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금감원이 설마 그럴리가…”

457
등록 : 2003-04-30 00:00 수정 :

크게 작게

상장사 외부감사인 실태도 제대로 파악 안해…기업 회계투명성 높일 수 있을까

재정경제부는 4월15일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에 따른 후속조처로 ‘회계제도 선진화 방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기업이 한 회계법인에 장기간 감사를 맡기고 회계법인은 그 대가로 부실회계를 눈감아주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6년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회계법인을 바꾸도록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SK글로벌의 경우 10년 동안 같은 회계법인이 계속 회계감사를 맡아와 분식회계가 숨겨져 왔다고 재경부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기업회계의 투명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을까?

“그 자료 만들려면 몇달 걸려요!”

사진/ 금감원 전자공시 시스템. 상장사의 외부감사인 선임 현황을 알려면 사업보고서를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박승화 기자)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이번 정부 조처가 진정으로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인지 의심스럽게 하는 사실이 밝혀졌다. 회계감사에 대한 감독을 맡은 금융감독원이 상장기업의 외부감사인 지정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특정 회계법인과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계약을 맺는지, 재벌들이 특정 회계법인에 회계감사 용역을 어떻게 몰아주는지 금감원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외부감사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기업과 회계법인 간 유착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지난 4월9일, 금융감독위원회에 최근 5년치 상장사 외부감사인 지정현황 자료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정보공개 청구는 ‘정남구’ 이름으로 했다. 금감위는 정보공개 청구서를 금감원으로 넘겼고, 금감원은 2주가 지난 4월23일 회신을 보내왔다. 회신내용은 ‘비공개’였다.

금감원이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청구한 자료가 법적으로 공개가 금지된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다. 금감원의 회신내용은 이렇다. “상장사의 외부감사인은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출·공시되는 감사보고서에 기재돼 있는 사항으로 기공개된 정보에 해당하므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8조 2항에 의거 별도의 정보를 제공하지 아니함.”

금감원의 대답은 이미 다 공개된 사항이라는 것이다. 물론 금감원의 대답은 틀리지 않았다. 사업보고서는 인터넷을 통해 금감원 공시정보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고, 공시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금감원이 자료를 비공개하기로 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금감원의 대답은 ‘알고 싶으면 개별기업의 사업보고서나 감사보고서를 일일이 찾아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상장회사는 모두 685개, 5년치를 조사하려면 모두 3425건의 사업보고서를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 그것도 최근 3년치는 공시정보 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3년이 지난 것은 공시정보 시스템에 올라 있지 않으므로 열람실에서 일일이 찾아야 한다.

금감원 회계제도실 관계자는 정보공개 청구를 한 직후 청구내용이 “황당하다”는 듯 전화를 걸어왔다. “그 자료를 만들려면 몇달 걸려요!” 금감원이 그런 수고를 해가면서 정보공개 청구에 응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금감원이 정보공개 청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다. 회계 투명성 확보에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금감원이 아직껏 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조차 구축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한번도 외부감사인 지정실태를 파악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요구에 KOSPI200 기업 자료만

정보공개에 대한 최종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민주당 박병석 의원실은 <한겨레21>이 정보공개를 청구한 것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KOSPI200 기업에 편입된 기업 200곳 가운데 74개 기업이 지난 7년 동안 같은 회계법인에서 외부감사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기업과 회계법인 간 유착 위험을 그대로 보여주는 통계였다.

박 의원쪽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자료는 금감원에서 넘겨받은 것이었다. 데이터베이스가 없는데 어떻게 한 것일까 금감원은 박 의원실이 요청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가량 일일이 감사보고서를 뒤진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사람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요청하는데 없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 의원실의 유재관 비서관은 “애초 전 상장사에 대해 자료를 요청했으나,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해서 KOSPI200 기업에 대한 자료만 요청했다”고 말했다. 평소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었다면 채 몇분도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만약 박 의원실이 고집스럽게 모든 상장사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면 금감원은 어떻게 했을까 금감원 관계자는 “자료를 만드는 데 석달은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보공개를 청구한 뒤 전화를 걸어온 금감원 관계자는 “박 의원실에 넘긴 자료라도 받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단호히 거절했다. 자료라면 박 의원실에서 얻을 수 있었고, 기업회계 투명성 문제에 대한 금감원의 자세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보공개에 대한 회신을 받은 뒤 금감원에 다시 확인전화를 걸었다. 다음은 회계제도실 관계자와의 문답내용이다.

문=금감원에는 상장사 외부감사인 현황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는가

답=기업에서 자료를 받기는 하지만 따로 정리하거나 집계는 하지 않았다.

문=왜 그런가 실태파악은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답=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정기간이 지난 뒤 의무적으로 외부감사인을 교체하는 제도가 도입되면) 달라질지 모르겠다.

문=그렇다면 그동안 기업들의 외부감사인 선임과정의 실태를 몰랐단 말이냐

답=알려고 하면 알 수는 있었다. 다만 수치화할 필요는 없었다. 박병석 의원실에서 자료를 요청하기 전에는 (기업이 한 외부감사인과 장기간 계약을 계속하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특정 회계법인 ‘싹쓸이’ 막으려면

사진/ 재벌들이 특정 회계법인에 회계감사 용역을 어떻게 몰아주는지 금감원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21〉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한 금감원의 회신(오른쪽).(이용호 기자)
금감원쪽 답변은 누워서 침뱉는 격이다. 아직껏 금감원에 그런 자료를 요구한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기업과 회계법인의 유착 가능성이 있고,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지적은 결코 최근에 나온 일이 아니다. 외환위기 전인 1997년 기아자동차가 거액의 분식회계로 무너졌을 때, 대우그룹이 수십조원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가 문을 닫았을 때부터 그런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 외부감사인 실태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금감원이 먼저 나서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한 회계법인의 고위간부는 “재벌들은 계열사의 회계감사 업무를 특정 회계법인에 몰아주고 있고, 상위 5대 회계법인이 회계감사 시장을 싹쓸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계약만이 아니라 엄청난 매출을 올려줄 수 있는 재벌의 힘도 회계의 투명성을 해치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다. 하지만 금감원에게 이런 문제는 여전히 관심 밖의 일이다. 금감원이 외부감사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자, 청와대 정책실 관계자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