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료회의 결렬 책임 둘러싸고 선진국과 개도국 공방… 개도국의 연합전선이냐 선진국의 비밀 합의냐
이달 초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제5차 각료회의가 결렬된 이후 이의 책임을 둘러싸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공방이 일고 있다. 농산물 수출국인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브라질·인도·중국 등 또 다른 농산물 수출국들이 주축을 이룬 ‘22개 개도국 모임’(G22)이 협상 결렬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프리카와 중남미 개도국들은 “선진국들이 도하에서 약속한 사항(2001년 도하개발어젠다·DDA)을 지키지 않고 이번 회의를 자신들의 문제를 밀어붙이는 데 이용했다”며 결렬 책임을 선진국에 돌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영국 <로이터통신>의 분석기사를 인용해 “이번 협상 결렬로 개도국들이 정치적 승리자로 부상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패배자가 될 위험에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개도국과 가난한 나라들이 미국 등 부자 나라의 시장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개도국들, 대항그룹 급히 결성
선언문 초안까지 나왔다가 막판에 전체 협상이 결렬되고 만 직접적인 원인은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였다. 싱가포르 이슈는 △투자 △경쟁정책 △무역 원활화 △정부조달 투명성 등 4가지 부문에 걸쳐 다자간 무역 규범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WTO 회원국들은 크게 △4가지 부문의 협상을 당장 시작하는 그룹(미국·유럽연합·한국 등) △두 가지만 먼저 시작하자는 그룹 △네 가지 모두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그룹으로 크게 나뉘어 대립했다. 협상 결렬이 공식 선언된 9월14일, 유럽연합은 싱가포르 이슈 가운데 1개 분야만이라도 협상을 개시하자고 주장한 반면, 아프리카 보츠와나 대표단은 단 한개도 협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발언자로 나선 한국 대표단의 황두연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개 분야 이상을 이번에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각료회의 의장인 데르베즈 멕시코 외무장관이 즉각 나서 “더 이상 타협 가능성이 없다”며 합의 실패를 선언하면서 협상은 종료됐다.
그러나 싱가포르 이슈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며, 유럽연합이 선언문 초안까지 제시된 농업분야의 수출보조금 철폐조항을 끝내 거부한 것이 합의 실패의 근본 원인이란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이는 선진국이 협상 실패를 의도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는 추측으로까지 이어진다. 유럽연합은 자국 농민보호를 위해 소 한 마리에 하루 2∼3달러씩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유엔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절반인 30억명이 하루 2달러에도 못 미치는 생계비로 연명하고 있는데, 유럽 국가들이 수출을 위해 소에게 더 많은 보조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G22그룹 외에도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국가그룹(ACP그룹·78개국)은 별도의 거대한 세력을 이뤄 유럽과 미국의 농업보조금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선진국들이 자국에 막대한 농업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개도국에는 자신들이 생산한 과잉상품을 소비시킬 시장을 열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게 이들 그룹의 주장이었다.
사실 개도국과 후진국들은 미국과 유럽연합에 맞서 한달여 만에 대항그룹을 급히 결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전의 WTO 협상과 달리 칸쿤 회담에서는 저개발국들이 사상 처음으로 선진국에서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한 뒤 조직적인 목소리를 냈다고 할 수 있다. 칸쿤회의에 대표단으로 참가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낙균 무역투자정책실장은 “이번 협상은 각본 없는 반전과 배반, 음모가 판치는 한편의 드라마였다”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강력 반발이 사전에 전혀 감지되지 못했고, 특히 개도국들이 예상 밖으로 하나로 뭉쳐 세력화하면서 미국과 유럽 중심의 기존 농산물수출국(케언스그룹)의 힘이 와해됐다”고 말했다.
WTO 협상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것일까 WTO는 회원국간 투표는 하지 않는 대신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합의(컨센서스)를 추구하는 의사결정 방식을 취하고 있다. 농업·비농산물·싱가포르 이슈 등 5개 분야별로 작업그룹이 구성돼 이슈별 타협안 도출을 시도하는데, 협상을 주도하는 쪽은 30여개 주요국이 들어가는 ‘그린 룸’(WTO 사무국 옛 건물의 방 색깔에서 연유)이란 밀실 비공식 회의다. 국가별 발언이 낱낱이 기록되는 공식회의와 별도로 비공식 협상채널을 가동하는 것이다. 주로 선진국 및 선진국의 이해를 대변해줄 만한 국가들로 구성되는 이 그린 룸 회의에서 일정한 합의안이 만들어지면 이를 토대로 힘이 약한 나라의 대표단을 개별적으로 만나 합의를 강제하거나 회유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몇몇 주요국이 따로 모여 타협안을 도출한 뒤 여론몰이 작업을 해가는 셈인데, 합의를 거부하면 원조를 줄이겠다거나 합의해주면 반대급부를 주겠다고 회유하는 방식을 통해 가난한 나라들을 각개 격파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압박 속에 선진국의 요구를 독불장군처럼 거부할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진 것일까 최낙균 실장은 “우르과이라운드 시절에는 미국 등이 힘을 동원해 밀실에서 합의하고 후진국에 수용하라고 밀어붙였지만 이제는 선진국들끼리 속닥속닥해서 합의안을 이끌어내거나 후진국을 찍어누르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이슈부터 심상치 않았다”
역시 칸쿤협상 한국 대표단 멤버로 참가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연구위원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번 협상을 깨기로 사전에 담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번 협상에서 농업 문제보다 싱가포르 이슈를 먼저 꺼내들었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세로 개도국들이 선진국의 농산물 수출보조금 철폐를 거세게 요구하자 미국과 유럽연합이 아예 협상을 결렬시키자는 쪽으로 비밀리에 합의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이 일부러 협상을 깼을 만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WTO에는 지난 1999년 시애틀 제3차 각료회담 합의 실패 이후 위기의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차 각료회의부터는 선진국과 개도국간의 정면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결국 도하 협상에서 개도국의 개발 문제도 주요 안건으로 다룬다는 원칙에 합의했는데, 이는 WTO 판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 선진국들이 내놓은 갈등 봉합 대책이었다. 서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자기네 주도로 협상구도가 흘러갔지만 점차 개도국의 힘이 갈수록 커지면서 선진국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며 “논의를 한발 더 진전시키는 것보다는 이번 협상을 일단 결렬시킨 뒤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서 WTO 협상의 판을 새로 짜기 위해 미국 등이 협상을 일부러 결렬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9월10일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이 5차 WTO 각료회의 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개도국들은 농업분야의 수출보조금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AFP연합)

사진/ 9월11일 칸쿤 회의장 앞에서 반세계화 단체 회원들이 미국의 정책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AFP연합)

사진/ 9월14일 WTO 각료회의가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현지 한국 농민들과 세계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꽹과리, 북, 장구 등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다.(한겨레 이제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