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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뭐래도 노사 자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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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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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주 청와대 노동개혁팀장…보수언론의 집중포화 받아도 노동개혁 방향은 견지해나갈 것

화물연대 파업, 전교조와 교육부의 대립, 공무원노조의 노동3권 인정 요구, 지하철노조를 비롯한 궤도노조의 6월 파업 방침…. 참여정부 출범 이후 곳곳에서 노동쟁의가 한꺼번에 터지고 있다. 이른바 ‘노동 시즌’이라고 불릴 정도다. 과거 노동쟁의는 대부분 극한대립 끝에 노정간 정면충돌로 이어졌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태가 해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과 사용자쪽은 이를 두고 “집단이기주의의 분출” 또는 “힘의 논리에 굴복한 정부”라고 신랄히 비난하고 있다. 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과연 재계와 보수언론이 뭇매를 때리듯 ‘노조편향적’인가?

사진/ “공권력 투입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사관계의 제도화를 강조하는 박태주 팀장.(박승화 기자)
<한겨레21>은 5월30일 박태주 청와대 노동개혁태스크포스팀장을 만나 보수언론의 집중포화 앞에 벌써부터 시험대에 올라선 참여정부의 노동개혁 방향을 들어봤다. 박 팀장은 “국가 개입을 통한 노사갈등의 사전적 봉합·축소는 노무현 정부 노동정책의 목표가 결코 아니다”라며 “파업을 벌이더라도 노조의 ‘합리적’ 요구는 과감히 수용하는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노동개혁은 노사관계 제도화를 통해 사회세력간 힘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사관계학 박사인 박 팀장은 지난해 대선 때부터 노무현 캠프의 노동정책 수립에 실무적으로 깊숙이 관여해왔다.

오히려 노동계가 자제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이 친노동자적이라는 지적이 계속 일고 있는데.

=공권력이 무력화됐다느니 ‘노조 퍼주기’니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바뀐 건 전혀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수언론으로부터 공격당하면서 우리는 지금 맷집으로 버티고 있다. 앞으로도 노동개혁정책은 안 바뀔 것이다. 여기서 한 발짝만 물러서도 옛날로 되돌아가는 꼴이 돼버린다. 화물연대파업·전교조 및 공무원노조 문제 등이 터졌지만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빚어진 것도 아니고, 재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위기는 아니다.

-노사갈등이 한꺼번에 터지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단기적으로 노사갈등이 증가하는 건 불가피하다. 역대정권이 노동에 대해 권위주의적이었다면 현 정부는 탈권위, 민주적 참여를 표방한다. 이런 전환기에서 노사갈등이 늘어나는 건 어쩌면 불가피하다. 현 정부는 노사문제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자율적 해결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노사 모두에게 아직은 크게 취약하고, 노사간 극한대립과 대결구도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왔다. 이런 현실이 지금의 과도기에서 노사갈등 증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진/ 노무현 정부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지향한다. 노사정위원회 회의 장면(맨위,청와대사진기자단). 5월1일 노동절 집회. 노동자들의 행동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해야 하는가.(김진수 기자)
-일부 언론에서는 정권 초기 집단이기주의의 분출을 정부가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노동자들이 이익표출은 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다. 이익갈등이 ‘분출’하는 단계는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노동계가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현 정부의 각종 개혁이 좌초돼서는 안 된다는 노동계의 전략적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전교조와 화물연대가 극단적인 행동을 상당히 자제하지 않았는가. 극한대립이 자칫 개혁의 기회를 놓치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어서 다행히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다.

-재계는 정부가 집단이기주의에 밀리고 있다고 하고, 노동계는 재계의 공세에 밀려 벌써 개혁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지향한다. 노사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와 타협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다. 대화와 타협의 기반이 되는 제도적 채널이 갖춰지지 못하면 사회통합은커녕 사회적 균열만 가속화될 것이다. 특히 산업현장의 노사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개입을 최소화하고 노사간 자율해결 원칙을 고수할 것이다. 물론 공권력 투입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역대정권 모두 노사갈등 최소화와 산업평화 정착을 내걸었는데, 현 정부는 바뀐 것인가.

=물론 노사분규나 구속노동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갈등해소· 축소가 노무현 정부 노동정책의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갈등을 관리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목표다. 갈등 자체를 사전적으로 봉합하지는 않겠다는 뜻인데, 바꿔 말하면 노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갈 것이란 얘기다.

-법과 원칙보다는 노사자율에 맡긴다는 뜻인가.

=법과 원칙, 그리고 노사간 자율적 해결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떠한 노사갈등이 터져도 정부는 원칙을 갖고 대응할 것이다. 노조가 벼랑끝 전술을 펴면서 파업을 벌이더라도 합리적 요구는 과감히 수용하겠지만 과도하고 불합리한 요구는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다. 이것이 원칙이다. 노사관계에서 국가는 입법자로서, 또 경제정책을 펴면서 집단적인 게임의 룰을 만들고 이익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자율해결을 원칙으로 하되 정부의 개입이 필요할 경우에는 공공이익이란 원칙에 입각해 규제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사용자들은 법과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경총 등에서 ‘불법파업에 대해 정부는 뭐하고 있냐’고 말하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사용자 스스로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책임 아래 합리적인 노사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힘 있는 대기업 노조에 밀리고 있다’면서 정부가 나서 직접 규제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런 일이 생기면 사용자들끼리 뭉쳐서 공동 대처해야할 것 아닌가. 왜 정부에 요청하나? 그렇게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사용자들이 연대해야 산별교섭도 정착될 수 있다.

-아직 노동계는 노정 직접교섭을, 사용자도 공권력 의존경향을 벗지 못하고 있는데 자율교섭이 되겠나.

=갈등을 자율적으로 해결하되 노사 주체들이 책임을 지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동안 정부 의존적인 노사갈등 해소 과정에서 노사갈등이 모두 노정갈등으로 바뀌었다. 국가개입이 줄어들면 노사갈등이 빈번해지고 장기화될 수 있지만, 예전처럼 정부가 계속 개입하게 되면 노사간의 타협과 양보문화는 절대 형성될 수 없다.

하층노동자의 이익을 보장해야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최근 대형사업장 노조의 권익을 국제적 기준에 맞게 낮추겠다고 했는데.

=한국의 조직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12%(노조조직률)에 불과한데도 현재의 노조는 대공장·정규직 중심의 이익만 주로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시장에서 노동자연대와 동질성, 이른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기도 힘들다. 반면 비정규·하청·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조합으로부터도, 또 정부로부터도 소외돼왔다. 부총리의 말에 뭐라고 언급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노동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란 무엇인가.

=국제노동기구(ILO)협약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권고, 나아가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관행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누려온 과도한 권한들도 이런 관점에서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유연한 상태인데, 이런 시장의 반대쪽에 대기업의 경직된 내부노동시장(상대적으로 고임금 및 일정한 고용안정이 보장된 폐쇄된 노동시장)이 있다. 내부 전환배치 허용 등 고용안정이 보장된 이른바 ‘규제된 유연성’은 대기업에서도 필요하다.

-현 정부 노동정책의 목표가 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인가.

=지금의 노동계를 보면 이익표출이 불균형적이다. 일정하게 막강한 권력자원을 가진 대기업노조,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화물연대 같은 노조는 집단행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노동시장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세·비정규직은 자신들의 이익을 집단적으로 표출할 조직도 갖고 있지 못하다. 힘 없는 집단이 소외되면서 또 다른 차원의 사회적 균열이 가속화하고 있는 구조다. 하층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수준도 낮을 뿐 아니라 교육·건강·환경권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주류에서 밀려난 하층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그들의 이익을 국가가 보장해나갈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사회적 주류로 올라서게 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통합이다.

-곧 발족시키기로 한 노사관계발전추진위원회(노발추)는 YS시절의 노개위와 비슷한 성격인가?

=노개위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노동개혁과제를 총체적이고 일괄적으로 다루면서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구성하는 게 노발추다. 노조와 사용자에게 줄 것은 각각 주면서 노동개혁의 큰 밑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노동개혁은 노사관계 제도화를 통해 사회세력간 힘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원칙에 따라 일관된 노동정책을 집행하지 못하면 노동개혁이 초기부터 좌초할 수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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