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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2% 경제학] 적대적 M&A는 절대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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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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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스트의 SK(주) 주식 매입 계기로 돌아본 M&A… 기업들은 보호장치 요구 대신 경영 투명성 높여야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거리의 여인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의 백마 탄 왕자님인 에드워드(리처드 기어)는 직업이 기업사냥꾼이다. 그는 경영문제로 주가가 떨어진 회사를 헐값에 인수해 구조조정을 한 뒤 비싼 값에 되팔아 돈을 버는 사람이다. 의회에까지 막대한 로비력을 과시하며 한 선박회사를 손에 넣으려던 에드워드는 비비안을 만난 뒤 마음을 바꾼다. 결국 경영권 인수를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의 돈을 투자해 그 회사를 도와준다. 에드워드의 ‘개과천선’이라는 영화의 설정은 기업사냥꾼에 대한 일반적 시각을 반영한다. “남의 회사 경영권을 빼앗는 것은 나쁜 일이다!”

‘우리 기업’의 경영권 지켜주자

기업사냥꾼들은 인수합병을 무기로 기업사냥에 나선다. 영어로는 M&A(Merger & Acquisitions)라고 한다. 기존 대주주와 협상을 통해 지분을 넘겨받아 기업 경영권을 인수하는 것이 우호적 M&A인데, 이는 주로 같은 업종의 회사가 합쳐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이뤄진다. 이와 달리 주식시장 안팎에서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적대적’ M&A라고 한다. 기업사냥꾼들이 쓰는 것이 적대적 M&A다. 물론 적대적 M&A에 나서겠다고 위협해 매입지분을 비싼 값에 대주주에게 되파는 것이 목적인 그린메일(Greenmail)도 있다. 기업을 되팔지 않고 단지 계열사 확장을 위해 다른 회사의 경영권을 빼앗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적대적 M&A는 정말 나쁜 일일까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라는 한 시민단체가 4월11일 발표한 성명서는 적대적 M&A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시민회의는 영국계 증권사인 크레스트 시큐러티즈가 SK(주)의 주식을 매입하면서 참여연대에서 소액주주운동을 이끈 장하성 교수를 만난 데 대해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가 한국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협력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단체가 본연의 임무를 뛰어넘어 외국자본의 브로커 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보여 심히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시민회의의 성명에 대해 참여연대는 “단지 만난 것을 가지고, 협력하는 것이라고 부풀리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언론보도와 달리 크레스트쪽이 SK(주)에 대해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간과한 것이다. 시민회의가 너무 앞서갔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시민회의의 성명에는 짚고넘어가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우리 기업’과 ‘외국자본’을 대립시키고, 우리 기업의 경영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시각이 과연 옳은 것이냐는 점이다.

경영진의 전횡 막는 긍정적 기능도

자료/ 크레스트 시큐러티즈의 SK(주) 주식 보유 현황. 이 회사는 지분에 맞는 경영참여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듯 적대적 M&A 또한 부작용을 낳는 것이 사실이다. 1997년 대농그룹의 모기업인 미도파에 대해 신동방그룹이 적대적 M&A를 시도한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당시 M&A는 외국인 투자가들이 동방페레그린증권을 창구로 미도파 주식을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이어 신동방그룹과 성원그룹 계열사가 미도파 주식을 매집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동방이 중심이 된 적대적 M&A세력은 대농그룹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해 적대적 M&A는 성사 직전까지 갔다. 그러자 재계가 나섰다. 미도파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매입해주고, 전경련이 나서 적대적 M&A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했다. 결국 재계의 중재로 성원그룹이 매입한 지분을 대농에 넘김으로써 적대적 M&A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영권을 인수하려는 쪽과 방어하려는 쪽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M&A와 관련된 기업들은 외환위기와 함께 모두 그룹이 붕괴되는 운명을 겪었다. 적대적 M&A의 부작용은 이처럼 경영권 분쟁이 기업의 출혈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반면 적대적 M&A에 대한 위협은 기업 경영진으로 하여금 주주 이익을 위해 경영을 하도록 독려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 나쁜 경영자를 퇴출하는 위협요인이 없으면 경영진은 전횡을 일삼는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적대적 M&A에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 규제를 요구한 것은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낀 경영자들이었다. 이에 따라 1968년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면 신고하도록 한 ‘윌리엄법’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1980년대 중반 정크본드(고위험 고수익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한 기업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적대적 M&A는 절정에 이르렀다. 기업사냥꾼들에 대해서는 멀쩡한 기업을 파멸로 이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당시 M&A 열풍은 방만한 경영을 일삼던 경영진들에게 경영 합리화라는 변신을 강제한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요즘은 지배적이다. 미국 조지메이슨대학 명예교수인 헨리 만은 지난해 엔론사태와 관련한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에서 “(정치인들은) 엔론사태를 비롯한 최근의 분식회계 스캔들이 20여년 전 적대적 인수합병을 제한한 정부 규제의 직접적 결과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기업환경은 물론 미국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M&A는 오랫동안 정치권력과 손잡은 재벌들이 부실기업이나 공기업을 특혜인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시장에서의 적대적 M&A는 사실상 봉쇄돼왔다. 1998년까지는 의무공개매수제라는 것이 있어, 상장사 주식을 25% 이상 사려면 반드시 50%+1주 이상을 사도록 했다. 대주주의 양해가 없으면 사실상 인수합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경영권은 보호됐고, 재벌들은 암묵적 합의로 적대적 M&A를 막기 위해 협력했다.

한국은 적대적 M&A 어려워

지금은 이런 규정이 폐지되고, 5% 이상 지분을 보유하면 지분변동을 공시하도록 한 ‘5%룰’ 정도만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는 재벌의 상장 계열사에 대한 적대적 M&A는 여전히 어렵다. 재벌들이 계열사를 동원하고 막대한 자금력으로 자사주 매입과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 등을 통해 방어하면 적대적 M&A는 원천봉쇄된다. 지난해 정부는 재계 요청에 따라 재벌 금융회사가 보유한 계열회사 지분에 대해 의결권 제한을 풀어주었다. 적대적 M&A 방어가 그 명분이었다. 분식회계 파문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최대주주 지분이 공중에 뜨게 될지 모를 SK(주) 지분을 크레스트 시큐러티즈가 12% 넘게 매집했음에도 적대적 M&A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적대적 M&A에 대한 위협이 없다면 그린메일도 애초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적대적 M&A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사실 따로 있다. 경영권 안정을 내세우며, 각종 재벌개혁 정책을 뒤로 돌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크레스트의 이번 SK(주) 주식 매집이 SK그룹과 아무 관련 없이 이뤄졌다면, 재벌의 모기업도 경영을 잘못할 경우 적대적 M&A 위협에 얼마든지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최대주주가 된 크레스트쪽은 앞으로 SK(주)에, 지분에 맞는 경영참여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경영권 위협이 아니라 주주로서의 당연한 권리행사다. 재벌 오너들이 이를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으면 얼마든지 보약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재벌들이 이를 계기로 경영권 보호장치를 강화하라고 요구하면, 그것은 SK그룹 사태의 근본원인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방증이 될 뿐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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