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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외국계 은행도 헤쳐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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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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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은행 론스타 매각 뒤 합종연횡설 흘러나와…외국 자본이 경영하는 제일·한미 등과 연합하나

외국자본 연합군이 뜬다?

외환은행이 미국계 투자펀드인 론스타에 매각되자 벌써부터 국내은행의 대형화에 정점을 장식할 외국계 금융자본간 합종연횡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재 8개 시중은행 가운데 외국계 자본이 완전히 경영권을 행사하거나 최대주주가 된 곳은 외환·한미·제일 등 3곳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3개 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불어닥친 은행권의 대형화 인수·합병 추세에서 한발 비켜섰거나 소외된 곳들이다. 제일은행은 일찌감치 뉴브리지캐피탈에 팔렸고, 한미도 발빠르게 외국자본(칼라일 컨소시엄)을 끌어들였다. 현대 부실의 늪과 자본부족의 악순환에서 헤매던 외환은행이 마지막으로 론스타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사진/ 이강원 외환은행장이 8월27일 서울 을지로 본점에서 론스타와 매각계약을 체결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계약 뒤 외국계 금융자본간 합종연횡설이 흘러나왔다.(한겨레 김태형 기자)


규모의 경제가 수익 좌지우지


그동안 국민은행은 주택은행과 합쳐 자산 기준 200조가 넘는 국내 최대은행이 됐고, 하나은행은 옛 서울은행과 합병했고, 신한은행은 조흥은행과 짝짓기를 끝내 자산 150조원의 대형은행으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제일 먼저 초대형 합병을 한 우리은행(상업-한일)까지, 국내 시중은행은 5~6년 새 이른바 ‘빅4’ 구도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단순하게 보면, ‘토종’ 대형은행인 ‘빅4’와 외국계 자본이 주인인 ‘미디움(medium) 3’의 경쟁 판도로 재편된 셈이다. 국민은행은 주주의 70%가 외국인이지만 경영권을 위협할 만한 대형 주주가 없고, 신한은행은 초기 투자자본이자 내국인 지분으로 분류되는 재일교포 대주주 몫(24%)을 빼면 외국인 지분은 20%대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토종’으로 불릴 만하다.

이런 구도를 규모의 경쟁력 차원에서만 보면 외국계 중견은행은 그만큼 불리한 위치에 놓인 셈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기업금융(도매금융)이 눈덩이처럼 부실화돼 찬밥 신세로 전락하면서 시중은행들은 고만고만한 소매금융에서의 가격 및 서비스 경쟁에 주력해왔다. 이런 영업환경은 ‘규모가 곧 경쟁력’이란 명제를 정설로 굳혔고, ‘외국자본 연합설’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가 수익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중견은행들이 순순한 영업 경쟁력만으로 대형은행을 따라잡을 수는 없으며, 이런 불리한 경쟁구도를 깨는 데 유일한 해결책은 또 다른 대형화뿐이라는 얘기다.

사진/ 2000년 12월27일 국민 · 주택은행 노조원들의 합병반대 시위를 경찰이 진압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주택은행과 합쳐 자산 기준 200조가 넘는 국내 최대은행이 됐다.(한겨레 이정용 기자)
“당장 조달원가와 비용 측면에서 대형은행들에게 한수 밀리고, 방카슈랑스, 모바일 결제시장 등 금융 겸업화 흐름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국내 금융시장 규모와 영업 관행을 감안할 때 어차피 소매금융 경쟁에서 한판 붙어볼 수밖에 없는데, 외국계라고 해서 차별화된 영업력과 전략으로 승부할 뾰족한 수가 없다.”(한 시중은행 전략담당 임원)

연합설의 또 다른 근거는 이들 외국계 자본의 성격이 모두 공격적·단기적 투자이익을 노리는 미국계 투자펀드라는 점이다. 투자펀드의 속성상 돈을 댄 전주들의 투자 이익을 회수해야 한다는 가장 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영업으로 승부가 안 되면 ‘말이 통하는’ 이들끼리 자연스레 인수·합병을 통한 몸값 부풀리기 움직임이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은행도 연합군의 ‘후보’로

뉴브리지(제일)는 이미 지난해 조흥은행 인수전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천명한 상태다. 제일은행은 자산 규모가 은행권 최하위인 20조원대로 쪼그라들었지만, 우리 정부로부터 막대한 풋백옵션(사후 손실보전) 보상을 받아 이른바 ‘클린 뱅크’로 자부할 만큼 자산 건전성이 높아졌다. 그만큼 투자 여력도 풍부해졌으니, 언제든지 ‘물건’만 있으면 사들여 자산 키우기에 나설 태세다. 코헨 행장은 지난해 말부터 “이젠 투자하는 일만 남았다. 최소한 50조원 이상으로 자산을 키워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은행이나 카드사를 인수하겠다”는 뜻을 여러차례 밝혀왔다. 론스타(외환)는 잘 알려진대로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을 때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에서 부실채권과 부동산 등을 싼값에 사들여 되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다. 외한은행 인수 직후 곧장 사외이사 5명을 파견하는 등 경영에 시동을 걸고 있지만, 일정 수준의 차익이 생기면 미련없이 떠나는 냉정함과 대형 딜에 강한 노하우를 앞세울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관측이 높다.

사진/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1998년 12월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감위 사무실에서 제일은행을 미국 뉴브리지캐피털사에 팔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있다.(씨네21 손홍주 기자)
칼라일(한미)쪽은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칼라일은 지난 2000년 주당 6800원에 한미은행에 투자해 2년여 만에 50%를 웃도는 평가익을 올린 상태다. 특히 8월6일 영국계인 스탠다드차타드가 전격적으로 삼성전자의 한미은행 주식 9.76%를 인수해 2대 주주로 떠오르면서 시세차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스탠다드쪽이 한미은행 지분 인수를 “한국 소매금융 시장에 대한 거점 확보”로 설명하면서 강력한 추가 투자의사를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칼라일이 오는 11월 투자지분 매각 제한이 풀리면, 스탠다드쪽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보유 지분을 팔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그러나 스탠다드의 국내시장 진출은 단기 차익을 노린 게 아니라 씨티은행이나 HSBC 등과의 직접적 경쟁을 염두에 둔 장기적 성격이어서 좀더 시간을 두고 국내 시장과 ‘매물’을 탐색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어찌 됐건 칼라일은 이미 상당한 평가익을 올린 상태여서, 펀드 내 전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리스크가 큰 인수·합병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론스타-칼라일-뉴브리지’로 이어지는 ‘3자연합’ 외에,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하나은행도 연합군 ‘후보’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최근 하나은행의 자사주 15% 인수를 추진 중인 일본 신세이은행 역시 미국계 리풀우드홀딩스가 사들인 자회사다. 하나은행은 경영권 보장을 전제로 현금흐름 개선 차원에서 자사주 매각을 추진 중이지만, 오는 2005년까지 인수해야 할 정부 지분 20%를 모두 되팔 경우 경영권 보장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금융권에서는 하나은행이 굳이 외국계로 넘어가지 않더라도, 3년 뒤 신한-조흥 합병은행이 탄생하면 국내은행 ‘빅4’ 가운데 자산규모가 최하위로 떨어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생존을 건 추가 합병에 나설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소매금융 시장이 1차 격전지”

은행권의 ‘2차 빅뱅’은 아직 설익은 시나리오 수준이다. 그러나 이미 국내 은행시장이 공급과잉인데다 해외 수익모델 등 다른 탈출구가 없는 상황이어서 현실화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과거에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정부가 은행 합병을 주도했다면, 이젠 대주주들의 상업적인 판단과 생존을 위한 합종연횡이 이뤄질 것이란 얘기다. 때문에 토종이든 외국계든 당분간은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은행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 외환위기 때처럼 외국자본이 싼값에 들어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차익을 챙기던 시절은 지났다. 자본의 국적과 관계없이 어떻게든 영업을 통해 기업이익을 최대화해야만 몸값이 올라가고, 그래야 인수·합병에도 대비할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돈이 되는 소매금융 시장이 1차 격전지”라고 말했다.

김회승 기자/ 한겨레 경제부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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