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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돈은 좋아도 생산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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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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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유통·벤처 기업들도 대부업 진출…운전자금으로 은행에서 돈 빌려 사채놀이

ㅇㅇ캐피탈, ㅇㅇ머니, ㅇㅇ캐쉬, ㅇㅇ파이낸스…. 서울시의 금전대부업 등록업체(법인) 리스트에 등장하는 기업 이름들이다. 이름만 봐도 금융관련 업체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리스트를 훑다 보면 눈길을 붙잡는 상호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ㅇㅇ유통산업, ㅇㅇ개발, ㅇㅇ물산, ㅇㅇ농산, ㅇㅇ벤처…. 언뜻 봐도 금융과 전혀 무관해보인다. 제조·유통·벤처기업 등이 기존 사업영역과 별도로 새로 대부업에 뛰어든 것이다.

돈은 있는데 투자할 데가 없다?

사진/ 제조 유통 업체의 잇단 대부업 진출은 빗나간 돈장사라는 비판을 받는다. 서울 명동의 사채골목.(김진수 기자)
크고 작은 기업들의 대부업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히 말하자면 제조·벤처·유통 업체들이 ‘생산’에 싫증을 내고, 대신 사채 돈놀이라는 빗나간 ‘돈장사’에 빠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대부사업자연합회 김명일 사무총장은 “현금 많고 유동성 좋은 회사들은 요즘 투자할 데가 없다. 그래서 대부업에 관심을 보인다. 대부업에 노하우가 있든 없든 합법적으로 연리 66%를 받을 수 있는 시장이 제도화돼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석유수입 및 휴게소 운영업체인 리드코프(코스닥 등록기업)는 최근 대부업 등록을 마치고 서울 강남에 대부업 점포 1호점을 열었다. 올해 안에 점포를 15∼20개로 늘릴 계획이다. 신규사업인 대부업 자금 마련을 위한 대대적인 유상증자도 실시했다. 이번 유상증자에는 세계적 투자기관인 싱가포르투자청이 106억원을 투자했다. 리드코프쪽은 “회사가 갖고 있는 여유자금 100억원 정도를 바탕으로 사업다각화를 위해 대부업에 진출했다. 대부업이라는 게 돈장사다 보니 이 정도 자금만으로는 사업을 하기 힘들어 유상증자를 했다”고 말했다. 리드코프는 미국계 투자펀드 H&Q가 대주주로 들어오면서 대부업 진출을 모색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리드코프쪽은 특히 “코스닥 등록기업이라 금융감독기관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다른 사채업체보다 일단 투명성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수섬유 제조업체인 텍슨(코스닥 등록기업)도 지난 2월 정관을 개정해 사업목적에 대부업을 추가했다. 텍슨은 2년 전부터 일본의 대형 대부업체와 손잡고 국내에 합작투자회사를 설립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텍슨쪽은 “대부업체를 신설하더라도 출자와 경영에 참여할 뿐 기존 사업영역인 섬유제조업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텍슨의 운영자금을 신설 대부업체쪽에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회사 내부에 유보해둔 자금으로 충분히 대부업체에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용카드 단말기 제조업체인 한국정보통신과 전자상거래 분야의 대표적 벤처기업인 이니시스도 서울시에 최근 대부업 등록을 마쳤다.

대기업 계열사들까지 대부업 등록

김명일 총장은 “리드코프나 텍슨 등 이름이 이미 알려진 곳말고도 여러 기업들이 물밑에서 대부업 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 중구에 있는 중소기업 ㅎ개발(주)은 건축·부동산 개발업체인데 최근 신규 대부업체로 등록했다. 이 회사 대표 김아무개씨는 “금융분야에 특별한 경험은 없다. 부동산쪽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요즘 여유자금이 조금 남아 돌고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 대부업 등록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ㅅ보석경매·ㄷ에너지 등도 최근 대부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소규모 가스설비업체인 ㄷ에너지의 경우 금융에는 전혀 경험이 없다. 하지만 대부업이 제도화되자 전주와 차입자 사이에서 금전대부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대부업 진출을 꾀한 것으로 알려진다.

어쩔 수 없이 등록했다지만 내로라 하는 굵직한 대기업 계열사·자회사들까지 속속 대부업 등록에 나섰다. 현대기업금융(주)·한화파이낸스·효성캐피탈·한솔캐피탈·동양캐피탈·부영파이낸스 등이 그런 기업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여신전문금융회사도 아니고 제도권 금융기관도 아니라서 과거 법인 설립 때 ‘기타 금융업’으로 국세청에 신고했는데 이번에 대부업법 시행에 맞춰 새로 등록했을 뿐이다. 기업금융 외에 개인한테 대출해주는 사채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들이 대부업 등록을 해놓은 만큼 나중에 본격적으로 대부업 시장 진출을 꾀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제조·유통·벤처 업체들의 이러한 대부업 진출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시장에서는, 본업인 생산활동에 전념하면서 물건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생산해야 할 기업들이 투기적인 고금리 대금업에 뛰어드는 데 대해 곱지 않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싼 이자로 대출받은 은행자금이나 사실상 0%에 가까운 금리로 일반 투자자들한테 조달한 자금으로 고금리 사채놀이를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 66%의 대부업 이자를 통해 큰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대부업에 몰리지만, 자칫 돈을 떼일 경우 본연의 기업활동마저 위태로워질 공산이 크다. 금융감독원 조성목 비제도금융조사팀장은 “대부업체의 평균 부실채권은 대출잔액의 20∼25%에 이른다. 대부업체는 깨지고 부서지면서 커 간다.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성장하는 업체도 있지만 퇴출운명에 놓이는 업체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사채업자에 뒷돈 대주는 전주 행세도

사진/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부업체인 프로그레스. 일본 사채업자들이 한국을 휘젓고 있다.
그래서일까. 대부업 등록을 마친 일부 기업은 직접 대부업에 뛰어들지 않고 개별 사채업자한테 뒷돈을 대주는 ‘전주’로 행세한다. 개별 대부업자가 전주한테서 뭉칫돈을 떼오면서 부담하는 금리는 보통 연 36%다. 돈놀이하는 데 쓰인 자금이 운전자금 명목으로 은행에서 연 10%로 빌린 것이라면 제조업체는 가만히 앉아 26%의 금리 차익을 버는 셈이다. 사채시장에서 큰손 행세한다는 비판을 받을까봐 한 다리 건너 다른 전주한테 돈을 ‘빌려주는’ 기업들도 있다. 우회로를 통해 대부업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때는 연 18% 정도의 금리를 적용하는데, 연 10%로 빌린 운전자금이라면 손쉽게 8%의 금리차익을 챙긴다. 이런 일이 터지자 금감원은 최근 각 은행에 기업대출 자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조성목 팀장은 “기업 가운데 운전자금 명목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엉뚱하게 사채업에 쓰는 데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은 본래 실물을 위해 있는 것인데, 시중자금이 생산을 위한 산업자본으로 흘러가지 않고 거꾸로 대부업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는 양상이다.

국내 최대 일본계 대부업체인 A&O인터내셔날은 지난해 사채자금 50억∼100억원을 군인공제회로부터 조달했다. 군인공제회가 A&O의 기업어음(3개월과 1년짜리)을 사는 형태로 투자한 것이다. A&O 관계자는 “우리 회사 기업어음을 파는 쪽은 증권회사다. 따라서 우리한테 투자한 곳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 제조·유통·벤처 업체들이 대부업체의 회사채·기업어음을 사들여 간접적으로 사채업에 손댔을 가능성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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