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분야에서 영업의 달인이라 불리는 세일즈인 4명… 핵심고객의 마음을 잡으면 고객은 절로 불어나
피터 드러커 등 미래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면 가끔 ‘세일즈맨의 죽음’을 말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각종 상품 거래에 개입한 세일즈맨은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정보 차이를 이용해 돈을 벌었는데, 모든 사람이 정보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가 진행될수록 중개인의 역할은 없어진다는 주장이다. 자연히 세일즈맨도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한겨레21>은 가전·자동차·컴퓨터 판매분야에서 ‘영업의 달인’으로 불리는 4명의 세일즈인들을 만났다. 상품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게다가 고객들의 소비심리까지 크게 위축된 요즘 세일즈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개척판매를 해야 신뢰가 쌓인다
8월27일 오전,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 22층 LG전자 고객영업팀. 운동장처럼 널찍한 LadyPart 사무실에 들어서면 아주머니들로 온통 와글와글하다. 주부판매사원들이다. 책상마다 상품 카탈로그가 수북이 쌓여 있고, 고객한테 전화를 돌리거나 고객주문서를 확인하는 세일즈우먼들로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사무실 출입구에 나붙은 조그만 종이 한장이 눈길을 끈다. ‘주부판매사원별 사은 포인트’ 내역이다. 포인트 점수를 쭉 어내려가다 보면 유독 한 사람의 실적이 한눈에 도드라진다. 포인트 1330점. 100여명의 판매사원별 포인트 목록을 대충 보면 500점대가 한두명 있을 뿐 50∼70점이 대부분이다. 포인트 1330점의 주인은 ‘움직이는 대리점’으로 불리는 김정애(47)씨. 김씨는 최근 2년 연속 ‘LG전자 판매여왕’으로 뽑힌 영업왕이다. 지난 한해 무려 35억원어치의 가전제품을 팔아 중견 가전대리점의 연간 매출액보다 더 많은 판매실적을 올렸다.
김씨는 한달 평균 1천여장의 명함을 뿌릴 정도로 열심히 발품을 판다. 김씨가 따로 관리하는 고객은 4천여명. 언제든 친구처럼 전화할 수 있는 핵심고객들이다. “그들(핵심고객)을 상대로 제가 벽걸이TV를 팔려고 시도하면 몇달 안에 대부분 팔 수 있어요. 고객 본인이 몰라서 안 사는 것일 뿐, 벽걸이TV가 왜 필요한지 내가 설득하고 깨우쳐주면 팔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고객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물건을 전달만 하는 거죠.” 이런 고객은 어떤 부류일까? “가정주부요? 제 고객 중에 아줌마는 거의 없어요. 남성 고객이 훨씬 더 많아요. 가정주부는 까다롭고 구매력도 떨어져요.”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또 이어진다. “고객 중에 얼굴을 잘 아는 고객은 40%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그 40%의 고객들이 소개해줘서 거래를 튼 고객들이죠.” 고객 한명 한명이 모두 그의 판촉사업 동반자인 셈이다.
친지 등 주변 사람들한테 상품을 파는 연고판매는 일찌감치 스스로 끊었다. “영업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동서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동생한테 식기세척기를 한대 강매했는데, 이런 식으로 하다가 연고가 바닥나면 그것으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고판매는 고객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고, 반대로 개척판매는 고객을 내가 돕는 것이죠. 고객한테 딱 맞고 실용적인 상품을 추천해주면서 개척판매를 해야 신뢰가 쌓이고, 그렇게 만든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저한테 소개시켜주는 사업 동반자가 되는 겁니다.”
성공한 세일즈인이라고 해서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건 아닌가 보다. 김씨가 가전 영업에 처음 뛰어들던 무렵, 관상을 보는 한 고객이 대뜸 “당신은 영업할 사람이 절대 아니야. 빨리 관둬!”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고객이 정확히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세일즈인에 맞도록 더 끊임없이 바꿔나갔죠.”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된 불황기를 만나면 세일즈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대금을 먼저 입금받고 나서 물건을 보내줬는데 경제침체로 판매가 급격히 감소하자 요즘에는 물건부터 보내준다고 한다. 하지만 오피스텔에 납품한 지 한달이 지나도 대금이 안 들어오고 결국 떼이는 일도 잦다. “그래서 우리 주부판매사원들끼리 ‘쉬는 게 버는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해요.”
죽자사자 발품만 판다고 일이 되나
김씨의 세일즈 비결은 무엇일까 물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세일즈의 기본이지만 홈쇼핑, 인터넷쇼핑 등이 판치는 세상에서 죽자사자 발품만 파는 고전적 수법만으로는 결코 성공한 세일즈인이 될 수 없다. 세일즈의 세계도 누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김씨가 주로 공략하는 곳은 아파트·오피스텔의 모델하우스. “주부들을 상대로 한 판매는 한계가 있고 실적도 고만고만하더라고요. 그래서 2∼3년 전부터 새로 집짓는 현장에 명함을 뿌리고 다니면서 김치냉장고나 세탁기 등을 팔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대박이 터졌습니다. 지금은 저를 본떠 다른 판매사원들도 모델하우스로 몰려가는 바람에 시장 다툼이 격화되고 있어요.” 김씨는 모델하우스에 이은 새로운 판매방식을 터뜨리기 위해 한창 고민 중이라고 했다.
가전 판매에서 김씨와 어깨를 겨루는 또 한명의 성공 세일즈우먼을 만날 예정이라고 하자, 김씨는 대뜸 “아, 그 뚱보!”라고 했다. ‘판매의 미다스’로 불리는 백숙현(43·대우일렉트로닉스 특판사업본부장)씨다. 백씨는 지난 1988년 대우전자에 입사한 뒤 해마다 판매왕 자리를 휩쓸면서 12년 동안 148억원어치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가전업계의 전설적인 판매여왕이다. “사진 날씬하게 나오게 좀 해주세요.” 서울 강남구 논현동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 특판사업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백씨는 자기를 소개하는 사진마다 뚱뚱하게 나와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며 사람좋은 웃음을 띠었다. 대우그룹 몰락 이후 판매 일선을 떠났던 그는 ‘새로운 신화창조’를 내걸고 올 초 ‘친정’으로 복귀했다.
각종 모임의 총무 맡아
백씨는 요즘 옛 대우가족 사람들을 ‘비상근 판매딜러’로 네트워크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우전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대우 사람들을 한데 모아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어요. 대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이죠. 제가 6월 한달에만 자가용으로 1만4천km를 주행하면서 700여명을 만났는데 올해 안에 2천명의 대우가족을 대우일렉트로닉스의 비상근 딜러로 만들 작정입니다.” 백씨는 비상근 딜러들이 항상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손바닥만한 상품 카탈로그도 제작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대우일렉트로닉스 제품을 그 자리에서 소개하고 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백씨가 구사하는 다양한 판촉기법 중 한 가지가 여기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소비자들을 확실한 자기 고객으로 만들고, 또 가지치기 하듯 고객을 끊임없이 늘려가는 것으로 이른바 ‘고객도 세일즈맨화하는 전략’이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백씨는 고객을 일일이 한명씩 만나 물건을 파는 방식은 되도록 피한다. 고객한테 밥 사주고 돈 들이는 전통적인 판매방식 대신 고객이 저절로 자기에게 오도록 ‘만든다’. 예컨대 고객 한명을 확실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거점으로 삼으면 그 고객이 또 다른 수많은 고객들한테 물건을 팔아주는 식이다. “요즘 봉천동에 있는 한 고시원에 방마다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넣고 있는데 알고 보니 고시원 주인이 어느 대형 병원 의사예요. 지금 고시원에 제품 설치 서비스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어요. 고객 서비스이기도 하지만 그 의사를 주요 고객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죠. 그 의사가 제 주요 고객이 된다면 그가 다니는 병원도 결국 내 것(고객)이 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그가 병원 사람들한테 저를 소개해줄 테니까.” 박씨는 걸핏하면 고객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그 고객이 다니는 회사 또는 그 주변 사람들은 “‘내 것’이 된다”고 표현했다.
백씨도 처음 가전 판매에 나섰을 때는 넉달간 실적을 한건도 못 올려 해고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 컴퓨터에 들어 있는 고객파일이 3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명실상부한 세일즈의 최강자이다. 고객 파일은 ‘○○회’ ‘○○모임’ 같은 20여개의 각종 목록으로 분류돼 나이·주소·전화번호·직업이 빽빽이 기록돼 있다. “제가 이런 모임들에서 총무를 일부러 맡고 있죠. 총무를 하면 회원들한테 연락하는 일을 도맡게 되고, 자연스럽게 친해져 그들을 상대로 세일즈도 하게 되잖아요.” 백씨는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여러 대 팔아봤다고 한다. 가전 세일즈 도중 새 자동차를 원하는 고객을 만나면 자동차 딜러를 소개해주는데, 이 경우 자동차 딜러는 나중에 백씨의 가전제품 고객이 된다.
르노삼성자동차 잠실지점에서 일하는 김용만(40) 팀장. 그는 자동차 세일즈 분야의 영업왕이다. 2001년 277대, 2002년 275대를 팔아 2년 연속 판매왕에 오른 데 이어 올 들어 8월까지 벌써 200여대를 팔았다.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고 하지만 옛 판매기록을 갈아치울 태세인 그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다.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새 차를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수요는 여전히 있습니다.” 가전제품과 자동차는 세일즈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까? 가전 분야의 영업왕 김씨와 백씨의 말과 달리, 김씨는 “많이 발품 팔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세일즈의 진리”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틈나는 대로 주변을 둘러본다. 주차된 차량 중 바꿀 때가 된 차가 보이면 자신이 고안한 ‘주차명함판’을 차량에 꽂아놓는다. 주차명함판을 보고 고객이 된 사람도 여럿이라고 한다. 송파구·강동구 일대에 있는 기업체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무작정 세일즈 안내문을 올릴 정도로 땀과 열정을 강조하는 세일즈맨이 그다.
지갑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라
그러나 다른 세일즈 왕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세일즈의 최대 재산은 고객이다. “내 고객의 40%는 내가 개척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신뢰하는 고객들이 소개해준 고객들입니다. 저를 다른 고객한테 소개해주는 우호고객 혹은 충성고객이 많아야 차 판매량도 늘어나고 판매계약도 쉽게 성사됩니다.” 물론 기존 우량 고객만 믿고 새 고객을 계속 개척하지 않으면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그래서 김씨는 차를 사줄 만한 ‘가망고객’ 수십명의 명단을 매월 새로 만들어 자신이 직접 제작한 판촉물을 보내는 등 집중 관리하고 있는데, 여러 차례 시도 끝에 판매에 실패하면 명단에서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끼워넣는다.
컴퓨터 영업분야에서 국내 최고로 꼽히는 삼보컴퓨터 중부특판팀 전타식(35) 과장은 “고객의 지갑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게 세일즈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01년 CJ39쇼핑에서 펜티엄3 PC를 2시간 만에 40억원어치나 팔아치운 대기록 보유자다.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지역의 학교·관공서·기업이 그의 주요 세일즈 무대다. 그의 고객수첩에 기록된 ‘키맨’(key man)은 약 420여명. 키맨은 각 기관과 기업에서 컴퓨터 대량 구매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일을 떠나서 고객과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해야 합니다. 고객이 막연히 컴퓨터를 사겠다고 해서 세일즈맨이 나중에 찾아가면 우리 것을 절대로 사지 않습니다. 항상 세일즈맨이 고객 곁에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야 구매의욕을 일으킬 수 있어요.”
물론 인간관계만이 세일즈의 성공 보증수표는 아니다. “약장수처럼 그저 ‘구매해주세요’는 안 통해요. 당신이 왜 이 물건을 사야 하는지, 이 상품을 구매하면 당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증거를 대야 세일즈에 성공할 수 있어요.” 세일즈맨의 미래에 대해 전 과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노출된 정보야 여기저기 널려 있죠. 하지만 고객은 의사결정할 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라도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나한테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누군가로부터 확실하게 다시 한번 추천받고 싶어해요.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세일즈맨이죠.”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가전제품 왕, 컴퓨터 왕, 자동차 왕…. 각 분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세일즈 황제들을 만났다. 그들이 공개하는 영업 비법은 무엇일까. 핵심 고객의 마음을 잡으면 저절로 고객이 늘어난다는데…. |
피터 드러커 등 미래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면 가끔 ‘세일즈맨의 죽음’을 말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각종 상품 거래에 개입한 세일즈맨은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정보 차이를 이용해 돈을 벌었는데, 모든 사람이 정보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가 진행될수록 중개인의 역할은 없어진다는 주장이다. 자연히 세일즈맨도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한겨레21>은 가전·자동차·컴퓨터 판매분야에서 ‘영업의 달인’으로 불리는 4명의 세일즈인들을 만났다. 상품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게다가 고객들의 소비심리까지 크게 위축된 요즘 세일즈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사진/ LG전자 고객영업팀 주부판매사원들. 상품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세일즈맨의 역할은 무엇일까.(박승화 기자)

사진/ ‘움직이는 대리점’으로 불리는 김정애씨. 김씨는 최근 2년 연속 ‘LG전자 판매여왕’으로 뽑힌 영업왕이다.

사진/ ‘판매의 미다스’로 불리는 백숙현 대우일렉트로닉스 특판사업본부장. 백씨는 12년 동안 148억원어치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가전업계의 전설적인 판매여왕이다.(김진수 기자)

사진/ 르노삼성자동차 잠실지점 김용만 팀장. 그는 2001년 277대, 2002년 275대를 팔아 2년 연속 판매왕에 오른 데 이어 올 들어 8월까지 벌써 200여대를 팔았다.(김진수 기자)

사진/ 삼보컴퓨터 중부특판팀 전타식 과장. 그는 2001년 CJ39쇼핑에서 펜티엄3 PC를 2시간 만에 40억원어치나 팔아치운 대기록 보유자다.(김진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