시킬 뿐 빚만 더 누적시켜 고통을 키우게 된다. 원활한 탈농방법이 없기 때문에 계속 농업에 종사하면서 끊임없이 부채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농촌경제연구원 황의식 연구위원은 “농업용 자산을 포기하고 탈농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부채 원금 일부를 탕감해주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나아가 자구노력을 착실히 이행하는 농가에도 조속한 회생을 돕기 위해 원금감면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설계주의 농정’은 이제 그만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자유무역협정(FTA), 내년 쌀 재협상 등으로 국내 농업 기반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20여년 전부터 우리 농촌을 뒤흔들어온 개방 파고와 이에 대비한 대규모 자금투입 정책은 막대한 농가부채를 남긴 채 농민들의 분노만 키웠다. 물량 위주로 많은 자본만 쏟아붓는 생산성 위주의 농정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연구위원은 “엄청난 농가부채는, 농림부가 농업과 농민에 대한 전체 그림을 책상에서 구상·기획한 뒤 이를 성공시키려고 대규모 돈을 투입해온 ‘설계주의 농정’의 파탄을 의미한다”며 “이제 정부는 농정 아이템들을 제시하는 도서관 역할만 하고 농민과 농민단체들이 지역 사정에 맞게 그 중에서 고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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