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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국민연금, 국고를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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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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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고갈 위기라며 가입자에게만 부담 떠넘겨…조세로 재원 마련해 저소득층 지원해야

재정고갈 위기, 주식투자로 막대한 손실, 정부 멋대로 기금 사용…. 국민연금 하면 누구나 마음 같아선 당장 탈퇴하고 싶다고 한다. “노동자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제도”라는 말이 상징하듯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강제 의무가입인 국민연금을 선택형으로 바꾸거나 아예 폐지하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급여액 인하·보험료 인상이 대안?

이런 상황에서 최근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 개편안을 또다시 내놓았다. 개편안은 현행 국민연금 급여율 60%를 내년에 55%로 낮춘 뒤 2008년에 다시 50%로 인하하고, 소득의 9%인 현행 보험요율은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15.90%(2030년)까지 올리기로 했다. 급여율은 소득대체율로 불리는데, 급여율 60%는 자기 월평균 소득의 60%(40년 가입 기준)를 연금급여로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개편안은 입법예고, 공청회, 국무회의 등을 거쳐 10월 정기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사진/ 1999년 5월27일 민주노총·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뒷문에서 국민연금 재정분리 반대 및 의보료 50% 국가 지원 약속 이행 등을 촉구하고 있다.(김진수 기자)
국민연금 가입자들에게 재정 부담을 떠넘기는 ‘급여액 인하, 보험료 인상’ 조처는 예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1988년 국민연금 도입 당시 급여율은 70%였으나 99년부터 60%로 낮아졌다. 이제 또다시 50%대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반면 보험료는 애초 3%에서 단계적으로 1%씩 올라 현재 9%(직장가입자· 노사 4.5%씩 부담) 및 7%(지역가입자)에 이른다. 지역과 직장가입자의 보험료는 2005년에 9%로 단일화되는데, 개편안에 따르면 2010년부터 또 한번 대폭 오를 예정이다.

이런 개편안은 국민연금 장기 재정전망에 기초하고 있다. 지금이야 국민연금을 도입한 지 15년밖에 안 된 탓에 급여지출이 본격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이에 따라 기금 적립금이 해마다 쌓여 100조원을 돌파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급여율과 보험요율을 그대로 유지하면 2036년에 연금급여 지출이 보험료 수입을 초과해 수지적자(-12조원)를 내고, 2047년에 적립기금이 바닥나는 재정고갈(-96조원)을 맞게 된다. 최소한 2070년까지 재정이 고갈되지 않게 하려면 급여율 인하와 보험료 인상이 어쩔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기금고갈이 근본적으로 현행 ‘저부담-고급여’ 체제에서 비롯됐으며, 이 체제를 개편해야 국민연금이 지속될 수 있다는 얘기다. 덧붙여, 흔히 막대한 주식투자 손실로 국민연금이 펑크날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소문과 다소 다르다. 복지부에 따르면 간헐적으로 주식투자 손실이 있었지만 지난해 말까지 총 1조3천억원의 주식투자 누적이익을 냈다. 전체 기금운용투자수익률도 플러스로, 연금기금 적립금 100조원 가운데 33조원이 운용수익금으로 조성되었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과연 국민연금은 제도가 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재정파탄이 불가피한 것일까? 국민연금 재정 위기의 근본 문제는 무엇일까?

부유층에 직접세 제대로 걷으면…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1650만명으로, 지난 5월 적립금 100조원을 돌파했다. “세계 주요 연기금과 비교할 때 손에 꼽을 정도로 막대한 기금운용 규모”라는 게 복지부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팽배해 있다. 또 지역가입자 1천만명 중 420만명은 실직 등으로 인한 납부 예외자로서 보험료도 내지 않고 보험혜택도 거의 못 받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모든 가입자에게 재정 부담을 떠넘기는 땜질 처방(보험료 인상, 급여율 인하)을 해마다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연금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연금을 안정시킬 것인가 존폐 논란까지 빚어지는 국민연금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민주노총 오건호 정책부장은 “현재 국민연금은 어차피 재정고갈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관리 방식이다”며 “그동안 정부가 해온, 모든 가입자한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은 불신만 더 초래하고 결국 국민연금을 파탄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 기능을 가진 공적 연금인데, 정부가 국고지원 책임을 포기한 채 노동자·서민에게 끊임없이 부담을 강요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진/ 1999년 3월19일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연금 문제점 개선을 위한 토론회. 국민연금이 현행 급여율과 보혐요율을 그대로 유지하면 2047년에 재정고갈을 맞게 된다.(한겨레)
현재 정부의 국고지원은 농어민에 대한 보험료 지원(최저등급인 월 22만원 소득자의 보험료 2분의 1)과 국민연금관리공단 운영비 지원뿐이다. 국고 보조가 거의 전무한 편이다. 반면 독일·캐나다 등 국민연금을 시행하는 대다수 국가에서는 연금 수지적자분 보전 등을 위해 급여지출의 20% 안팎을 국고로 보조해주고 있다. 소득 재분배 및 저소득층 노후생계 보장이라는 국민연금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건호 부장은 “우리 정부도 조세를 통해 사회적 재원을 마련한 뒤 비정규직노동자나 취약한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며 “정부는 국민연금 개편 방향을 재정안정화로 잡고 보험료만 높이고 있는데, 노동자·서민의 노후생계 보장이란 측면에서 현행 연금급여 수준을 유지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고보조를 위한 사회적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현재 우리나라 직접세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1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15∼16%)에 크게 못 미친다. 노동계는 종합소득세 탈루액 발굴, 재산세 및 종합토지세 현실화, 주식양도차익과세 신설 등 부유층의 압력에 밀려 방치되고 있거나 ‘안 거둬들이고’ 있는 직접세를 제대로 걷기만 해도 재원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급여율 낮추면 ‘용돈’으로 전락

물론 상위계층은 이미 국민연금 외에도 상당한 자산에다 금융소득을 올리고 있고 개인연금 등 사적 연금에도 대부분 가입해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은 없어도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노후자산을 다양하게 확보한 부유계층에게 법으로 강제된 국민연금은 귀찮은 존재다. 자신들의 소득을 저소득층에 제도적으로 이전(소득재분배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연금 등 사적 생명보험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하위계층에게 훨씬 유리하도록 설계된 사회보험이다. 가입기간 40년 기준으로 최상위 소득자는 자기 소득의 41.4%를 연금급여로 받지만, 최하위 소득자는 자기 소득의 100%를 받는다. 그렇다고 부유층이 손해만 보는 것도 아니다. 고소득층은 보험료를 많이 내기 때문에 받는 연금 급여액도 절대적으로 더 크고, 평균적으로 저소득층에 비해 더 오래 살기 때문에 가져가는 연금액도 더 많다.

사진/ 서울의 한 국민연금관리공단 출장소. 정부는 또다시 급여액 인하·보험료 인상을 뼈대로 하는 국민연금 개편안을 내놓았다.(박승화 기자)
그러나 조세를 통한 국고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복지부는 “별도의 대책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복지부 박경호 연금정책과장은 “농민에 대한 보험료 지원은 저소득 계층이어서가 아니라 농촌을 떠나지 않고 농업을 지키는 데 따른 보상 차원”이라며 “저소득 계층에게는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을 통해 이미 국가가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에서 또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 “국민연금 자체가 소득재분배 효과를 갖고 있는데 부유층에게 새로운 세금을 거둬 연금 재원을 마련하면 결국 이중과세가 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정부가 이중과세 논리를 펴고 있지만, 사실은 국민연금에 적극 개입해 재정을 쏟아붓기 시작하면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부담이 커질까봐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국고 보조가 없어서 태평하기 때문에 정부가 연금재원 마련에 팔짱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국고 보조는커녕 필요할 때 자의적으로 연금기금을 사용해 국민들의 불신만 초래해왔다. 최근까지 ‘공공자금 예탁금’(현재 예탁잔액 22조원)이란 이름으로 수십조원의 연금기금을 시중 이자율보다 훨씬 싼 금리로 빌려 썼는가 하면 증시부양 명목으로 기금을 동원하기도 했다.

한편, 정부는 너무 높은 현행 급여율(60%)이 국민연금 재정을 위기로 몰아넣는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급여율 60%에서 가입기간 40년을 채운 중간 등급 가입자(평균소득 136만원)가 받는 연금수령액은 81만원이다. 그러나 40년을 채운 가입자는 거의 없고, 2070년에 전체 가입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21.7년에 불과하게 된다. 이럴 경우 급여율 60% 체제에서도 평균가입자들이 실제로 받는 급여율은 고작 30%(약 40만원·2070년)밖에 안 된다. 이는 2002년 기초생활보장제도 1인가족 최저생계비(34만5400원)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정부 개편안처럼 급여율을 50%로 더 낮출 경우 국민연금은 그야말로 ‘용돈’ 수준이 되고 만다.

사용자단체의 사적 생명보험 옹호

사용자단체는 국민연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경영자총협회는 정부쪽의 접근과 마찬가지로 급여율을 대폭 낮추라고 요구해왔다. 공적 연금의 급여율을 낮추고, 대신 기업연금과 사적 생명보험으로 보충하자는 것이다. 경총 이호성 팀장은 “국민연금을 소득에 비례해 지급하는 기업연금 및 민간 개인연금과 연계하는 3중 보장체계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급여율을 낮춰 국민연금을 약화시키고 대신 ‘시장’의 사적 생명보험을 확대하겠다는 의도를 사용자단체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가입자들이 국민연금을 불신하고 있지만, 노동자·서민의 시각에서 볼 때 국민연금은 시장의 금융상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고 있다. 2002년 말 민간 생명보험 수익률은 4∼5%에 불과한 반면 국민연금 평균수익률은 가입기간에 따라 7.9∼11.2%로 훨씬 높다.

민주노총 오건호 부장은 “정부와 사용자단체가 연금재정 고갈 등 위기론을 의도적으로 유포해 보험료 인상과 급여율 인하를 시도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정작 국민연금 혜택을 받는 노동자·서민들이 스스로 연금을 거부하도록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연금 위기가 닥치면 불거질 게 뻔한 ‘국가 책임론’을 미리 피하기 위해 국민연금을 위축시키고 있으며,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노후가 걱정되면 국민연금이 아닌 사적 생명보험에 가입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국민연금을 깰 것인가, 제대로 살릴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국고 보조’ 및 ‘부유층에 대한 조세’라는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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