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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하라 일하라…곪아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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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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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노동강도 강화되자 근골격계 질환으로 만신창이가 된 노동자들 급증

최근 자동차 부품공장에 다니는 노동자 김아무개(34)씨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를 찾아왔다. 오른쪽 팔꿈치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주로 오른팔을 이용해 하루 10시간씩 볼트 조이는 일을 7년째 해왔다. 3년 전부터 간간이 통증이 찾아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파스만 붙이고 말았다. 증상이 심할 때는 회사 몰래 병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심해졌고 혹시 직업병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소를 찾았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산업의학전문의)은 “김씨는 오랜 단순 반복작업으로 오른팔을 펴지 못하는 심한 장애을 앓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너무 늦었다. 팔꿈치 통증이 자주 재발하고 팔을 펴지 못하는 장애가 평생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조사 70% 이상 증상 호소

사진/ 근골격계 질환이 제조업을 비롯한 모든 노동현장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작업 중인 현대중공업 노동자.(한겨레 곽윤섭 기자)
김씨한테 붙은 직업병 이름은 ‘근골격계 질환’이다. 이 업무상 질병은 일할 때 각종 물리적 부담과 과도한 단순 반복작업 등으로 인해 목·어깨·팔·허리·손목 등에 손상이 누적되어 나타난다. 쑤시고 결리고 저리고 화끈거리고 마비가 오는 증상이 회복과 악화를 거듭하고, 점차 만성 통증으로 발전한다. 민주노총이 지난 5월 금속·건설·보건·화학섬유 등 80개 사업장 1만600명을 대상으로 근골격계 질환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자의 71.6%(7613명)가 이런 증상을 호소했다. 근골격계 질환이 제조업을 비롯한 모든 노동현장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17%(1879명)는 질환 의심자로 나타났다. “적어도 일주일 이상 또는 과거 1년간 한달에 한번 이상 지속되는 통증이 있으면”(미국국립산업보건연구원·NIOSH 기준) 증상 호소자로, “지속되는 심한 통증으로 당장 정밀검진과 요양치료를 필요로 하면” 질환 의심자로 구분한다.


2000년 이후 전국 각 사업장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자체 실태조사와 검진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재요양을 잇따라 신청하고 있다. 2000년 울산 현대정공 노동자 71명이 근골격계 직업병 집단 요양신청을 한 이후 지난해 3월 근골격계 질환 의심자로 판정된 대우조선 노동자 248명 중 1차로 76명이, 올 초에는 삼호중공업 노동자 35명과 대우종합기계 노동자 27명이 역시 1차로 산재요양을 신청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지난 7월4일 조합원 2490명에 대한 검진 결과 484명이 근골격계 질환자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여기저기서 근골격계 질환 실태가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조선 등 금속사업장뿐 아니라 두부와 콩나물을 생산하는 풀무원에서도 지난 3월 근골격계 집단 요양신청을 냈다. 금속노조연맹 박세민 산업안전국장은 “근골격계 직업병이 한두명이 아니라 공장 대다수 노동자한테 해당되는 질환으로 등장했다. 모든 근골격계 노동자가 요양을 신청하고 공장을 빠져나가면 기업에 타격이 크기 때문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면서 순차적으로 집단 요양신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골격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기는 중소사업장도 마찬가지다. 한국코아 등 포항지역 9개 중소 사업장 근골격계 질환 노동자들은 지난 6월26일 집단 산재요양 신청을 낸 뒤 노동부에 임시건강검진 명령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노동부의 ‘산업재해통계’를 보면 업무상 질병자 중 근골격계 질환자(요통 및 신체부담 작업으로 인한 질환자)는 1999년 190명, 2000년 1009명, 2001년 1598명, 2002년 1827명으로 해마다 폭발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사용자가 쉬쉬하며 은폐하고 있는 것까지 감안하면 근골격계로 고통받는 노동자는 더 많다. 과거의 위험작업 못지않게 근골격계 직업병이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새로운 폭탄으로 등장한 셈이다.

작업장 마다 채찍 휘두르니…

사진/ 4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산업재해 척결 결의대회.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중단과 노동강도 강화 저지를 요구했다.(한겨레 강창광 기자)
근골격계 질환이 사업장마다 이슈로 불거진 이유는 뭘까 물론 근골격계가 갑자기 나타난 괴질이나 유행병은 아니다. 예전에도 근골격계로 고통받는 노동자는 많았다. 다만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죽는 병이 아니라서, 또 내 몸이 남들보다 약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뜸 뜨고 파스 붙이면서 참고 견디다 병을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 사고성 재해가 아니라서 “일하면 당연히 생기는 병” 또는 “나이 들면 생기는 병”으로 여기고 곪아터져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골격계 질환을 흔히 ‘골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나만 속으로 골병 들어 아픈 줄 알았는데 옆 동료도 자신처럼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있는 양상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 소장은 “우리나라 산재 발생률은 유럽을 포함한 선진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 산재 사망률은 외국에 비해 10배가 넘는다. 죽지 않는 한, 산재에 따른 해고 등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노동자 스스로 크고 작은 산재를 신고하지 않거나 회사쪽과 적당히 합의해 처리해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근골격계 질환 급증은 외환위기 이후의 노동과정 변화와 직접 맞물려 있다. 작업장마다 생산성 목표를 높여 잡은 뒤 성과급이란 유인을 던지며 노동자들을 다그치고, 생산방식을 바꿔 인력을 대폭 감축한 뒤 남은 사람들한테 똑같은 일감을 감당하라고 요구했다. 또 경제가 어렵고 회사가 어려우니 생산량을 대폭 늘려야 한다며 작업현장을 통제하고, 성과 현황판을 설치해 팀제 아래 치열한 경쟁을 유도했다. 집단성과급제·연봉제·팀별평가보상제 등 임금 유연화를 기초로 노동자들간 개별 경쟁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런 인력 감축, 노동시간 증가, 작업량 증가, 임금체계는 노동강도 강화를 낳았고, 몇년 뒤 거울 앞에 선 노동자의 몸은 아프고 쑤시고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고용불안은 노동강도 강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노동자 스스로 “노조도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못하는데 있을 때 잔업·철야를 조금이라도 더 해서 벌어먹어야 한다”고 얘기할 정도다. 과거의 병영적인 직접 통제가 아닌 새로운 노동규율이 나타난 것인데,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개인한테 떨어지고 통제가 ‘팀’ 속으로 나아가 개별 노동자들의 머리와 가슴속까지 들어간다. 노동자 스스로 ‘끝없는 노동’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쪽은 “생산량이 떨어지면 생산라인을 폐쇄하겠다”는 등 노골적 위협을 가하고, 신분이 불안정한 하청 노동자들한테 더 많이 일하도록 종용한다. 그래서 하청 노동자의 생산량이 늘어나면 정규직한테도 “하청 노동자에 비해 너무 조금 일하지 않느냐”며 또다시 노동강도 강화를 요구한다.

“질환자가 너무 많아 인정할 수 없다”

사진/ 금속노조 중앙교섭 회의장. 근골격계 질환 산재 처리가 주요 안건으로 논의되고 있다.(김진수 기자)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회사는 살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골병 들고 있다. 자동자 부품업체인 두원정공은 원청인 기아차 부도 이후 회사가 망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해 전체 직원의 35%가 회사를 떠났다. 그 뒤 회사는 살아났고 매출은 97년 수준으로 회복됐다. 그러나 두원정공 노동자 22명은 올 초 근골격계 집단 요양신청을 내야 했다. 두원정공노조는 “부족한 인원을 대체하려고 회사가 끊임없이 공정을 줄이고 노동강도를 강화해 조합원들의 몸을 혹사시킨 것이 직업병의 주범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인원이 줄어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이 일하며 참았는데 돌아온 것은 직업병에 시달리는 몸뿐이었다. 지난달 근골격계 질환자 30명이 요양신청을 낸 쌍용자동차노조 창원지부도 마찬가지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으로 언제 회사가 문닫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주야 맞교대로 죽어라고 일만 했다. 1인당 생산대수는 98년 69.4대에서 2002년 248.6대로 급격히 늘었다. 그만큼 작업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용차 노동자 3232명 중 359명이 근골격계 요양치료를 받아야 한다. 359명의 평균 나이는 35.5살, 평균 근속연수는 12년6개월이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기계도 오래 쓰면 망가지는데 몸도 사용하다보면 퇴화되게 마련”이라며 작업과 무관한 개인 질병 또는 꾀병으로 보거나 “질환자가 너무 많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대기업은 작업장 안에 있는 산업보건센터를 통해 ‘취업 중 치료’로, 중소기업들은 물리치료기 구입으로 때우려고 시도하고 있다. 금속노조연맹은 “일터가 희망의 장소라기보다 고용불안 속에 병든 몸을 더 혹사시켜야 하는 고통스런 병동처럼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꼭 ‘건강한 노동’을 말하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이 병들고 피폐해지면 생산도 멈추고 자연히 이윤도 창출할 수 없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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