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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돈놀이’에 뛰어든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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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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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쉽게 큰 돈 번다”는 생각으로 대부업 등록하는 20~30대 청년 사채업자 급증

지난 4월9일 오전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9층 소비자보호과. 사무실 한쪽 구석 테이블에 민원인 몇 사람이 앉아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다. 테이블 주변에는 각종 서류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원래 창고처럼 쓰는 공간인데 민원인이 몰려들자 급히 서류 작성용 테이블을 갖다놓았다. 사람들이 적고 있는 서류는 ‘대부업 등록신청서’. 소비자보호과는 지난해 10월 본격 시행된 대부업법에 따른 서울지역 대부업체 등록창구다.

개인 대부업자의 37.5%

사진/ 젊은 층 사이에서 대부업이 크게 인기를 끈다. 서울시 대부업 등록창구에서 한 젊은이가 신청서류를 쓰고 있다.(김진수 기자)
“상호저축은행에서 그동안 대출도우미로 일해왔는데 영업도 잘 안 되고 별 재미를 못 봤어요. 그래서 아예 개인 사무실을 내고 대부업에 나서보는 겁니다.” 대부업 등록신청서에 내용을 적던 김아무개(31)씨가 내뱉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옆구리에는 두둑한 돈주머니 가방을 꿰차고 있었다. 김씨 맞은편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청년이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점퍼를 걸친 30대 남자,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40대 남자…. 창구에 대부업 등록신청자들의 발길이 오전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4월4일 현재 서울시에 대부업 등록을 한 업체는 법인·개인을 합쳐 모두 2914개. 그런데 이들 등록업체 리스트를 죽 훑어보면 단박에 눈길을 잡아끄는 게 있다. 등록업체 대표자들의 주민등록번호가 그것인데, 20∼30대 ‘청년 사채업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한겨레21>이 집계한 결과 서울시에 등록한 개인 대부업체는 2442개(4월4일 현재)로 이들 가운데 대표자 나이가 20대인 업체는 224개, 30대는 693개로 나타났다. 20∼30대 젊은 대부업자가 전체 개인 대부업자의 37.5%(917명)에 이른다. 젊은 청년들이 일찍부터 고금리 사채 돈놀이에 나선 것이다. 청년들이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이나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지 않고 돈 빌려주고 돈 먹는 대부업판에 뛰어든 까닭은 뭘까

‘ㅎ114’란 상호로 강동구에서 최근 개인 대부업체 등록을 마친 박아무개(25·여)씨. 대부업은 직접적인 금전 대부업과, 금융기관 대출을 알선해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금전 중개업으로 나뉜다. 박씨는 금전 중개쪽이다. “졸업 뒤 얼마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직장 상사 밑에서 일하며 받는 월급이 뻔하지 않느냐 아르바이트하면서 이쪽(사채업) 일을 알게 됐는데 나한테 적성도 맞고 매력도 있어 아예 사무실을 내고 시작했다.”박씨가 짤막하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대부업자를 악질 고리 대금업자로 싸잡아보는데 잘못된 선입견이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ㅎ대부’란 이름으로 양천구에서 개인 대부업자로 등록한 백아무개(26)씨.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한동안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대부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금전 대부업 경험이 전혀 없는 터라 일종의 모험이다. 연리 66%의 이자를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강한 유혹이 작용한 것일까 “부동산경매 일을 하는 아는 사람한테서 대부업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대부사업에 쓸 자금은 주로 은행에서 대출받아 조달하고 있다.” 백씨가 거침없이 말했다.

“무보수라도 일 배우게 해 달라”

물론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도 젊은 사채업자 급증을 낳은 한 원인으로 꼽힌다. 3월 중순 영등포에 ‘ㄱ사’라는 대부업체를 차린 최아무개(27)씨는 사업을 개시해보지도 못한 채 4월4일 폐업신고를 냈다. 최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냈으나 취업이 안 되자 급한 대로 대부업에 뛰어들었고, 사무실을 얻어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도중에 이력서를 낸 곳으로부터 취업 연락이 오자 사무실 계약금만 날린 채 폐업해버린 것이다.

요즘 청년 대부업자 급증현상을 ‘취업 길이 막막한 탓에 빚어진 것뿐’이라고 생각한다면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는 오히려 “연 66%의 고리 대금업으로 손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20∼30대 젊은이들의 비뚤어진 의식이 깔려 있다. 젊은이들의 벤처기업 산실인 강남 테헤란로가 대부업체 거리로 바뀌고 있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4일까지 서울시에 등록한 법인 대부업체 472개 가운데 ‘테헤란밸리’가 있는 역삼동에 사무실을 낸 대부업체는 무려 72곳에 이른다. 한때 벤처기업이 몰리던 테헤란로 일대에는 한달에 2∼3개씩 대부업체가 새로 입주하면서 현재 100여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 전통 사채골목으로 불려왔지만, 대부업체로 등록한 법인이 32곳에 지나지 않는 명동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기술과 모험이란 벤처정신으로 통하던 테헤란밸리가 돈놀이 대부업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대부업체에 제 발로 찾아와 “무보수라도 좋으니 일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20대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대부업의 세계라는 게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사채 빚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신체포기각서가 나도는 등 어딘지 음습하고 험악한 곳이라 직접 체험하면서 노하우를 익히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뒤에 따로 독립해 대부업체 사무실을 차리겠다는 심산이다. 대부업 등록은 간단하다. 신청서에 상호·대표자이름·주소 등만 기재하면 되고, 미성년자나 금고 이상의 실형 전력 등 결격사유만 없으면 얼마든지 등록이 가능하다. 서울시 소비자보호과쪽은 “메이저급 기존 사채업체에서 채권추심 업무 등을 맡았던 젊은 사람들이 독립해 개인 대부사업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대부사업자연합회에는 대부업법 시행 이후 이쪽 업계를 배워보겠다는 젊은이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이렇듯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대부업에 눈독을 들이자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재빠르게 나섰다. 대학 졸업자들을 대거 채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융감독원 조성목 비제도금융조사팀장은 “일본계 업체들은 주로 전문대 출신들을 새로 뽑아 쓰고 있다. 한국의 금융기관 출신 경력자들은 웬만하면 안 쓴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말 현재 대부업계 종사자는 2만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일본계 대부업체 종사자는 1800여명(본점 기준)이다. 그러나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부업체마다 전국적으로 수십개 점포를 갖고 있는 만큼, 일본계 업체 종사자는 1만여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부업 시장 혼탁해질 가능성도

사진/ 청년 실업이 심각한 가운데 한 채용박람회에 몰려든 젊은이들.(이용호 기자)
물론 사채를 빌려쓰는 고객이 죄다 신용도도 낮고, 막다른 사채시장까지 와서 급전을 융통하는 처지라서 여차하면 빌려준 돈을 떼일 우려도 크다. 하지만 이날 개인 대부업체로 등록한 신아무개(41)씨의 ‘금전중개 영업’ 설명에 따르면 젊은이들 사이에 ‘큰 고생하지 않고 앉아서 돈 벌 수 있다’는 유혹이 생길 만하다. “연리 66%가 합법적 이자 상한선이기 때문에 다들 연 65.9%, 월 5.5% 등으로 영업한다. 전주한테서 돈을 빌려 대출을 중개할 경우 수수료로 월 2∼2.5% 정도를 내가 먹고, 나머지 3∼3.5% 정도는 전주가 먹는다.”

조성목 팀장은 “사채업계에서 협박·폭력을 일삼는 등의 사고를 치는 쪽은 잔챙이들이다. 대형 업체들은 회사 이미지 때문에 무자비한 채권추심은 되도록 피하고, 고객이 돈을 못 갚겠다고 버티면 ‘이자는 탕감해줄 테니 원금만 갚으라’고 양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좁은 사무실 하나 차려서 영업하는 20∼30대 개인 대부업자들의 급증이 대부업 시장을 앞으로 혼탁하게 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자료/ 서울시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된 대부업체 등록현황.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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