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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잔챙이는 가고 대어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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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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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액예금자 우대하는 금융기관의 차별화 전략… 수익성 인정하지만 일반 예금자들 ‘씁쓸하네’

(사진/거액 예치자들을 위한 동양종금 골드룸. 주로 세무나 자산운용등에 관한 상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 성내동에 있는 한빛은행 둔촌역지점. 이 지점 안에는 두개의 출입구가 있다. 자동화코너를 지나 정면으로 이어지는 출입구는 일반 고객들이 이용하는 곳이고 이와 별도로 왼쪽에 출입구가 하나 더 있다. 거래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되는 이른바 VIP(주요고객)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거액을 맡긴 고객들이 업무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별도창구, 세무상담, 골프클리닉까지

거액을 예치한 고객들은 별도창구에서 업무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률·세무상담 서비스도 받고 있다. 또 각종 문화행사에 초대받기도 한다.


한빛은행 지점 가운데 이처럼 주요고객을 위한 별도 출입구를 두고 있는 곳은 120개에 이르고 있다. 이 은행은 올해 말까지 이를 200개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전체점포 700여개 중 30%가량이 VIP전용 창구를 두게 되는 셈이다.

거액자금을 끌어오기 위한 금융기관들간의 쟁탈전이 치열하다. 지금까지는 일반 고객 및 여론의 눈치 때문에 비공개로 쉬쉬하면서 수수료 면제, 종합건강검진권 등을 제공해오던 은행들이 거액 예치자들을 위한 별도창구를 설치하는 등 공개적인 ‘귀족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될 예금부분보장제의 상한선이 애초 2천만원에서 5천만원으로 상향조정되면서 금융기관들의 ‘거액예금자 모시기’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1인당 보장한도가 5천만원으로 조정됨에 따라 소액 일반 고객들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반면, 거액예금자들은 분산예치할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거액자금의 이동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한빛은행의 경우 본·지점 ‘프레스티지클럽’(VIP클럽)을 통해 특별관리하는 대상은 예금액이 5억원 이상인 초우량 고객들로 3천명 안팎에 이른다. 프레스티지 회원에게는 일년 내내 24시간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프레스티지 전용 텔레뱅킹 서비스가 제공된다. 또 특급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종합건강검진권, 1년에 4번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예술공연 티켓과 제주도 2박3일 여행티켓(2장) 등도 제공된다. 로얄클럽, VIP클럽, 리치클럽 등 이름은 약간씩 다르지만 다른 금융기관들도 대부분 거액 예치 고객들을 위한 별도센터를 두고 있으며 각종 서비스를 덧붙여주고 있다.

한미은행의 경우 거래실적으로 ‘로얄고객’을 분류, 수수료 면제는 물론 2천만원 무보증 대출, 건강종합검진, 호텔디너 초청, 무료 여행티켓 등을 제공하고 있다. 조흥은행도 주요고객들에게 종합병원의 건강종합검진권과 공연티켓을 주고 있다. 하나은행은 골프상해보험에 무료로 가입시켜주고 골프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증권업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아예 별도지점을 차려 거액을 굴리는 고객들만을 상대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삼성증권 ‘S&I클럽’이 대표적인 예다. S&I는 올해 3월 개설됐으며 ‘삼성과 투자’ 또는 ‘삼성과 나’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생산성 월등히 높은 거액예금

S&I클럽에서 상대하는 고객들은 40명 안팎에 불과하다. 모두 강남지역의 부자들이다. 이들의 평균 금융자산은 30억원 수준이다. 주로 종합금융사에 돈을 맡겨 운용해왔는데 최근 들어 종금사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증권사로 발길을 돌린 이들이 대부분이다. S&I클럽은 별도홍보를 하지 않고 입소문을 통해 거액예금자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삼성증권은 S&I클럽 회원들의 자산을 종합관리해주고 있는데 채권으로 운영하는 비중이 높다. 이 회사는 청담동 S&I클럽의 실적을 봐가며 VIP전용 점포를 추가로 개설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증권에 이어 현대증권도 거액자산가들을 위한 별도점포 ‘리치클럽’을 두고 있다. 현대증권 리치클럽은 여의도 63빌딩과 삼성동 무역센터 등 두곳에 개설돼 있다. 이 밖에 동원, 대우 등 여타 증권사들도 VIP고객만을 위한 별도영업점을 차렸거나 차릴 예정이다.

은행, 증권사에 고객들을 많이 빼앗긴 종금사들은 기존 거액예금자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동양종금은 담임선생들을 위한 ‘골드룸’을 설치, 운영중이다. 골드룸을 운영하는 이 회사 PB(프라이빗 뱅킹)팀은 세무나 자산운용 등에 관한 상담 서비스에 주력하고 있다.

우량 고객에 대한 ‘대접’이 외국계 은행에선 더욱 극진하다. 국내 시중은행에 비해 점포 수가 턱없이 부족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거액예치자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 씨티은행은 한달 평균 잔고가 1억원 이상 고객을 ‘골드회원’으로 분류,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 사전예약을 할 경우 전담직원이 모든 일을 처리해주고 서명 등 고객이 직접 해야 하는 일만 남겨두는 등 편의를 제공한다. HSBC는 한달 동안 5천만원 이상 잔고를 유지한 고객들을 ‘금관클럽’ 회원으로 등록해 우대금리 제공, 수표수수료 면제 등 각종 서비스를 주고 있다.

‘잔챙이’ 고객들은 품(관리비)만 들 뿐 수익을 내는 데 별다른 도움이 못된다는 게 금융가의 오래된 정설이다. 이런 정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에는 예금규모별로 고객층을 구분, 차별화하는 전략을 대놓고 하지는 못했다. 금융기관을 마치 공공기관인 양 여기는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거치면서 은행도 망하고 일반 회사와 마찬가지로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일 뿐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굳어진 탓이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VIP고객을 위한 별도창구(또는 지점)를 두는 등 차별화 전략을 써도 용인되는 분위기이다.

거액예금자들이 금융기관의 수익성 개선에 실제 얼마만한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나은행의 예를 들어보자.

하나은행 고객 중 1억원 이상을 예치한 고객은 3만5천∼3만6천명 수준이다. 이 가운데 특별관리를 받는 고객은 2만5천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평균 예치금액은 3억∼4억원 수준이다. 올해 상반기 중 하나은행이 이들 VIP고객의 돈을 관리해주면서 벌어들인 이익(영업이익)은 340억원이었다. 주요 고객을 관리하는 PB센터 직원들이 80명이므로 직원 1인당 영업이익이 4억2500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올 상반기 은행 전체적으로는 영업이익이 2236억원이었다. 6월 말 현재 직원 수(3305명)로 나누면 6765만원이다. 단순비교를 할 경우 PB팀 직원들의 생산성이 직원 전체에 비해 6배를 웃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은행이 관공서는 아니지만…

(사진/은행들의 '귀족마케팅'이 본격화 되고 있다. 신한은행(위)과 하나은행(아래)의 VIP센터)

하나은행 관계자는 이와 관련, “거액예금의 경우 이익금액이 클 뿐 아니라 일상적인 관리비도 상대적으로 적게 들기 때문에 당연히 생산성이 높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한빛은행이 지난해 컨설팅회사 매킨지에 맡겨 분석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매킨지가 98년 실적을 갖고 한빛은행의 고객층을 분석한 결과 여·수신 평잔합이 1억원을 웃도는 부유층은 전체 고객 중 0.1%였으며 이들이 은행 이익에 기여하는 비중은 12.9%에 달했다. 여·수신 평잔합 4천만∼1억원의 고객 비중은 0.4%였으며 이익 기여도는 11.2%였다. 전체 고객 중 6.5%를 차지하는 500만∼4천만원 범위대의 기여도는 70.8%에 이르렀다. 따라서 여·수신 평잔이 500만원을 웃도는 7.0%의 고객이 전체이익의 94.9%를 창출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반면 여·수신을 합해 500만원을 밑도는 고객 93.0%가 은행 이익에 기여한 정도는 5.1%에 불과했다. 특히 여·수신 평잔합이 70만원 미만인 고객 79.7%는 이익 기여도가 마이너스(13.7%)였던 것으로 분석됐다.

한 시중은행의 경우 70억원을 예치한 고객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 고객 한명을 통해 한달에 500만원의 순수익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됐다고 한다.

한빛은행 개인고객본부의 정남진 부본부장은 “은행은 관공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익 기여도에 따라 차별화 전략을 펴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거래 규모에 따라 현격히 다른 서비스를 받는 추세가 더욱 뚜렷해질 것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금융기관도 사기업인 이상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차별화 전략을 나무라기는 어렵다. 은행 등 금융기관이 망가지면 국민세금이나 마찬가지인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수익성 개선은 결국 일반 국민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이런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부가 부를 낳고 고액예금자들이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는 현실 앞에서 일반 고객들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예금 규모별 비중

  은행(개인) 은행(법인) 종금 금고 신협
2천만원 이하 45.8 1.0 1.3 40.1

51.7

5천만원 이하 66.3 2.2 3.5 52.8 92.6
5천만원 초과 33.7 97.8 96.5 47.2 7.4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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