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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당신만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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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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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성향 파악해 광고·판매하는 고지서 마케팅… 개인별 주문인쇄와 결합해 맞춤 신문 등 제작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범죄마저도 사전에 예측하는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광고판에 그의 기호와 소비 성향에 맞춰 제각각 다른 광고가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고객특성을 기초로 세분화된 마케팅을 펼치는 고객관계관리(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의 극단적인 모델을 보여주는 사례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나의 구매성향을 파악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지독한 상업전략은 분명 끔찍한 점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소비내역을 누구보다도 빤히 알고 있는 카드회사에서 매달 보내는 이용대금 명세서 안에 일년 열두달 변함없이 ‘포장이사 할인권’이 들어 있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늘 쓸데없는 할인쿠폰만 보내오는 카드회사의 구태에 지겨워하면서 휴지통에 손을 뻗지 않을 사람이 있는지.

데이터마이닝 이용해 맞춤 정보 제공

사진/ 사이텍스가 내년에 선보일 차세대 프린터로 데이턴 지역에서 많이 보는 신문 중의 하나인 〈USA투데이〉를 모방해 만든 실험판.
미국 오하이오주 인구 50만명의 소도시 데이턴에 자리잡은 회사 ‘소스링크’에서는 변화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기업들이 고객에게 보내는 각종 명세서·고지서들을 인쇄하는 이 회사는, 최근 항공회사 아메리칸에어라인스와 계약을 맺고 새로운 양식의 고지서를 만들고 있다. 아메리칸에어라인스로부터 고객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외에 최근 마지막으로 여행한 곳, 관심사, 취미 등을 넘겨받아 이를 분석해 고객마다 차별화된 정보와 광고를 제시한다. 가령 28살의 음악을 좋아하는 남자 애널리스트에겐 팜 스프링스에서의 여유 있는 골프보다는 재즈 도시 뉴올리언스가 훨씬 매력적일 것이다. 그에겐 푸른 골프장보다는 뉴올리언스의 무대사진이 훨씬 주의를 끈다. 하루 89달러에 달하는 고급 승용차를 렌트하라고 꼬드기기보다는 주말에 18달러로 보스턴에 사는 애인과 경제적인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주말할인 경차를 타라는 광고가 더 먹힐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자손녀를 저 멀리 서부에 둔 뉴저지주의 60대 할머니가 받아볼 고지서에는 장거리 할인 전화 서비스를 싣고, 아이들이 셋 딸린 40대 가장에게는 미니밴 렌트카 광고를 보내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소스링크의 부사장 짐 해케트는 “9월부터 고객들에게 보낼 이 새로운 고지서가 하나의 수익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고지서에 실을 광고를 직접 유치함으로써 광고이익을 얻을 계획이다. 그렇다면 기업으로선 그동안 영업활동을 위한 ‘비용’으로만 여겨지던 고지서가 마케팅 도구이자 매출을 직접적으로 증대시키는 수입원이 되는 것이다.

가변 데이터 처리하는 디지털 프린터

사진/ 1분에 1천장씩 가변 데이터를 인쇄해내는 디지털 프린터. 인쇄업체 소스링크는 개인별로 다른 광고와 정보가 실린 항공사 고지서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개인마다 다른 정보와 광고로 색색으로 무장한 특별한 고지서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적인 추세는 미리 컬러 윤전기로 공통 내용들을 인쇄한 뒤 고객의 이름과 구매내역 같은 개인 상세정보를 컴퓨터 프린터로 출력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컬러로 사전 인쇄하는 물량이 많지 않으면 수지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같은 내용의 메세지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가령 바나나를 좋아하는 고객에게는 노란 바나나가 그려진 고지서를 보내고 망고를 좋아하는 이에겐 망고 그림을, 딸기 마니아에겐 딸기 그림을 보내는 식으로 백 가지, 천 가지 다양한 고지서를 보내는 것은 새로운 디지털 프린팅 기법이 아니고선 경제적·기술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소스링크가 이처럼 새로운 고지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디지털 프린터의 기술적 발달이 뒷받침됐다. 소스링크에서 차로 달리면 15분 거리에 있는, 역시 데이턴에 자리잡은 디지털 프린터 제조회사 ‘사이텍스’에선 이처럼 가변 데이터를 컬러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프린터 개발이 한창이었다. 7월17일 사이텍스 오픈하우스에 초대된 일본·베트남·싱가포르·중국·한국 고객 60여명은 사이텍스의 기계를 둘러보며 시연회를 가졌다. 이곳에선 개인별 주문인쇄(Print-On-Demand)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사이텍스는 일본 통신회사 NTT를 비롯해 세계 40개 나라, 5천개 업체에 1만여대의 디지털 프린터를 수출해왔다. 이 회사의 인기품목 중의 하나인 ‘버사마크 비즈니스 컬러 프레스’의 경우 개인별로 각기 다른 그림·숫자·문자가 새겨진 것을 1분에 1천장씩 토해내고 있었다. 레이저 프린터처럼 해상도가 높지는 않지만 인쇄비용이 훨씬 저렴한 잉크젯 프린팅을 고집하는 사이텍스는 다음해엔 해상도 600dpi(dot per inch: 가로·세로 1인치의 선에 600개의 점을 찍는 것) 시리즈를 내놓을 계획이다.

[%%IMAGE4%%] 사이텍스 시연회를 방문한 중견 인쇄업체 ‘조우니’의 김경보(41) 부장은 사이텍스의 프린터가 새로운 고객관계관리의 모델로 응용될 수 있음에 주목했다. “현재 우리나라 고지서·영수증 시장은 흑백에서 컬러로 급변하는 고빗길에 와 있다. 요즘엔 고지서·영수증을 대하는 기업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아무리 무심한 고객이라도 자기가 사용한 카드내역서, 세금고지서 같은 것은 읽어보게 마련이다. 고지서·영수증·개인 메일들이 확실한 마케팅 수단임을 기업들이 깨달아가고 있다.”

오프라인으로 개인마다 차별화된 정보를 전하는 것은 단지 개인발송 메일의 마케팅 효과로만 그치지는 않는다. 요즘 우리나라 학교에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인쇄업체들이 수익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졸업앨범 주문을 꺼리고 있다. 고화질의 디지털 프린터는 20명 정도의 소규모 인원이 받아볼 기념앨범도 가뿐하게 찍을 수 있다. 그것도 각각 자기 사진이 앞장에 가장 크게 나오거나 자기 얼굴이 나온 그룹사진들로 가득찬 20개의 다른 앨범으로.

신문의 종류가 독자 수만큼 될 수도

수천부·수만부가 똑같이 인쇄되는 현재의 신문도 모습이 바뀔는지 모른다. 성별, 나이, 관심사, 거주지역에 따라 수백개로 세분화된 독자그룹들이 각각 다른 기사와 광고가 실린 신문을 받아보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 카젬 사만다리 사이텍스 부사장은 “내년에 나올 고해상도 프린터로 신문을 찍어보니 지금 신문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문 시장에 디지털 프린터가 도입되려면, 이에 앞서 독자들이 ‘자신들을 분류하는’ 신문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져야 하고 발송 시스템도 변화하는 등 기본적인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객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영악한’ 기업들은 이제 한장의 고지서에도 눈을 번뜩이며 손님의 눈을 잠시라도 더 붙잡아보고자 달려들고 있다. 가변 데이터를 빠른 시간에 인쇄해내는 디지털 프린터 기술과 이 전략이 맞아떨어질 때 얼마나 폭발력 있는 화학적 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하이오= 글·사진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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