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통화정책 신뢰 잃고 박승 총재의 돌출발언만 난무…정치권과 정부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 아닌가
“학생들의 잠재력은 비슷한데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계발이 되고 안 되고 차이가 난다. 이 학교 1등이나 저 학교 1등이 모두 비슷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내신제를 해야 한다.”
교육부 장관의 발언이 아니다. 한국은행 박승 총재가 5월29일 대한상의 주최 조찬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박 총재는 지난해 ‘강북개발론’을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이번에 ‘내신제’를 거론한 배경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동산 가격 급등 때문이다. 그는 부동산 가격 급등 문제를 지금도 교육 인프라가 잘 구축된 지역에 주택수요가 너무 몰리기 때문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니 강남을 대신해 강북을 개발하고, 내신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해 특정 학군에 대한 선호를 없애라고 강조할 만도 하다.
금리 인상 시사만 하는 ‘양치기 소년’
총재 취임 이후 박 총재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부동산가격 급등 문제였다. 박 총재는 이날도 “부동산 투기처럼 국가에 해를 끼치는 정신을 철폐해야 나라가 바로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수장이 부동산 투기에 대해 도덕적 설교를 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통화정책 결정이라는 막강할 권한을 가진 기관의 수장으로서 그는 그동안 도대체 뭘 했느냐는 것이다.
지난해 4월1일 취임식을 마친 박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재테크 수단으로서 부동산 시대는 갔다. 이젠 금융자산 시대다”라며 기자들에게도 “부동산에 투자하면 손해보니 투자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믿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한은 총재 취임과 함께 보유하고 있던 수십억원어치의 주식을 정리했지만, 그 돈을 모두 간접주식투자에 쏟아부었다. 그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허름한 단독주택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을 정도로 집에 관한 한 ‘욕심’ 없는 사람이다.
당시 부동산 가격 급등에 대해 박 총재는 “내수 주도적인 경기회복 국면의 일시적인 마찰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통화정책 결정 과정에서 큰 비중을 두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5월 금융통화위원회가 콜금리를 0.25%포인트 올린 것도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급등을 사전 억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올랐다. 그는 지난해 8월27일 “부동산값 상승세가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이며, 심지어 토지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우려된다. 부동산 버블 가능성을 심각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은행 총재로서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는 “부동산 인플레를 막으려는 정부 대책이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한은도 협조할 것”이라며, 금리 인상을 통한 대응에 나설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금통위는 더 이상 금리에 손대지 않았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효과를 검증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부동산 가격은 계속 급등했다. 그러자 그는 9월14일 라디오 방송에 출현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른바 ‘강북개발론’이다.
9월 들어 박 총재 주재로 열린 금융협의회에서는 은행장들마저 금리인상 필요성을 제기했다. 시중에 너무 많은 돈이 풀려 부동산 값이 뛰고, 가계대출이 지나치게 늘어 부실화를 우려할 만한 단계라는 지적이었다. 10월12일 박 총재는 다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최근 증시상황에 상당히 실망했고, 납득이 안 된다. 이론적으로 보면 대활황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을 사지 말고 주식을 사라는 대국민 충고였다. 금리인상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박 총재를 향해 ‘양치기 소년’이라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12월 초에도 “내년에는 주가 상승률이 부동산 값 상승률보다 높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5.7%로 예상하기도 했다. 국책연구원과 민간연구원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였다.
금리 인하와 부동산 투기는 무관하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위기감, 북핵 문제까지 겹치면서 연말부터 경기는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다. 올들어 재계를 중심으로 ‘금리 인하론’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박 총재는 이제 금리 인하 요구를 억제하는 것이 더 고민거리가 됐다. 이라크 전쟁이 조기에 끝날 것으로 보이던 올해 4월에 그는 “경기가 밑바닥에 다다랐다. 하반기가 되면 우리 경제가 활발하게 풀려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금리인하론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 금리를 내려도 기업들이 이미 자금이 많기 때문에 설비투자를 늘리는 효과는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쪽의 물밑 금리인하 요구는 거세졌다. 박 총재의 목소리도 급선회를 시작했다. 4월29일 청와대를 방문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는 ‘정부와 한은은 생각이 같다’고 선언했고, 금통위는 5월13일 마침내 콜금리 목표치를 0.25%포인트 내리기로 결정했다. 박 총재는 “북핵문제 및 사스의 영향으로 경기회복 기조가 불투명할 것으로 예상돼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고려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경제성장률이 1% 떨어지면 10만명분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고용대란이 우려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새 발언을 어록에 보탰다. “내가 사는 은평구의 단독주택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값 차이가 없다.” 그는 부동산 투기는 특정지역과 특정 계층의 부분적인 현상이라는 취임 초기의 시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금통위의 금리인하 결정 이후 우려했던 일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용수철처럼 튈 준비를 하고 있던 부동산값이 또다시 급등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포스코건설이 분양한 서울 광진구의 주상복합 오피스텔 스타시티에는 청약자만 9만4천여명, 청약증거금만 2조7천억원이 몰려들 정도였다.
추가 금리 인하 시사하기도
금리인하 뒤 부동산값 급등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박 총재는 새로운 논리를 내놓았다. “금리 인하와 부동산 투기는 무관하며, 부동산 가격 상승이 그리 심각한 정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5월2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 참가한 뒤 몰려든 기자들에게 “일본의 부동산 거품 형성기에는 가격이 4배나 올랐지만, 우리나라는 많은 곳이 16%에 불과하다. 거품은 분명히 꺼지겠지만 이로 인한 충격도 ‘약간 아픈’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경기전망의 심각성을 내세우며 추가 금리 인하를 시사하기도 했다. ‘내신제’ 발언을 한 29일 대한상의 간담회에서 그는 “우리 경제가 올해 4% 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성장률이 4%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염려되면 금리를 더 내릴 수도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한은은 지금 어떤 통화정책을 펴야 하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부동산 버블이 커질수록 그 충격은 커진다. 그렇다고 해서 부동산값만을 보고 금리 결정을 하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통화정책이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박 총재를 향한 비판의 초점은 정작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못하고 금리 인하의 효과가 의심스러운 지금 과감하게 금리를 인하한 것이 모두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데 있다. 이를 변명하려다 보니 박 총재의 돌출발언만 계속되고 있다. 금융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금통위 일부 위원들이 정부 눈치만 보는 것도 통화정책이 제구실을 못하는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제도적으로는 독립성을 거의 보장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치권과 정부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만 하는 한은과 금통위를, 국민들은 지금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한국은행 신관 로비에 걸려 있는 한글 휘호. 최근 한은의 통화정책이 신뢰를 잃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한겨레 윤운식 기자)

사진/ 5월13일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갖고 금리인하 결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부동산 값이 또다시 급등세를 보인다.(한겨레 김경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