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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재용의 세습을 배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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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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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 다가오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인수… 검찰의 미온적 수사로 면죄부 줄 가능성 높아

기업인들의 주식보유 현황을 조사하는 <에퀴터블>이 지난 9월1일 재계인사들의 재산 순위를 발표했다. 조사결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삼성전자 상무보)씨의 재산은 9230억원으로 나타났다. 이건희 회장(1조4280억원)과 롯데 신동빈 부회장(9360억원)에 이어 재계에서 3번째로 많다. 이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것은 부러움이 아니라 절망감이었다. 올해 34살인 그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된 과정은 특별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부릴 수 있는 ‘연금술’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탁월한 연금술

지난 1995년 이 회장한테서 60억8천만원을 증여받은 그는 16억원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돈으로 재산을 불리는 연금술을 시작했다. 삼성엔지니어링과 에스원의 주식을 상장 전에 사들였다가 상장 뒤 팔아 527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린 것이 그 시작이다. 이어 에버랜드(옛 중앙개발)와 제일기획, 삼성전자의 사모 전환사채, 삼성SDS의 신주인수권을 사들여 오늘날 재산이 1조원에 가까운 거부가 됐다.


사진/ 이재용씨의 삼성가 지배권 확보는 정당한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오른쪽)가 지난 8월4일 현대 아산병원 고 정몽헌 회장 빈소를 조문한 뒤 김윤규 사장을 위로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는 인수자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으므로 만약 다른 사람이 인수했다면, 누구나 그처럼 거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가 돌아올 리 없었다. 삼성 총수의 아들이라는 ‘프리미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돈을 번 과정에 대한 불법성 시비가 그동안 끊이지 않았다. 재용씨가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인수하게 된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법은 정의의 수호자로서 제구실을 할 수 있을까?

재용씨가 에버랜드의 전환사채를 인수해 큰돈을 벌게 된 과정은 이렇다. 에버랜드는 지난 1996년 10월 99억5400만원어치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주당 7700원에 채권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조건이었다. 에버랜드의 주식가치는 전환가격보다 훨씬 높아 전환사채를 인수하기만 하면 돈을 버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에버랜드의 주주인 삼성 계열사들은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했다. 그리고 실권된 전환사채는 제3자인 이재용씨가 96억원어치를 인수해, 그해 12월 주식으로 바꿨다.

문제는 전환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는 점에 있었다. 98년 에버랜드의 주주인 계열사의 감사보고서에는 에버랜드의 주식가치가 23만5천원으로 평가돼 있고, 98년 계열사들이 중앙일보로부터 에버랜드 주식을 매입할 때나, 99년 계열사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할 때 신주 발행가격은 모두 10만원이었다. 그런데 왜 계열사 주주들은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했을까 당시 계열사들은 출자총액 제한이나 계열분리 추진으로 더 이상 에버랜드 주식을 취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전환사채를 발행한 것은 재용씨에게 싼값에 전환사채를 넘겨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 이재용씨는 불과 8년 만에 재산을 200배 이상 불렸다. 법학교수들이 지난 2월27일 서울지검 기자실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통한 이씨의 편법상혹 의혹 고발사건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연합)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 등 법학교수 43명은 지난 2000년 6월29일 전환사채 발행 건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건희 회장 등이 전환사채를 턱없이 낮은 가격에 발행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의 태도는 매우 미온적이었다. 고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수사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검찰이 이 사건을 얼마나 꺼리는지 알 수 있다. 검찰이 최근에야 수사를 서두르는 것은 공소시효 문제 때문이다. 배임죄의 경우 회사에 끼친 손해액이 50억원 미만일 경우 공소시효가 7년이고, 50억원이 넘을 경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죄에 해당돼 공소시효가 10년이다. 만약 손해액이 50억원 미만이어서 공소시효가 7년이라면, 시효는 곧 끝난다. 그 전에 수사를 마무리짓지 않으면, 수사조차 하지 않고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난은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고발 3년 만의 수사… 결정적 증거 미확보

그러나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검찰은 기소하지 않는 쪽으로 이미 방향을 정했다”는 말이 무성하다. 검찰은 지난 6월 이후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전 직원을 불러 조사를 벌였다고 밝혔지만, 수사의 진척 정도나 향후 일정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다물고 있다. 물론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사건인 만큼 검찰이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현재 계열사들이 이재용씨에게 전환사채를 넘겨주기 위해 공모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올해 초 검찰이 SK그룹 수사 때처럼 구조조정본부를 압수수색해 핵심자료를 입수하지 않는 한 공모한 물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시민단체쪽은 직접적 물증이 없어도 배임 혐의를 입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강조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는 “에버랜드의 기존 주주들이 주식을 취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환사채를 발행해 실권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재용씨 등에게 전환사채를 넘긴 것은 그룹 차원의 사전기획에 따른 것임을 뜻한다”며 “전환사채 발행 외에 다른 자금조달 수단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 다른 자금조달 수단을 찾기 위한 노력을 충실히 했는지를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진/ 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성의 변칙 상속을 고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김진수 기자)
삼성쪽은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을 중심으로 검찰 수사에 대응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삼성이 법무법인 변호사뿐 아니라, 검사장·고검장 출신 변호사를 여럿 선임해 소환대상자에게 답변 방법을 교육하고, 진술내용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변호사들 잔치”라고 말했다. 삼성의 이런 움직임은 에버랜드가 이 회장 일가에게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지분 19.34%를 갖고 있고, 삼성생명은 삼성전자(7.1%), 삼성물산(4.8%), 삼성중공업(3.9%)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를 장악하면 손쉽게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 재용씨는 전환사채를 활용해 에버랜드 주식 39.1%(현재는 25.1%)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이건희 회장의 세 딸도 각각 8.37%씩 지분을 확보했다. 재계에서 삼성가의 후계 승계 준비가 사실상 마무리됐다고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원칙’이라는 잣대가 통하지 않는 까닭

검찰은 올해 초 SK그룹 분식회계 사건에 대해 이례적일 정도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다. 앞으로도 ‘원칙’대로 수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고발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는 검찰이 경제권력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할 의지를 가졌는지 시험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이 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하고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리더라도 이미 이뤄진 편법상속까지 되물리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선웅 변호사는 “전환사채 발행을 무효화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나버렸다. 따라서 재용씨는 후계자로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검찰의 수사결과는 삼성가의 후계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재용씨가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불법 혹은 편법으로 지배권을 확보했다는 점이 밝혀질 경우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재용씨가 그룹 경영을 책임지는 경영자로 등장할 경우 주주들의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도 크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많은 1세 부호들이 법의 흠을 파고들어 재산을 자식에게 편법상속했다. 그러나 자식들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주주로서 영향력만 행사하곤 했다. 삼성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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