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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현대가, 이번엔 숙부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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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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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몽헌 의장 부인 현정은씨와 정상영 KCC 명예회장 사이의 경영권 분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부인 현정은(48)씨와 정상영(68) KCC 명예회장 사이의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이 일단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지분만을 보면 이미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손 안에 넣은 정 명예회장은 지난 11월9일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의 현 체제를 존중하고, 현 회장이 향후에도 현대그룹의 정상화와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근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대규모로 사들이며 금방이라도 경영권을 뒤엎을 듯 하던 것에 비하면, 싱거운 결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분쟁의 불씨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선임된 현정은씨가, 10월27일 서울 혜화동 현대엘리베이터 서울사무소에 첫 출근해 업무보고를 받은 뒤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연합)

‘사돈댁’에 경영권 넘길 수 없다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은 정몽헌 의장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이미 예고돼 있었다. 고 정 의장은 4%대의 현대상선 지분 외에는 아무런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아 상속자들은 경영권을 넘겨받기가 쉽지 않았다. 현대그룹의 지주회사라 할 수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몽헌씨의 장모 김문희(75)씨가 18%를 갖고 있었지만, 이 또한 정상영 명예회장쪽에 담보로 잡혀 있었다. 경영권이 어디로 갈 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외국인들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사들인 것은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의 시작이었다.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전혀 갖고 있지 않던 외국인들은 지난 8월 초순 주식을 집중 매입해 지분율을 11.48%로 끌어올렸다.


외국인들의 주식 매집에 대응한 것은 범현대가였다. 김문희씨쪽이 경영권을 방어할 자금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범현대가의 계열사 9곳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16.2%나 사들였다. 이를 주도한 것은 정상영 명예회장이었다. 정 명예회장의 KCC는 현대상선 주식 2.98%도 별도로 사들였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자신이 직접 확보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정주영 창업주가 일군 현대그룹에 전문경영인을 회장으로 앉히고, 자신은 섭정을 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회장’ 후보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한때 내정자의 이름까지 오르내렸다.

정상영 명예회장쪽의 이런 움직임은 정씨 일가가 아닌, ‘사돈댁’에 경영권을 넘길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정은씨쪽 관계자는 “현 여사가 정씨 가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느 쪽 족보에 올라 있나?”라는 말했다. 범현대가가 ‘정씨 가문’이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며 현씨의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취임을 반대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 명예회장쪽 관계자도 “현 여사는 경영을 잘 모른다. 현대그룹은 매우 복잡한 회사여서 상당한 경영 수완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기우와 염려를 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쪽은 애초 현 여사에게 회장으로 나서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현 여사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진/ 고 정몽헌 의장 영결식에 참석한 가족들. 현대가는 현정은씨의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취임을 반대해온 것으로 보인다.(공동취재단)
정 명예회장쪽은 현씨 쪽에 계열사 하나를 분리해 가져가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씨쪽이 이를 거절해 갈등이 고조된 것으로 전해졌다. 갈등은 지난달 6일 평양에서 열린 ‘정주영체육관’ 개관행사에 정 명예회장이 참석을 취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정 명예회장 쪽은 지분 매입에 나섰다. 현씨 쪽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쪽이) 주식을 산 날짜를 한번 확인해봐라. 10월 7~9일이다. 현대그룹 경영진이 모두 평양으로 정주영체육관 개관행사에 가 있을 때다”라고 서운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섭정체제, 불씨는 남아

갈등이 깊어가는 가운데 현씨쪽은 회장 취임을 강행했다. 현대그룹은 지난 10월21일 임시 이사회를 소집해 현정은씨를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으로 선임했다. 당시 현 회장은 “정 명예회장과 계속 상의해 그룹을 이끌겠다”며 불화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현씨의 회장 취임은 그가 정몽헌 의장의 100일 탈상 이후에나 본격적인 대외활동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이미 갖고 있는 김문희씨쪽의 지분을 활용해, 정 명예회장 쪽에 대응해 선수를 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현대가 관계자들은 현 회장의 취임이 정씨 일가와 충분한 협의 없이 이뤄진 것임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게 갈등은 커져갔다. 범현대가가 현대그룹의 주식을 본격적으로 매집하고 나선 것도 이때부터다.

범현대가는 11월4일 BNP파리바투신운용을 활용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2.82%를 사들였다. 이어 7일에는 KCC가 7.5%를 추가 매집했다. 이로써 정 명예회장쪽 지분은 40%대로 늘어났다. 현씨도 정몽헌 의장에게 상속받은 현대상선 지분 4.9% 중 2%를 처분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담보빚을 갚기로 하는 등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지분만을 보면 현씨쪽이 정 명예회장쪽에 대항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정 명예회장쪽이 마음만 먹으면 현씨를 물러나게 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쪽은 거기에서 일단 멈췄다. 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이는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가문은 지난 2000년 몽구·몽헌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바 있다. 그런 가운데 이번 숙부(정상영)와 조카며느리(현정은)간 분쟁이 표면화될 경우 입을 타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사모펀드를 활용해 매입한 지분의 경우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쪽이 현 체제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 명예회장쪽이 9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정명예회장은 일단 ‘섭정’ 체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 명예회장쪽은 ‘현대그룹의 정상적인 업무집행에 일일이 간여할 의도는 없다’면서도, 대주주로서 권한 행사 의지를 분명히 표명했다. 정 명예회장쪽이 일단 ‘소유는 확보했다’고 강조하고, ‘(현씨쪽이) 올바르고 투명하게 경영한다면’이라고 단서를 단 부분도 현정은 회장 체제가 여전히 불안정함을 보여준다.

사진/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를 떠나는 고 정몽헌 의장. 그는 4%대의 현대상선 지분 외에는 아무런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한겨레 이정우 기자)

재벌의 ‘후진적’ 지배구조 보여줘

특히 단기적으로도 현대그룹 경영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적지 않다. 현씨쪽이 몽헌 의장을 받든 임원들에 의지해야 하는 반면, 정 명예회장쪽은 옛 가신그룹을 척결해야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의 ‘현 체제 유지’ 발표 뒤인 11월10일 현대 계열사들의 주가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지분매입 경쟁이 없을 것이라는 시장의 예측이 그간 폭등한 주가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핵심원인이었지만, 여기에는 향후 경영의 불안정에 대한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화증권 이광훈 연구원은 “KCC가 지난 7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추가 취득한 것은 정 명예회장의 이해관계에 의한 기업주의 경영 전횡으로 비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대가의 경영권 분쟁은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가 선진화되려면 앞으로 많은 세월이 걸릴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배주주가 없는 현대 계열사들은 정 의장의 죽음 이후 계열사별로 전문경영인 체제가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재벌 가문은 기업의 정상화와 이를 통한 주주 이익 극대화보다는 경영권이라는 ‘권력’에 더 집착했다. 현씨쪽이 소유한 현대 계열사 지분은 몽헌 의장에게 상속받은 4%대의 현대상선 지분뿐이었다. 현씨쪽이 이 지분의 일부를 팔아 빚을 갚는 방식으로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확보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그룹의 경영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정 명예회장과 범현대가문도 자본이득을 계산해 기업의 지분을 사들인 것이 아니라 그룹의 지배권을 노리고 손실을 각오한 채 주식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계열사를 동원한 것 또한 전형적인 재벌의 모습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해, 기업경영의 합리성을 극대화하자는 주장은 아직 우리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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