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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는 건전지 안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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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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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에코생협의 친환경제품들…기대보다 소비자들의 호응 높아

지난 10월9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운동연합 에코생협의 어두컴컴한 회의실. 최재숙 상임이사의 손에 초창기의 휴대전화기만한 물체가 들려 있다. 그가 물체 한쪽에 달린 손잡이를 펴 빙글빙글 돌리자 물체 한쪽 끝에서 빛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손잡이를 돌릴수록 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금세 어두운 회의실 벽면을 환하게 비춘다. 손전등이다. 그런데, 흔히 보던 손전등과는 한 가지가 확실히 다르다. 바로 건전지가 필요 없는 손전등이라는 것이다.

벤처회사와의 우연한 만남

건전지가 필요 없는 이유는 사용자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기를 만들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손전등에는 소형 발전기가 내장돼 있다. 사용자가 태엽을 감듯 손잡이를 돌려 생산한 전기는 내장된 니켈수소 전지에 저장됐다가 빛으로 바뀐다. 빛의 밝기는 40칸델라. 정격출력이 6V이므로 1.5V짜리 건전지 4개를 넣은 손전등을 생각하면 된다. 1분을 충전하면 5분가량 쓸 수 있고, 가득 충전하면 4~6시간을 쓸 수 있다. 필라멘트 전구가 아닌 발광다이오드(LED) 전구를 사용해, 전구 수명은 5만 시간이다. 반영구적인 셈이다.


사진/ 환경운동연합의 에코생협 매장. 친환경 기업들이 적극적인 구매의사를 보이고 있다.(류우종 기자)
부품이 거의 없이 건전지와 전구만 필요한 일반 손전등에 비해서는 크기(길이 14.5cm)가 크고 무게(230g)가 조금 많이 나간다는 점이 흠이다. 그러나 옆에 놓여 있는 외국 제품과 비교하면 크기가 절반도 안 되고, 한 손으로 잡기에 알맞아 큰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물론 소비자가격은 3만원(조합원 가격 및 단체주문 가격 2만5천원)으로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건전지 사용 제품과 비교할 때 제법 비싼 편이다. 그러나 최 이사는 반딧불이 모양을 한 이 손전등에 마냥 흡족한 표정이다. 에코생협이 직접 개발해 내놓은 제품이라는 이유만은 아닌 듯싶었다.

최 이사가 이번에는 큰 성냥갑보다 조금 큰 정사각형 모양의 물체를 들고 왔다. 물체 뒷편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고 스위치를 켜자, 물체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라디오였다. 방송청취 주파수대가 일반 라디오와 똑같은 이 자가발전 라디오(크기 110㎜X110㎜X80㎜, 무게 300g)는 1분만 충전해도 40~50분을 들을 수 있고, 완전히 충전하면 8~10시간 사용이 가능하다. 가격은 3만5천원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사람들이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친환경제품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재배한 곡식과 채소, 방부제나 표백제를 전혀 쓰지 않은 가공식품, 천연소재와 천연염색제를 사용한 옷들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유기농 또는 무농약으로 재배한 먹을거리는 생활협동조합이 늘어나면서 생산과 소비가 널리 퍼져가고 있다. 그러나 공산품으로 가면 친환경제품의 설 자리가 아직은 넓지 않다. 가격과 품질면에서 일반 제품보다 소비자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천연성분을 이용한 화장품, 계면활성제를 쓰지 않은 세제와 치약, 세제를 쓰지 않는 세탁기 등이 나와 있지만, 아직 그리 널리 쓰이는 편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환경운동연합이 건전지를 쓰지 않는 손전등과 라디오를 직접 개발해 상품화하고 나선 것은 어쩌면 모험일지도 모른다.

△ 환경운동연합이 직접 개발해 상품화한 친환경 제품들. 소형 발전기가 내장돼, 건전지가 필요없는 손전등(위)과 소형 라디오(아래).
환경운동연합은 3년 전부터 영국, 독일, 일본 등의 환경제품박람회와 친환경제품 전문매장을 돌아다니며 친환경 공산품 자료를 수집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첫 제품으로 건전지 없이 자가발전으로 작동하는 제품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건전지야말로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히 쓰이면서 환경오염을 많이 일으킨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사용되는 건전지는 약 300만개, 연간 10억개에 이른다. 건전지에 사용되는 중금속은 지하수 및 토양, 하천의 오염원이 된다. 재충전해서 쓸 수 있는 건전지가 있지만, 반복 사용에는 한계가 있어서 일회용 건전지의 문제점을 완전히 떨쳐내버리지는 못한다.

환경운동연합이 자가발전 제품을 직접 생산하기까지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우선 개발비용이 문제였다. 이번에 손전등과 라디오를 개발하는 데 들인 비용은 인건비를 제외하고도 7억원가량이다. 기술도 문제였다. 다행히 한 벤처회사와의 우연한 만남이 ‘생각’을 제품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벤처회사는 휴대전화용 자가발전 충전기를 개발했으나, 휴대전화가 컬러 제품으로 바뀌면서 전력소모를 감당하기 어려워 제품화를 포기해야 했는데, 그 기술을 손전등이나 라디오처럼 전력 소모가 적은 제품에 그대로 응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태양광 발전기 이용한 제품도 계획

환경운동연합의 모험은 일단 성공적인 것 같다. 손전등의 경우 기대한 것보다 소비자들의 호응이 매우 좋기 때문이다. 우선 ‘친환경’을 지향하는 기업들이 판촉용 등으로 적극적인 구매 의사를 보이고 있다. 유한킴벌리가 2천개를 사가기로 계약했고, 삼성전자도 자체 대리점에서 물건을 팔 수 있도록 납품해달라고 요청해 현재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외국 제품에 비해 디자인이 세련되고 싸다며, 수출용으로 납품 상담을 요청하는 무역업체들도 나오고 있다. 다만, 일반 공산품에 비해 원가와 소비자가격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데, 무역상들이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협상에 어려운 점이라고 최 이사는 귀띔해주었다.

“한 군장교는 매장에 와서 제품을 써보고는, 병영에서 쓰면 좋겠다며 30개를 사갔지요. 농촌 지역에서도 주문이 많이 들어와요.” 최 이사는 “라디오나 손전등 모두 안이 들여다보이는 디자인의 제품도 생각하고 있다”며 “라디오의 경우 소비자가 직접 조립할 수 있는 제품을 내놓는 것은 어떤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내놓은 손전등과 라디오는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에코생협은 다음 제품으로 태양광 손목시계를 선택해 이미 제조에 들어갔다. 로만손시계가 생산해 11월부터 판매를 시작할 이 손목시계는 1분만 햇볕을 쬐어도 6개월간 사용이 가능한 제품이다. 오차는 6개월에 1분가량이라고 한다. 가격은 어른용이 10만원, 어린이용이 8만원가량으로 예상하고 있다. 손목시계에 이어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해 휴대전화 건전지 충전기를 제품화하는 방안도 현재 신중히 검토 중이다. 최 이사는 “환경단체가 이런 제품을 만드는 것이 소비자의 생활양식을 바꿀 뿐 아니라, 기업들이 친환경적 사고로 제품을 생산하게 하는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에코생협 02-733-7117).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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