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구조본 해체로 재계에 미묘한 파장… 정부도 재벌 지배구조 개선 위해 지주회사 전환 촉진
LG그룹이 4월부터 구조조정본부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해 재계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관계자가 재벌 구조본의 ‘폐해’를 거론했다가 재계의 반발이 일자 ‘폐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발 물러선 적이 있다. 그런데 LG가 나서서 정부의 은근한 기대를 충족시켜준 것이다. LG는 정부와 의견을 조율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재계는 이를 계기로 정부가 구조본 폐지를 본격적으로 요구하는 것 아니냐며 긴장하고 있다.
구조본, 이름만 바뀐 비서실
재벌그룹에 구조본이란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의 일이다. 물론 그 뿌리는 과거 회장실·비서실과 같은 조직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적은 지분을 갖고 있는 총수일가가 계열사들의 순환출자로 내부지분을 높여 전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기업 경영도 계열사 단위가 아니라 그룹 단위로 이뤄진다. 따라서 그룹 경영에 대한 총수의 의사결정을 돕고, 계열사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총수의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분을 관리하는 조직들을 만들어왔는데, 회장실·비서실·기획조정실 등의 이름을 가진 조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직은 계열사의 비용부담으로 총수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한다는 점에서 불법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각종 불법·탈법 행위를 지휘하는 중심부가 되기도 했다.
비서실은 외환위기에 대한 재벌책임론이 부각되면서 결국 폐지의 운명을 맞게 됐다. 재벌들은 98년 초 지배구조 개선안을 통해 앞다퉈 비서실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대신 구조조정본부라는 이름의 새 조직을 만들었다.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계열사의 의사결정을 조율할 필요성이 있다는 명분이었다. 문제는 구조본이 기능과 인력을 조금 줄였을 뿐 과거의 비서실과 거의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SK그룹에 대한 최근 검찰수사에서 불법행위를 총지휘한 곳이 구조본으로 밝혀진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LG의 구조본 폐지 결정에 대해 시장은 환영으로 응답했다. LG가 구조본 폐지를 발표한 3월25일 종합주가지수는 15포인트가량 폭락했지만, LG그룹의 지주회사인 (주)LG의 주가는 소폭 올랐다. 그러나 재계는 구조본 폐지에 여전히 소극적이다. 한 재벌그룹 관계자는 “LG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에 구조본을 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곳은 아직 구조본과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조본을 폐지한다고 해도 어차피 이름만 바뀔 뿐, 비슷한 조직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는 시간이 문제일 뿐, 어차피 구조본을 해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 그러려면 LG처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SK·농심도 지주회사 추진
정부는 LG와 같은 지주회사 체제가 재벌 지배구조의 과도기적 대안이라고 본다. 지주회사란 자회사의 지분을 갖고 지배하는 회사를 말한다. 지주회사 체제에서는 총수가 여러 계열사의 지분을 가질 필요 없이 지주회사의 지분만을 갖고 지주회사를 통해 다른 회사를 지배한다. 지난 3월 초 지주회사 체제를 완성시킨 LG의 경우 (주)LG가 18개 자회사의 지배권을 갖고 있다. (주)LG의 최대주주는 구본무 회장, 허창수 LG건설 회장 등 구씨와 허씨 일가로, 지분의 53%를 갖고 있다. 순환출자로 지분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른 재벌과 달리 소유구조가 간명하다. 총수로서는 적은 지분으로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있다. 또 한 기업의 경영에 문제가 있어도 다른 기업이 말려들 소지가 크게 줄어드는 장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주회사 제도가 99년에 법적으로 허용됐는데, LG가 가장 먼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을 시도한 것은 복잡한 지분구조 때문으로 보인다. LG는 구씨와 허씨 두 가문이 동업을 통해 성장한 재벌로, 2세, 3세에게 지분이 상속되면서 소수지분을 가진 대주주의 특수관계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주)LG의 경우만 해도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수가 90명에 이른다. LG는 계열사들을 분할합병하는 방식을 통해 지주회사로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집중시켰다. 이를 통해 지주회사 편입이 불가능한 금융계열사와, LG전선 등 4개 계열사를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주)LG의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LG의 지주회사 시스템은 우리나라 재벌 지배구조의 새 대안으로 거론된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뒤 첫 간부회의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시급한 문제다.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 형태로 당장 바뀌기는 힘든 만큼 그 전 단계로 지주회사로의 전환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SK그룹의 경우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을 모색하다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면서 장래가 불투명해졌으나, 그룹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농심도 지난 3월25일 7개 계열사를 하나의 지주회사 아래 묶겠다고 공표했다. 삼성증권은 이에 대해 “복잡한 지분구조가 정리됨에 따라 투명한 지배구조를 기대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구조본까지 폐지하기로 한 LG의 지배구조도 아직 ‘모범’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LG는 구조본을 폐지하는 대신 정도경영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자회사의 감사위원회로부터 요청받은 경영진단 활동을 맡아서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팀이 자회사 파견인력으로 구성될 경우 자회사의 비용으로 지주회사 일을 하는 셈이 된다. 또 2005년부터 자회사 매출액의 일정비율을 브랜드 사용료로 받기로 한 것도 같은 지적을 받고 있다. LG가 그룹의 공동업무를 LG투자증권 지배 아래 있는 LG경영개발원에 위탁할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서도 참여연대는 “이를 통해 현행 지주회사 규제의 핵심인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 간 구분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논평했다.
지주회사 설립요건, 완화냐 강화냐
삼성과 같은 재벌은 지주회사 전환 자체에도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현행법상 지주회사는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낮춰야 한다. 또 자회사로 편입할 회사에 대해 상장사는 30% 이상, 비상장사는 5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상장사 시가총액만 수십조원에 이르는 삼성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물론 기업분할과 합병 등을 계속하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면 지주회사에 대한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너무 낮아져 지배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재계는 이런 이유 때문에 지주회사의 설립요건을 완화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부채비율 100% 요건을 완화하고 자회사의 지분요건도 낮춰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빚을 내서 많은 자회사를 거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오히려 지주회사의 설립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여연대는 “지주회사의 자회사 지분보유 최저한도가 낮아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에 이해상충 소지가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주회사의 설립요건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의 경우 지주회사는 자회사의 지분을 거의 100% 소유하고, 자회사는 놔둔 채 지주회사의 주식만 공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주회사 설립요건의 큰 틀은 바꾸기 어렵다는 쪽이다. 그러나 재벌들의 지주회사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채찍과 당근을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쓸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2월17일 서울지검 수사관들이 SK빌딩에서 압수수색을 통해 입수한 자료를 나르고 있다. SK그룹의 불법행위를 총지휘한 곳이 구조조정본부였다.

LG그룹은 3월 초 지주회사 체제를 완성시켰다. 구조조정본부 폐지는 지주회사기 때문에 가능했다(왼쪽). 지난해 12월20일 송년모임을 갖고 있는 전경련 회장단. 재계는 지주회사 설립요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