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을 둘러싼 참여연대와 대안연대의 논쟁… 강도 높은 재벌개혁 vs 민족적 소유·통제
“내부 문제는 안 보고 정부 탓만 하는 재벌과, 국내 문제는 안 보고 외국자본 탓을 하는 극좌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장하성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장)
“자유시장파 진보세력은 한국 경제를 송두리째 장악해 속국 경제로 만들고자 하는 월스트리트에게 고스란히 이용당하고 있다.”(정승일 대안연대 정책위원)
SK그룹 사태를 계기로 개혁·진보 세력 사이에 재벌개혁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훗날 우리 경제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그간 미적거려온 재벌개혁을 지금이라도 더욱 강도 높게 밀고 가야 하는가(참여연대), 아니면 재벌개혁의 속도를 늦추더라도 ‘세계화의 덫’에 대한 안전장치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가(대안연대) 하는 점이다.
영미식이냐 유럽식이냐
논쟁은 대안연대 정책위원인 이찬근 인천대 교수가 크레스트증권의 SK(주) 주식 매집을 계기로 지난 4월25일 <동아일보> 칼럼을 통해 ‘자본의 국적’ 문제를 거론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초국적 투기자본을 상대로는 기업의 사명을 왈가왈부할 여지조차 없다”며 “소유지배구조를 투명화·건전화하되 어떻게 기업의 지배권을 안정시킬 것인가라는 관점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기업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면 외국자본과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는 참여연대의 시각을 정면으로 공박한 것이었다. 이후 한동안 몇몇 인사들의 언론기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벌어지던 논쟁은 정승일 위원이 월간 <말>(5월호) 기고를 통해, 장하성 위원장이 <참여사회>와 인터뷰를 통해 각각 상대편을 정면 비판하면서 극심한 대립으로 비화됐다.
참여연대와 대안연대간 시각차는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그동안 참여연대는 소액주주운동을 중심으로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런 움직임은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려 지배구조에 문제가 큰 재벌체제를 개혁해나가는 것으로, 김대중 정부가 표방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논리와 큰 줄기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반면, 지난 2001년 4월 출범한 대안연대는 유럽식 이해관계자 중심 자본주의를 개혁모델로 삼아온 학자 및 현장활동가들의 연대모임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신자유주의’라며 거세게 비판해왔다.
재벌 지배권 강화로 투자 촉진?
지난 3월14일 대안연대 주최로 열린 ‘산업정책 어디로 가야 하나?’란 토론회에서 정승일 정책위원이 주제발표한 ‘주주중심 자본주의 비판과 재벌개혁의 대안’은 대안연대의 시각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정 위원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주주중심 자본주의 이념으로, 미국 재무부가 주도해 개발도상국에 요구하는 월가의 논리라고 못박는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소액주주의 권리 강화, 공시제도 개혁, 그리고 노무현 정부 들어 가속화되고 있는 연기금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촉구, 집단소송제,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강화 등을 주주자본주의 강화를 겨냥한 것으로 본다.
대안연대는 이런 주주중심 이데올로기가 이미 여론을 장악했으며, 재벌들도 상당부분 적응했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그것이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주주들은 단기이익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기업이 수익성이 검증되지 않은 신규투자에 나설 때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재벌의 기업 지배권을 약화시킴에 따라 재벌들은 투자보다는 지배권을 유지하고 확보하는 데 최우선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찬근 교수는 “기업경쟁력, 산업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높이려면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데 (80년대 이후 주주자본주의를 강력히 추동한 미국은) 내부유보-재투자의 메커니즘이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의 대기업들은 주주가치는 높이고 있을지 몰라도, 기업가치의 장기적 향상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안연대가 ‘재벌해체론’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참여연대는 재벌은 궁극적으로 해체되고 계열사별로 투명한 경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대안연대는 재벌해체를 목표로 하는 정책이 국내 산업의 발전보다는 재무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외국자본의 손에 우량기업들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더욱 가속화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찬근 교수는 5월7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재벌은 사유재산임과 동시에 국민적 사회적 자산이기도 하다. 단지 주주의 것, 혹은 소액주주의 것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다. 현행 재벌개혁 방식을 일거에 추진할 경우 모든 재벌이 월가에 바겐세일되고 마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안연대가 제시하는 ‘대안’은 재벌을 해체하기보다는 민족적 소유-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재벌총수의 대주주 역할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수단은 ‘지주회사’다. 당장 수년 안에 재벌해체를 달성할 수 없다면, 재벌그룹의 기업지배권을 안정시켜줘 기업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게 하자는 얘기다. 이를 위해 재벌의 지주회사 설립요건을 완화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대안연대는 강조한다. 결론만 보면, 이는 그동안 재벌들이 강조했던 논리와 비슷하다.
대안연대는 그 대신 유럽 국가들처럼 주식시장이 아니라 은행에 기업 감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맡기자고 제안한다. 은행이 기업의 소유와 지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으로 제도를 정비하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시스템이 정착될 때까지는 국유화된 은행을 정부 소유로 유지하고, 민간은행에 대해서도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흥은행의 매각을 대안연대가 강력히 반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대안연대가 제시하는 이런 ‘대안’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우선 기업들의 신규투자가 부진한 원인 중 하나가 주주중심주의로의 전환과 관련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SK텔레콤이 올해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가 주식시장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투자규모를 축소하기로 한 것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기업경영이 주식시장의 영향을 덜 받던 시절 재벌들이 경쟁적으로 과잉투자에 나서고 그것이 외환위기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투자 그 자체보다는 효율적인 투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내외의 불확실한 경제상황, 부실기업 정리의 미흡 등도 기업투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원인인데, 이런 요인을 배제하고 기업의 투자부진을 주주자본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지나치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국인들이 국내 우량기업의 주식을 대거 매입함에 따라, 정부 정책이 이들 외국자본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해 은행에 기업의 소유와 지배를 상당부분 맡기고, 정부가 개입하는 방안이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부패한 정치권과 관료, 이들에 종속돼 있던 은행이 외환위기의 빌미를 제공한 사실을 국민은 또렷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된 역할을 하리라고 사실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구체적 분석 바탕으로 논의해야
모든 제도는 그 나라 나름의 역사적 경험과 고민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제도들을 놓고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딱 잘라 평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영·미식 자본주의보다는 유럽식 자본주의를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한 정부 관계자는 “대안이라고 해도 검증되지는 않은 것이다. 추상적인 이념논쟁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바탕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주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대립시켜 어느 한쪽만을 이상적 모델로 볼 필요가 있느냐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논쟁이 발전적 결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밑바탕에 깔린 견해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정 위원은 “정부뿐 아니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한겨레> 등 진보언론도 ‘월가와 기이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해관계자 중심 자본주의가 어떻게 민족주의와 연결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초국적자본 문제를 빌미로 재벌개혁을 약화시키자는 주장이야말로 재벌개혁 과정에서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재벌노조의 입장에서만 현실을 본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이런 시각차는 SK글로벌 등 부실 대기업 처리를 둘러싸고, 앞으로도 첨예한 논쟁의 소지를 남기고 있다. 대안연대쪽의 토론제의에 대해 참여연대 관계자는 “지금 논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서로에게 득이 될 게 없다. 논쟁을 벌일수록 재벌들에게나 도움을 주게 된다”며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노무현 정부의 개혁과제’ 연속토론회 중 재벌개혁 토론회. 대안연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월가의 논리라고 못박는다.(한겨레 이정용 기자)

사진/ 대안연대 정승일 정책위원의 월간 <말> 기고(왼쪽)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장하성 운영위원장의 <참여사회> 인터뷰. 재벌개혁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사진/ 3월19일 SK글로벌 채권단 전체회의에 참석한 금융기관 대표들이 굳은 표정으로 채권단 공동관리체제 등 SK글로벌 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김진수 기자)

사진/ 3월13일 SK글로벌 정기주주총회 모습. 참여연대는 소액주주운동을 중심으로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춰왔다.(한겨레 김경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