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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의사봉보다 기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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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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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근본 취지에 맞는 제도로 발전시켜야

서구에서는 대통령 선거 때 최저임금 인상이 주요 공약으로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명확한 개념조차 없다. 최저임금에 대한 최저임금위원회(이하 최임위)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참고자료를 보자. 최임위가 최근 내놓은 <최저임금 특성별 예상분석>에는 최저임금 55만원·60만원·65만원대일 때의 영향률 및 최근 3년·5년·10년간의 최저임금 평균 인상률이 자세하게 분석돼 있다. 역시 최임위가 펴낸 <최저임금 국제비교>라는 자료에는 국민소득 수준별, 주요 국가별 최저임금이 달러로 각각 환산돼 있다. 이는 최임위가 △인상률 △영향률 △국제비교라는 잣대에 갇혀 있을 뿐 현행 최저임금이 실제 노동자들의 생계비에 얼마나 턱없이 모자라는지, 그런 비참한 노동이 사회적 통합을 얼마나 해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소홀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저임금은 ‘비교’의 대상 아니다

사진/ 6월20일 열린 민주노총 정책토론회. 민주노총은 최근 최저임금의 사회적 기준 마련을 최임위에 요구했다.(박승화 기자)
최저임금은 근본 취지에 비춰볼 때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임금으로, ‘상대적(혹은 절대적) 빈곤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계는 “최임위가 최저임금으로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어느 정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없이 무책임하게 운영된 결과 노동빈곤층이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 김태연 정책기획실장(최임위 노동자위원)은 최근 최저임금의 사회적 기준 마련을 최임위에 요구했다. ‘5인 이상 사업체 전체 노동자 임금의 50% 수준’으로 최저임금의 선을 정해놓자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장기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인 전체 노동자 중간수준 임금의 3분의 2가 돼야 하는데, 임금 격차가 너무 큰 현실을 감안해 우선 5인 이상 상용(풀타임)노동자 평균임금의 절반 수준을 확보하자는 주장이다. 당장 어렵다면 몇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노총이 애초에 올해 최저임금으로 요구한 최저임금(시간급 3100원·월급 70만600원)은 이런 기준에 따라 산출된 것이다.


양대노총은 “생계비 확보 및 노동자간 임금차별 해소라는 최저임금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도 명확한 사회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익위원들이 별도로 낸 조정안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노·사위원들이 번갈아가며 집단퇴장하는 일이 과거에 빚어졌는데, 이런 사태를 없애기 위해서도 최저임금의 사회적 수준을 미리 못박아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임위 김동회 상임위원은 “사회적 기준은 하나의 정책인데, 최임위는 순수하게 최저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곳이지 정책을 제시하는 곳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최저임금의 사회적 기준이 정해진다면 최임위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게 된다.

생계비 기준이 18살 단신노동자?

그러나 최저임금의 절대적 수준을 노·사·정 합의로 도출하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생계비 기준을 둘러싼 오랜 논란조차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태다. 노동계는, 최임위가 생계비 산출 기준을 ‘18살 단신노동자’로 삼고 있는 데 줄곧 이의를 제기해왔다. 최저임금이 18살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닌데 뚜렷한 근거도 없이 최임위가 18살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29살 이하 단신가구의 실태생계비로 바꾸라는 게 노동계의 요구다. 올해 최저임금 심의를 위해 제출한 생계비를 보면 한국노동연구원은 월 57만9793원, 최임위 사무국은 월 62만4819원인 반면 민주노총은 126만4731원, 한국노총은 132만1863원으로 큰 격차를 보인다. 양대노총은 1인가구 표준생계비로 따졌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18살 노동자 모형은 1988년 최저임금 도입 당시 한국개발연구원에서 만든 것으로, 고교 졸업 뒤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사람이 많았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직장 초년생이 대졸자 중심으로 바뀐 지는 이미 오래다. 최임위가 현실을 외면한 채 18살 기준을 여전히 고집하는 데는 낮은 최저임금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계 안에서는 “허탈하다. 최임위에서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급 0000원으로 의결한다’고 의사봉 3번 두드리면 그것으로 끝이다”는 자조 섞인 말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저임금 노동자들은 변변한 노동조합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양대노총은 이런 현실을 감안해 최저임금의 사회적 기준 도입을 노동계의 이슈로 본격 제기할 방침이다. “최저임금제 자체가 본래 소득분배를 위해 국가가 시장임금에 개입하는 대표적인 제도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활안정 도모가 노동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고 한국사회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길이다.” 이것이 생활임금 보장의 논리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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