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에게 경영권 돌려주고 그 대가로 계열사를 통해 훨씬 많은 돈을 받아내려는 ‘도박’
대규모 분식회계가 발각된 SK글로벌에 대한 회계법인의 실사결과가 나왔다. 삼일회계법인은 지난 5월19일 SK글로벌의 자본잠식 규모가 4조3874억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보유자산을 모두 팔아도 자본잠식 규모만큼의 빚은 갚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SK글로벌에 돈을 빌려준 은행이나, SK글로벌이 발행한 회사채를 산 투자자는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게 됐다. 자본금도 완전감자될 것이 거의 확실해 SK글로벌 주주들이 보유한 주식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2천원을 넘는 SK글로벌 주가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것이 주식시장만은 아니다. SK글로벌을 처리하는 채권단의 움직임도 비정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청산보다 존속에 무게 둬
SK글로벌은 현재 기업구조조정촉진법 적용대상 기업으로 채무가 동결된 상태에서 채권단이 관리하고 있다. 채권단이 SK글로벌을 청산하는 쪽을 택할지, 아니면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을 존속시킬지는 청산가치와 존속가치를 비교해 결정하게 된다. 존속가치가 높다면 일단 회사를 굴러가도록 만든 뒤, 빚을 천천히 회수함으로써 청산시 35%에 불과한 회수율을 좀더 높일 수 있다.
삼일회계법인은 실사결과 발표에서 청산가치가 마이너스 5조9188억원으로, 당장 청산하면 채권자들의 손실은 더욱 커질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은 SK글로벌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SK그룹과 관련을 맺고 계열사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전제 아래 이뤄진 것이다. 만약 계열사들의 도움이 없다면, 존속가치는 청산가치보다 현저히 낮아질 수 있다. SK글로벌의 매출액 중 계열사 비중은 무려 70%에 이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채권단이 SK글로벌을 존속시키기 위해 SK(주) 등 그룹쪽에 요구한 지원 내용이 이런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속셈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채권단은 5월22일 채권은행장 회의를 열어 이미 알려졌던 요구사항을 확정했다. SK(주)에 1조5천억원의 매출채권을 출자전환하도록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SK(주)가 출자전환을 하면, 채권단은 앞으로 SK글로벌이 원리금을 상환할 수 있는 수준에서 2조~3조원가량의 채권을 출자전환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물론 일부 채권은행장은 청산가치가 애초 예상보다 높게 나왔다며 청산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출자전환을 했다가 오히려 손실이 더 커질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채권단은 SK글로벌에 대한 출자전환 등 지원에 반대하는 채권자들로부터 SK글로벌의 채권을 사들일 방침이어서, SK글로벌의 존속쪽에 확실히 무게를 실어놓았다.
채권단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채권단이 최태원 SK그룹 회장한테서 담보로 잡은 최 회장 보유 주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채권단은 SK글로벌 사태가 터지자 최 회장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을 모두 넘겨받고 처분에 대한 백지위임각서를 받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은행들이 과거 SK글로벌에 돈을 빌려주면서 관례적으로 그룹 오너의 인보증 서명을 받았는데 그 규모가 1조2천억원가량 된다. 이 때문에 최 회장은 채권단이 빌려준 돈을 다 회수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담보로 그룹 경영권 전부가 걸린 보유주식을 채권단에 맡긴 것이다.
최 회장의 지분 왜 그냥 두나
대규모 자본잠식이 확인된 상황에서 채권단이 빚 회수율을 높이려면 최 회장한테서 넘겨받은 주식을 먼저 채권단의 소유로 만드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그러나 채권단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최 회장 지분은 채권단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지분에 대해 처분위임각서를 받은 것은 돈의 문제라기보다는 대주주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최 회장의 지분’이 요긴하게 활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최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되돌려주면서, 그 대가로 계열사를 통해 훨씬 많은 돈을 받아내자는 계산이다. SK(주)에 대규모 출자전환과 그룹 계열사 차원의 지원계획을 요구하는 것이다. 채권단은 법원에 최 회장의 보석을 허가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일찌감치 그런 의도를 내비쳐왔다. 채권단이 SK(주)에 출자전환을 요구하는 논리는 대주주로서 경영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영책임이라면 실제 경영권을 행사한 최태원 회장쪽에 있을 뿐, SK(주)의 주주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SK(주)는 일단 채권단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주들의 이익에 반할 뿐 아니라, 매출채권의 대부분을 출자전환할 경우 사업운영상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올 들어 14.9%의 지분을 확보한 소버린자산운용의 존재는 SK가 채권단의 요구에 대항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SK(주)에 여신한도를 축소하는 등 자금압박을 가하는 채권단에 대항해 SK(주)는 제2금융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SK(주)의 태도가 ‘순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SK(주)도 규모는 줄이되 출자전환은 하겠다는 태도이고, 다른 계열사들의 영업 몰아주기를 통해 SK글로벌의 현금창출 규모를 늘려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태원 회장의 지분이 채권단 손에 넘어가 경영권을 박탈당할 위험이 커지면 SK(주)도 지원을 통해 SK글로벌을 살리자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채권단에 저항하는 것이 부실기업 처리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누가 손실을 더 떠안을 것인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노조는 SK글로벌 지원 반대
안팎의 걱정은 최태원 회장의 그룹 경영권을 지켜주기 위한 이런 움직임이 SK의 우량 계열사와 국가경제에 더 큰 위험을 자초하는 것 아니냐 하는 점이다. 단체협약을 놓고 회사쪽과 대립하고 있는 SK(주) 노조는 5월23일 서울 본사 앞에서 SK글로벌 지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조는 경영진이 계열사를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이 잠식당하고 있고, 단기간에 부채비율이 1.5배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영업이익이 증가하는데도 부채총액은 늘어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는 “SK글로벌 채권단의 요구대로 7년간 계열사 지원을 하게 되면 SK(주)는 7년이 되기도 전에 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K글로벌이 청산될 경우 채권단의 손실은 당장 현실화된다. 매출채권을 갖고 있는 SK(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SK글로벌을 존속시키는 것이 청산하는 쪽보다 채권자들에게 더 유리한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태원 회장의 그룹 경영권 유지와 이를 위해 SK글로벌을 존속시킨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SK(주)와 채권단 사이의 논쟁은 도박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만약 SK글로벌의 부실이 다른 계열사들로 ‘전염’된다면, 그것은 SK그룹의 경영권이 불분명해짐으로써 생길 혼란보다 훨씬 큰 타격을 우리 경제에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5월19일 서울 하나은행 본점에서 열린 SK글로벌 채권단 회의. 채권단 대표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실사 결과를 보고 받고 있다.(한겨레 임종진 기자)

사진/ 지난 3월31일 SK(주) 최태원 회장이 첫번째 재판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로 들어서고 있다.(한겨레 이종근 기자)

사진/ “계열사 지원을 하게 되면 SK(주)는 7년이 되기도 전에 망할 수 있다” 지난 5월23일 SK(주) 노조의 시위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