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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철강신화, 다시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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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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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철강 창업주 아들 권호성씨 한보 인수에 앞장… 자금, 경영능력에 대한 의문도 제기돼

(사진/권호성 중후산업 사장)
아버지의 비원, 아들이 이룬다?

연합철강 창업주인 권철현 전 회장의 장남 권호성(45) 중후산업 사장이 한보철강 인수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 업계 안팎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철강업계에선 인수 능력을 의심하는 시각이 많지만 권 사장쪽은 미국의 투자회사 3곳 등을 포함해 자금줄을 확보한 상태라고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권 사장의 이런 행보는 연합철강의 ‘비운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데다 한보철강이란 거대 부실기업의 처리와 연계돼 갖가지 추측과 입방아를 낳고 있다.

개인사에 얽힌 비원


권 사장은 애초 한보철강 인수자로 결정돼 본계약을 맺는 단계까지 갔던 네이버스컨소시엄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네이버스가 한보철강 인수를 최종적으로 포기한 직후 즉각 다른 투자자들을 끌어모아 인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쳐 철강업에 남다른 의욕이 있음을 보여줬다.

권 사장이 한보철강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또 인수능력은 있는가? 자금줄은 어디일까? 한보철강을 인수할 경우 제대로 경영을 해나갈 수 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소된 것은 없다.

권 사장과 경기중·고교 동기동창인 김건철 리오상사 이사는 (그의 철강업 집념에 대해) “아버지가 일군 가업을 잇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때 부도를 내 국제그룹으로 인수되었다가 다시 5공화국 때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연합철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 이사는 권 사장의 절친한 친구이며 한보철강 인수작업에 공동 참여하고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리오상사는 아랍권에 플랜트 수출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0월19일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김 이사는 변호사, 회계사 등이 포함된 보좌그룹을 꾸려 권 사장의 한보철강 인수작업을 돕고 있다고 했다. 당시 권 사장은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철강업에 대한 권 사장의 집착은 그의 독특한 이력과 관련이 깊다는 게 김 이사의 설명이다. 권 사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인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동생이 치명적인 병(골수암)에 걸려 치료차 미국으로 가는 길에 동행한 것이다. 연합철강이 부도를 내고 국제그룹으로 넘어가기 2년 전 일이다. 장기체류할 마음까지는 없었지만 부친의 회사가 풍비박산나는 바람에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줄곧 미국에 머물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연합철강에 대한 한이 맺혔으며 언젠가는 연합철강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굳혔다고 한다. 직접 연합철강을 인수하지는 못하더라도 철강업에 뛰어들어 예전의 연합철강 못지않은 회사로 키운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김 이사 등 측근들에 따르면 권 사장은 대학(예일대) 시절부터 갖가지 특이한 경험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택시 몇대를 사들여 영업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남미지역에서 수산물 중개업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월가에 뛰어들어 주식투자에 나서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김 이사는 이때의 경력 덕분에 외국의 투자자들을 쉽게 끌어올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 사장쪽은 개인사에 얽힌 비원도 있지만 한보철강 자체의 사업성도 높게 보고 있다고 밝힌다. 인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우선 자산인수 방식이므로 부채를 안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을 운영해나가기 때문에 수지가 맞는다는 설명이다. 거대 장치산업인 철강업의 속성상 부채비율이 높은데 이런 부담없이 가볍게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스컨소시엄 내분의 원인은?

(사진/한보철강 당진 제철소)
한보철강의 시설도 좋은 편이라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전세계에 8대뿐인 압연기를 갖추고 있는 등 설비면에서도 좋은 점수를 얻고 있으며 경제성이 있다는 것이다. US스틸 등 세계적인 철강회사들이 벌인 실사에서도 설비에 대해선 비교적 호의적인 평을 얻었다고 전한다.

권 사장쪽의 이런 의욕에 대해 정부나 채권단에선 반신반의하고 있다. 철강업계 일각에선 권 사장을 ‘돈키호테’라고 비아냥거리며 심지어 ‘사기꾼’이란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그의 한보철강 인수는 실현가능성없는 ‘계획’일 뿐이며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네이버스컨소시엄에 내분이 생기고 결국 한보철강 인수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 배경에도 권 사장의 튀는 캐릭터(성격)가 적잖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즉, 컨소시엄 지분을 20%밖에 갖지 못한 권 사장쪽이 경영권에 욕심을 내면서 한보철강 인수작업이 꼬였다는 것이다.

김건철 이사는 이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며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반 때 한국에 건너와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개인적인 이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질적인 문화를 다양하게 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캐릭터가 한국적인 환경에 잘 맞지 않아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네이버스컨소시엄의 계약파기 배경에 대한 설명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설명했다. 네이버스컨소시엄의 두축인 미국의 네이버스캐피털(회장 아이젠버그)과 서드애비뉴(회장 마틴 위트먼)가 장기투자를 주장하는 권 사장을 배제하고 채권단과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이다. 네이버스컨소시엄의 지분구조는 네이버스캐피털, 서드애비뉴 각각 40%, 중후산업 20%로 돼 있었다.

권 사장쪽 주장에 따르면, 미국 투자자는 한보철강을 인수하는 즉시 되팔아(전매) 차익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철강회사 이스팟이 유력한 전매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스팟은 올해 3월 네이버스가 한보철강을 인수하는 본계약을 맺은 뒤 한보철강 현장을 세밀하게 돌아보기도 했다. 한보철강에 대한 정밀실사를 벌인 이스팟은 네이버스의 인수가(4억8천만달러)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네이버스의 전매 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해석이다.

네이버스컨소시엄쪽의 공식 견해는 물론 이와 다르다. 인수계약 파기 뒤 네이버스쪽은 채권단이 본계약 선행조건(조세채권 문제 등)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든 것이었다. 한보철강 매각 무산을 둘러싼 견해가 엇갈리는 것 못지않게 권 사장쪽의 인수능력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어찌됐건 의지는 있는데 그에 걸맞은 자금동원력이나 경영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수의계약이든 공개입찰이든 뛰어든다”

(사진/한보철강 매각이 무산된 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10월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모인 채권단 대표들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권 사장쪽에선 미국의 투자회사 3군데로부터 인수권만 확보해오면 인수의향서(LOI)에 서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자금도 동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건철 이사는 “총인수대금을 5억5천만달러 수준으로 잡고 있으며 대략 이 정도 수준은 동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사장쪽에서 밝힌 인수대금에는 실사비, 코렉스 설비인 B지구 공장을 정상화하는 데 드는 비용도 포함된 것이다. 투자의향이 있는 미국 회사가 어디냐는 질문에 김 이사는 “투자 참여업체를 밝힐 경우 잠재적인 경쟁상대들로부터 방해를 받을 수 있다”며 공개를 꺼렸다.

또 하나 의문점은 권 사장이 대표이사로 있는 중후산업의 경영상태이다. 중후산업은 예식장사업, 부동산 개발·임대업에 나서고 있는데 지난해 8억원의 적자를 낸데다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다. 또 단기차입금 60억원 등 부채가 125억원에 달해 이자비용만 8억∼9억원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런 지경에 빠진 자신의 회사를 내버려두고 거대 부실기업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은 있다. 중후산업은 권철현 회장이 세운 것일 뿐 권 사장은 별로 관심이 없는 분야라는 것이다. 대표이사 사장 직함을 달고 있지만 한국서 활동할 베이스캠프(근거지)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권 사장쪽은 주장했다.

자산관리공사를 비롯한 한보철강 채권단은 아직 명확한 처리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수의계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 한편에 특혜시비에 휘말릴 개연성이 높아 다시 공개입찰을 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대두되고 있다.

권 사장쪽은 내심 네이버스컨소시엄의 인수권 승계나 수의계약을 원하고 있으나 재입찰에 참여하는 쪽에도 무게를 두고 준비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권 사장의 의지와 능력이 검증될지 주목된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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