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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돈 많은 고객만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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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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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고객 끌어들이면서 돈 안 쓰는 고객 표나지 않게 밀어내는 ‘물관리’ 마케팅

물건 팔아 수익을 남기는 판매업자의 처지에서 볼 때 ‘고객은 왕’이란 모토는 어느 나라, 어느 업종을 가릴 것 없이 불문율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더욱 철저한 소비자 위주라고 여기는 쪽도 있을 것이고, 거꾸로 소비자를 속이거나 홀대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 위주라고 생각하는 쪽은 “한국의 소비자들은 너무 편한 소비를 하고 있다”는 말까지 한다. 예컨대 2500원짜리 자장면 한 그릇을, 비 맞아가며 비탈길을 올라 주문고객의 집까지 배달해주면서 배달료 한푼 물리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집에 앉아 편하게 시켜먹을 때도, 손님이 중국집에 제 발로 찾아와 먹을 때도 가격이 똑같다.

상위 20% 고객이 매출 80% 차지

그런데 이제는 소비자 위주라고 해도 다 같은 소비자가 아니다. 금융·유통업계에서 수익의 대부분은 ‘돈 많은 우량고객’이 가져다준다. 사회가 소득·재산에 따라 ‘20 대 80’으로 굳어졌듯 구매수준도 ‘2 대 8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구매수준 상위 20%의 고객이 총매출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현대백화점의 구매 상위 20% 고객(연간 구매금액 약 400만원 이상)이 총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4%에 이른다. ‘고객제일주의’, ‘고객감동’ 마케팅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고객만족 서비스는 이들 상위 20%에 집중된다.


롯데백화점도 구매수준 상위 10%(연간 구매금액 약 2천만원 이상)가 총매출의 절반가량을 기여한다. 반면 연간 구매금액 100만원 이하는 대개 하위 10%로 분류된다. 롯데백화점은 특히 롯데카드를 갖고 있는 고객 550만명 중 구매실적이 가장 높은 극소수(점포별로 500∼2천명선)를 최고가치고객(MVG)으로 따로 분류해 구매시 5% 추가 할인, 주차서비스 제공, 생일 꽃배달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숫자로는 전체 고객 중 0.5%도 채 안 되지만 이들의 백화점 수익 기여도는 10%에 이른다.

사진/ 금융·유통업계에서 수익의 대부분은 ‘돈 많은 우량고객’이 가져다준다. 롯데백화점 본점 4층에 마련된 MVG 라운지.(롯데백화점 제공)
수익의 대부분을 돈 많은 VIP고객이 안겨주는 건 은행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소액예금자에게 이자를 한푼도 주지 않거나 오히려 계좌유지 수수료를 물려 말썽을 빚었지만, 은행쪽도 ‘2 대 8’의 논리를 내세운다. 국민은행을 비롯해 시중은행들은 전체 고객의 20% 정도를 우량고객으로 잡고 있다. 나머지는 한마디로 ‘잔고객’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예금거래실적 등을 점수화한 뒤 고객들을 등급별로 분류해 우대고객한테는 수수료 할인 등 각종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쪽에서 볼 때 별다른 수익을 못 주고 비용만 유발하는 무수익형 고객은 15∼20% 정도”라고 말했다.

금융·유통업체마다 내세우는 ‘차별화된 고객만족’ 서비스는 경쟁업체에 비해 차별화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 고객들 역시 등급별로 차별하는 전략이다. 이는 “모든 고객을 다 같이 만족시키는 마케팅은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슬로건으로 집약된다. 일반적으로 업계에서는 구매 수준 상위 20%는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하는 반면, 중간 고객은 손해도 이익도 안 끼치고, 하위 20%는 매장비용과 점원 인건비 등을 따져볼 때 손해만 끼친다고 본다. 그래서 나온 판매기법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펼치는 디마케팅(Demarketing·역마케팅)이다. ‘돈 안 되는 고객’은 매장·창구에 찾아오지 않도록 떠밀어내는 전략으로, 마케팅과 정반대다. 이처럼 고객만족 전략 뒤에는 ‘돈 안 되는 고객은 쫓아내라’는 차가운 얼굴이 숨겨져 있다.

물론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처지를 감안하면 비용만 발생시키는 고객을 푸대접한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통예금 평균 잔액이 일정액(10만∼50만원)에 미달하면 이자를 주지 않는 은행들은 “통장발행비와 전산을 돌리는 데 드는 비용, 계좌 관리에 따른 인건비 등이 이자보다 더 많이 나온다”고 말한다. 과학적 원가분석을 거쳐 고객 1명당 손익을 계산한 뒤 수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고객은 떼어내는 것이다. 물론 시장 좌판에 야채와 콩나물을 깔아놓고 파는 상인이야 “콩나물 팔아 무슨 돈이 남냐 찾는 손님이 있어서 돈이 안 돼도 파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은행·백화점 너희는 왜 돈만 밝히느냐고 몰아칠 수는 없다.

사진/ 한 시중은행 영업창구(이용호 기자)
국민대 이수동 교수(경영학)는 “은행 또는 백화점에서 한번에 100만원을 입금·구매하는 고객과 1만원을 입금·구매하는 100명의 소액고객을 똑같이 취급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 오히려 100만원짜리 고객이 차별받게 된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액 구매고객이 백화점에 많이 드나들면 주차장에 차를 대기도 힘들 뿐아니라 매장이 북적거리고 혼잡스러워져 쇼핑환경이 나빠진다. 그러면 우량고객이 떨어져나갈 수도 있다. 또 100명이 1만원어치씩 구매하면 한명이 100만원어치를 구매할 때에 견줘 금전등록기 및 바코드 비용, 점원 인건비가 단순 계산으로 100배 늘어난다. 롯데백화점은 점포마다 50평 남짓 되는 MVG 전용 라운지를 따로 설치해놓고 있다. 소액 구매고객들이 넘쳐나면서 쇼핑환경이 나빠지자 돈 되는 고객을 붙잡기 위해 아늑한 특별공간을 따로 마련한 것인데, 다수의 소액고객들 때문에 발생하는 추가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량고객 혜택을 일반고객이 부담하나

대량 구매고객한테만 공짜 사은선물을 듬뿍 안겨주거나 VIP고객만 드나드는 공간을 따로 설치하는 ‘타깃 마케팅’은 부자 고객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돈 안 쓰는 고객을 표나지 않게 밀어낸다. 홀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면 돈을 더 쓰거나 백화점에서 자연스럽게 나가게 되는 것이다. 카탈로그 디엠(DM)은 좀더 직접적인 ‘물 관리’ 방식이다. 모든 고객한테 DM을 발송하는 백화점은 없다. 구매수준별 고객등급을 매겨 구매력 높은 고객들한테만 집중적으로 보낸다. 모든 고객한테 DM을 발송했다가는 발송비만 축나고 매장도 혼잡해지기 때문이다. 이름만 ‘백화점’일 뿐, 대량 구매고객들이 주로 찾는 상품만 골라 집중 배치하는 것도 간접적으로 소액고객을 떠미는 전략 중 하나다. 물론 백화점쪽은 펄쩍 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고액 구매고객들한테 각종 우대혜택을 주는 것일 뿐, 구매수준이 낮은 고객을 차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도 나중에 백화점에 큰 기여를 하는 우량고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물론 소액고객에 대한 냉대가 고객에게 그대로 노출되면 “돈에 따라 사람 차별한다”는 비판이 당장 쏟아진다. 북적거리는 은행창구 앞에서 번호표 뽑아 한참 기다리는 소액고객이라면 우량고객한테 번호표 없이 VIP룸 소파에 앉아 일을 보게 ‘배려’해주는 은행을 곱게 볼 리 없다. 특히 띄엄띄엄 찾아오는 극소수 VIP고객을 위해 설치해둔 널찍한 프라이빗뱅킹센터는 텅텅 비어 있기 일쑤다. VIP고객에게는 송금수수료를 면제해주거나 깎아주면서도 일반고객들의 수수료는 자꾸 올려 소액고객의 주머니만 털어간다는 불만도 터져나온다. 백화점·은행쪽은 상품 팔아 ‘전기료도 안 나오는’ 고객들이라고 푸대접하지만, 우량고객이 받는 여러 혜택을 수많은 일반고객이 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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