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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산별교섭 시대 ‘성큼성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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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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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기업 "산별노조 못이긴다" 속속 중앙교섭 테이블로…사용자단체 구성 등 숙제도 산적

지난 5월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9층 회의실. 전국금속노조 교섭대표단(교섭위원 18명)과 96개 금속사업장의 사용자쪽 교섭대표단(교섭위원 15명)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 이 자리는 역사적인 의미가 큽니다. 그동안 기업별 교섭체제에서 노사간에 수많은 마찰과 갈등, 그리고 노동조합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번 산별 중앙교섭을 계기로 노사관계가 발전적으로 바뀌고, 사용자쪽은 노조 요구를 적극 수용해 성과 있는 교섭이 되길 바랍니다.”(금속노조 심상정 사무처장)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걱정과 기대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사간에 완전쟁취·원천봉쇄라는 말로 대표되는 투쟁일변도의 대결이 많았습니다. 많은 것을 얻고자 욕심부리면 소모적인 교섭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노사관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자리인 만큼 상생의 노사관계를 기대합니다.”(발레오만도 박원용 상무이사)

96개 사용자들이 원한 금속노조 산별 교섭

사진/ 지난 5월6일 처음 열린 금속노련 산별중앙교섭. 사용자들이 교섭대표단을 구성해 스스로 산별교섭에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사건임에 틀림없다.(김진수 기자)
이어 노조쪽이 2003년 기본협약·통일요구안을 사용자쪽에 전달했다. 노조쪽 교섭대표인 신천섭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요구안을 전달하는데 마주 앉은 거리가 너무 먼 탓인지 잘 닿지 않았다. “제가 조금 더 그쪽으로 당길까요” 사용자쪽 교섭대표인 박 상무가 다소 어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원래 노사가 가까운 자리가 아닙니다.” 금속노조 심 처장이 받아넘겼다. 회의 도중에는 교섭 장면을 카메라로 녹취해두자는 노조쪽 주장을 둘러싸고 한때 날카롭게 대립했다. “갑자기 녹취를 제안해 당황스럽다. 우리는 찍히기 싫다. 노동쪽 교섭위원들만 촬영하고 우리 사용자쪽은 찍지 말라.”(박 상무) “왜 카메라를 두려워하나 어느 회의나 요즘에는 이견, 해석 차이를 없애려고 투명하게 한다. 비밀회담도 아니고 중앙교섭을 하는 마당에 모두 촬영해 두자.”(심 처장)


금속노조 산별 중앙교섭 첫 회의는 약간의 긴장과 흥분 속에서 이렇게 진행됐다. 이번 중앙 차원의 산별교섭은 (주)만도·통일중공업·영창악기·발레오만도·세종기업 등 96개 금속사업장들이 교섭권 및 체결권을 사용자쪽 교섭대표단에 위임함으로써 성사됐다. 금속노조는 한국 노동계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이번 첫 중앙교섭은 한국 노사관계가 오랜 기업별 교섭체제를 벗어나 산별교섭 시대로 이행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대공장 노조, 즉 현대·기아차·현대중공업·쌍용자동차·대우조선·현대미포조선 등은 아직 산별 금속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이들 대형 사업장은 6월10일 동시에 산별전환 찬반투표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비록 몇몇 대기업을 포함해 중소기업 금속사업장 중심으로 이번 중앙교섭이 시작됐지만 사용자들이 교섭대표단을 구성해 스스로 산별교섭에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사건임에 틀림없다.

사진/ 보건의료노조의 병원파업 강제진압 규탄대회. 산별교섭이 강화될수록 노조의 요구도 공공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성을 나타낸다.(한겨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노총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기업별노조를 산별조직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민주노총의 경우 2002년 말 현재 전체 조합원의 43%(25개 산별노조 25만명)가 산별노조로 전환했으며, 2007년까지 현재 900여개 단위노조를 6∼7개 대산별노조로 바꿀 방침이다. 이미 산별로 조직형태를 바꾼 노동계는 금속노조·보건의료노조·금융노조 등을 중심으로 사용자쪽에 산별교섭을 줄곧 요구해왔다. 하지만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비롯한 사용자쪽은 수십년간 지속돼온 현행 기업별 교섭을 고집하면서 한사코 산별교섭 테이블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만도를 비롯 96개 금속사업장 사용자들은 지난 3월 “올해 단협이 있는 사업장에 한해 노조 통일요구를 중앙교섭으로 하자”고 노조쪽에 공식 제안했다. 사용자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일까

박 상무는 “사용자쪽이 먼저 중앙교섭을 제기한 것은 세계 노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사용자쪽 참관인으로 교섭장에 나온 (주)STX(경남 창원 소재) 김영호 과장의 말은 좀더 솔직했다. “지난해 금속노조가 지부별 집단교섭을 하면서 기본협약 요구안을 들고 나왔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파업하겠다고 나섰다. 실제로 각 사업장에서 시기집중 동시파업이 벌어졌는데 결국 문구 하나 못 바꾼 채 모든 사업장에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힘의 논리에 밀려 노조쪽에 당했고, 그래서 더 잃을 게 없다고 느낀 사용자들끼리 어쩔 수 없이 ‘알아서’ 중앙교섭 테이블로 나온 것이다. 대규모 사업장은 파업에 대응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거대 산별 금속노조가 개별 사업장 노사문제에 개입하면 상대하기 벅차다. 결국 중소사용자들이 “우리도 힘을 모아 공동대응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뜻밖에’ 적극적으로 중앙교섭을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중앙교섭은 과도기적인 미완의 산별교섭이라고 할 수 있다. 명실상부한 산별 중앙교섭을 하려면 법적인 기구로서 사용자단체가 구성돼야 한다. 이번 96개 사업장 교섭대표단은 정식 사용자단체가 아니다. 특히 체결된 산별 단체협약이 해당산업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에 적용돼야 하는데, 96개 중소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한 중앙교섭인 만큼 한계를 띨 수밖에 없다. 금속노조 심 처장은 “아직 기업별 교섭이 중심을 지배하고 있고 산별 영역의 기본협약은 무늬만 산별 모양을 갖춘 것뿐이다. 지금은 교섭권 및 체결권을 위임받아 교섭하는 제한적이고 불안정한 산별교섭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이날 노조쪽 참관인으로 나온 금속노조 경기북부지회 장광수씨는 “개별 사업장의 임단협 자리보다 무게가 훨씬 더 실려 있어서 그런지 노사 양쪽 다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당장 이번 중앙교섭에서 어떤 성과를 낸다기보다는 산별교섭의 틀과 제도를 만드는 정도에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번 산별교섭은 기본협약·통일요구안(주5일제 즉각 실시·비정규직 노동자 보호·근골격계 질환 대책마련·노조활동 보장)은 중앙교섭으로, 임금은 각 지역에서 금속노조 지부별 집단교섭으로, 그리고 다른 노동조건은 개별 사업장에서 단협으로 해결하는 등 3중교섭 형태를 띠고 있다. 진정한 산별교섭으로 가는 길에서 현실적으로 부닥치는 가장 큰 문제는 임금수준 조정이다. 대기업 고임금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일정하게 포기하지 않는 한 산별노조의 연대는 쉽지 않다. 금속노조가 이번 중앙교섭에서 160개 금속노조 사업장별 임금·단협 기초자료를 취합해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노사공동추진팀을 구성하자는 안을 제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산업 내의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임금격차 해소 없이는 기존 기업별 교섭의 틀을 뛰어넘어 산별로 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사용자들도 단체 구성 필요

사진/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의 노동자. 산별협약은 같은 산업 내 노동자 모두에게 적용되므로 대기업-중소기업간, 정규직-비정규직간 임금격차가 줄어든다.
노동조합이 그동안 산별노조 이행에 박차를 가해온 배경에는 노동운동의 위기감이 깔려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자본의 탄압과 손배·가압류 등 재정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한국의 노동계는 기업별 교섭체제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기업별 노동조합의 ‘돈’과 ‘사람’(조합원)을 거대 산별조직으로 통합하지 않으면 사용자에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기업별 교섭은 교섭비용의 비효율성, 빈번한 파업과 극한대립으로 인해 노사간 ‘게임의 룰’로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노동계 내부의 산별노조 전환이 오래 전부터 본격화됐지만 사용자라는 파트너가 있는 ‘산별교섭’ 자체는 험난한 길을 걷고 있다. 개별 노동조합이 기업별 울타리를 넘어 산별조직으로 바뀌어도 사용자들이 이에 대응해 교섭할 사용자단체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원협회의 경우 보건의료노조가 98년부터 줄기차게 중앙교섭을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동업자조직일 뿐 노사관계에서의 사용자단체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단 한번도 중앙교섭에 나오지 않고 있다.

경총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

사용자쪽 논리를 대변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노조의 산별교섭 요구에 대해 △노조의 힘이 거대화돼 노사간 힘의 균형이 깨진다 △노조가 지나치게 정치투쟁화한다 △대규모 파업이 빈발하고 장기화된다 △임금인상률이 높아진다는 이유를 들어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 경총 남용우 노사대책팀장은 “그동안 증권·금융업종 등에서 초보적 형태의 산별교섭이 이뤄졌는데 임금의 경우 몇 % 인상에다 플러스알파가 붙는다. 중앙교섭 뒤 현장에 돌아가서 플러스알파를 놓고 또다시 협상하는 이중교섭이 벌어졌다”며 “산별교섭 체제에서는 노사분규가 더 자주 일어나고 대형화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별 사용자들은 경총의 방침과 달리 산별교섭에 대한 완강한 거부 입장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노조의 힘에 밀려 산별교섭에 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눈치보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정책국장은 “노동계가 ‘민주노조 시대’에서 ‘산별노조’ 시대로, 이제는 ‘산별교섭’ 시대로 가파르게 움직이고 있다”며 “사용자쪽이 산별교섭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거부한 채 기업별 교섭을 고집한다면 사회적 발전에도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병원협회 관계자는 “산별교섭이 이뤄지면 온건한 노조마저 강성으로 바뀌고 노조가 없는 병원에서조차 노조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면서도 “회원사 병원들을 보면 각자 처한 상황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산별교섭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업장도 있다. 통일된 목소리 없이 중구난방이다”라고 말했다.

2000년부터 모든 은행장들이 참가하는 집단교섭을 벌여온 금융노조도 올해부터 사용자단체인 은행연합회와 실질적인 산별교섭을 벌이기로 했다. 시중 은행장들이 교섭권을 은행연합회에 위임했기 때문이다. 금융노조 문태섭 정책부국장은 “은행연합회가 사용자단체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올해 처음 표명했다. 이에 따라 금융노조 사업장 중 국책·시중은행 20곳에다가 감정원·금융결제원·신용보증기금 등 11개 사업장도 은행연합회에 교섭권 및 협약체결권을 모두 위임했다. 이에 따라 5월19일부터 비정규직에 대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승진에서 여성할당제 실시 등을 요구하며 첫 중앙교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금속·금융·병원 사용자들 가운데 대형사업장은 여전히 경총의 방침대로 산별교섭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중소기업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산별교섭 테이블에 나오는 이유는 뭘까 우선 산별조직으로 전환한 노동조합의 힘에 밀렸다고 할 수 있다. 산별노조의 힘이 사용자들을 산별교섭으로 강제로 끌어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자기 사업장만 경쟁업체들보다 임금이 더 오르면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경쟁에서 뒤처지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차라리 중앙교섭을 통해 임금인상률이 똑같아져 임금이 ‘외부적 조건’으로 주어지는 편이 더 낫다. 사용자들끼리 임금경쟁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교섭이 기업 바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사업장 안정을 꾀할 수도 있다.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 커질 것

사진/ 산별교섭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도 대표성을 갖는 단체를 구성해야 한다. 금융노조도 은행장들이 단체교섭권을 은행연합회에 위임했기 때문에 5월19일 첫 중앙교섭에 들어간다.(한겨레 탁기형 기자)
산별노조 시대가 가져올 변화로 가장 먼저 꼽히는 건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다. 같은 산업 내 노동자 모두에게 산별협약이 적용되므로 대기업-중소기업간, 정규직-비정규직간 임금격차가 줄어든다. 또 산별교섭 체제에서 노조의 투쟁력과 조직력은 강화되지만 그만큼 노조의 사회적·정치적 책임도 커진다. 바꿔 말해, 파업이 기업별 체제에서 ‘유일한 수단’이었다면 산별 시대에는 사회적 책임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인식되고, 따라서 경총의 우려와 달리 파업도 줄어든다. 나아가 기업별 체제가 임금인상과 분배 등 경제주의적 이해에 갇혀 있었던 반면 산별체제는 사회적 의제를 제기한다. 산별 보건의료노조가 임금투쟁을 넘어 △의료의 공공성 강화 △국민 건강권 문제를 주요 교섭의제로 제기해온 것이 이를 보여준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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