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위험 기준에 따라 ‘살생부’ 마련… 마지막 기회임에도 도처에 암초 놓여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경제가 12월에 폭삭 주저앉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2단계 금융구조조정 추진계획’이란 이름을 빌려 정부가 ‘부실기업 정리계획’을 발표한 뒤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간부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고백이다. 부실기업들을 과감히 정리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않으면, 12월 회사채 만기집중과 맞물려 경제가 대혼란에 빠지는 사태가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회사채 만기 앞두고 ‘12월 위기론’ 무성 
   
 
12월 위기론은 금융시장에서는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금감원 집계에 따르면 오는 12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는 무려 10조6046억원어치에 이른다. 구제금융사태 직후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발행했던 것들이다. 9월부터 11월까지 월평균 3조원가량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는 것과 비교하면, 무려 3배가 넘는 물량이 몰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금시장의 중개기능은 완전히 마비돼 있다. 회사채를 주로 소화해주던 투신사로는 자금유입이 끊긴 지 오래다. 종금사들도 예금이 빠져나가 제구실을 못하는데다 돈이 몰리는 은행들은 구조조정을 앞두고 여전히 몸을 사린다. 금감위쪽은 공식적으로는 12월 위기론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왔다. 서울보증보험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사채 보증규모를 크게 늘리고, 총 20조원 규모의 채권펀드를 조성해 신용등급이 나쁜 회사채를 소화하면 상황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 관계자들은 금융시장 경색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12월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 정부가 단기적으로는 금융시장에 더 큰 충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부실기업 솎아내기에 나선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 풀이된다. 부실기업은 퇴출시키고, 회생시킬 기업을 확실히 살려주면 불확실성이 제거돼 시장에 ‘피’(돈)가 다시 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온 금융·기업구조조정이 상당부분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감위 관계자는 “지난해 공적자금을 추가조성해 구조조정을 더 가속화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경기 호전, 주식시장의 활황에 취해 추가구조조정에 미적거리고 올해 초에는 총선 일정에 휘말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화를 자초한 셈이다. 특히 이헌재 경제팀은 “공적자금을 추가조성할 필요가 없다”는 스스로의 발언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올해 하반기 들어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반도체 가격의 하락, 자금경색의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경제팀은 최근에야 기업구조조정의 강력 추진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뜩이나 대우차 매각 실패까지 겹쳐 주식시장은 급락의 길로 접어든 뒤였다. 
  정부는 50조원의 공적자금 추가조성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기업구조조정 가속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0월5일 부실기업 처리지침을 담은 ‘잠재부실기업 신용위험 판정기준’을 은행들에 내려보냈다. 이른바 ‘기업 살생부’를 작성하는 기준이 마련된 셈이다. 
  큰 줄기는 워크아웃·법정관리·화의기업과 함께 새 자산건전성분류기준(FLC)으로 ‘요주의’ 이하로 분류되는 업체,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 1 이하인 기업과 기타 은행들이 특별관리를 하고 있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회생가능성 여부를 판정하라는 것이다. 금감위는 “판정대상에 올릴 기업이 150∼200개쯤 될 것”이라고 밝혔다. 워크아웃업체가 32개, 법정관리·화의업체가 80여곳 가까이 되니, 나머지 업체 중에서 40∼90곳이 판정대상에 오르는 셈이다. 
  대우계열사를 제외한 32개 워크아웃업체 가운데는 건설, 철강업종 등에서 5개사가 기업구조조정위원회로부터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이미 판정을 받았다. 또 법정관리·화의업체에 대해서는 지난 7월 채권단이 1차 판정을 해 그 중 17개 업체가 ‘불량’ 또는 ‘미흡’ 판정을 받았다. 시멘트업체를 포함해 60대 계열의 모기업 가운데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5∼7곳도 이번에 중점심사를 받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대량실업에 대한 고려, 빠듯한 일정 등 고민 
 
 정부 지침은 유동성 문제가 일시적인 기업에 대해서는 지원을 하되, 구조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들을 가려내 구조조정을 하라는 것이다. 물론 자구노력을 통해 회생이 가능한 업체에 대해서는 출자전환을 통해 회생시키고,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부실업체만 법정관리나 청산 등으로 처리할 예정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외견상 정상적으로 영업을 해온 기업들은 대체로 출자전환 등으로 회생시키는 데 주력하고, 이미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등을 받고 있는 기업 중 회생불가능한 업체들은 정리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종적인 판정권이 은행들에 맡겨져 있어 ‘마지막 기회’라는 부실기업 정리가 제대로 이뤄질지 의심하는 시각도 여전하다. 그동안 은행들은 여신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대손충당금을 더 쌓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왔다. 금감위는 이에 대해 “은행으로서는 이번이 부실을 정리할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한다. 이번에 부실기업 정리로 생긴 손실은 은행 구조조정 전에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보전해주지만 부실기업을 그대로 끌고갔다 훗날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부실에 대해 책임을 면제하겠지만, 훗날 문제가 생기면 은행 경영진을 문책하겠다고 엄포도 놓았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도 구조조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실업’문제다. 건설업종과 관련 산업은 이번 부실기업 정리 과정에서 가장 파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하다. 대형 건설업체를 무너뜨릴 경우 수많은 하청업체가 함께 무너진다. 외환위기 뒤 낮아진 실업률이 다시 높아질 경우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더 집어넣자니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기업주들의 반발도 무시 못할 요소다. 자구노력을 통해 회생이 가능한 기업은 감자 등의 손실분담 절차를 거친 뒤 출자전환을 하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그러나 해당 기업이 강력히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감자 뒤 출자전환을 하면 대주주의 지분율이 크게 낮아져 경영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업주가 반발하면 여신 중단 등으로 압박하는 수가 있지만, 어느 은행장이 먼저 나서서 손에 ‘피’를 묻히겠느냐는 것이다. 
  정치적 고려 때문에 정리해야 할 기업을 정리 못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많다. 한 증권사 투자전략팀장은 “구조조정은 살생부를 만들어 한꺼번에 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죽어가는 기업을 그대로 죽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지금까지 그렇게 못해 온 정부와 은행이 어설픈 기업들만 정리하고 정작 시장에서 우려하는 기업을 그대로 두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결정은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정부는 10월중 부실은행에 대한 경영개선계획을 평가해 11월중에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기업구조조정도 이때에 맞춰 끝을 내야 한다. 물론 은행이나 정부나 이미 기업들에 대해 충분히 상황을 알고 있으므로, 조사에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업 하나를 살리고 죽이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감위 관계자는 “코브라 헬기도 띄우고, 필요하면 스텔스기를 동원해 폭격도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은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을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마지막 기회인데 그냥 넘어가겠느냐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거창한 계획이 용두사미로 끝난다면 우리 경제의 앞날은 더욱 캄캄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 분명하다. 경영권을 뺏기게 될지 모르는 기업주도,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르는 노동자도, 자금시장 경색과의 마지막 승부에 나선 정부 관계자들도 다같이 긴장을 풀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을이 깊어간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jeje@hani.co.kr 
   

12월 위기론은 금융시장에서는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금감원 집계에 따르면 오는 12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는 무려 10조6046억원어치에 이른다. 구제금융사태 직후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발행했던 것들이다. 9월부터 11월까지 월평균 3조원가량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는 것과 비교하면, 무려 3배가 넘는 물량이 몰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금시장의 중개기능은 완전히 마비돼 있다. 회사채를 주로 소화해주던 투신사로는 자금유입이 끊긴 지 오래다. 종금사들도 예금이 빠져나가 제구실을 못하는데다 돈이 몰리는 은행들은 구조조정을 앞두고 여전히 몸을 사린다. 금감위쪽은 공식적으로는 12월 위기론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왔다. 서울보증보험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사채 보증규모를 크게 늘리고, 총 20조원 규모의 채권펀드를 조성해 신용등급이 나쁜 회사채를 소화하면 상황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 관계자들은 금융시장 경색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12월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 정부가 단기적으로는 금융시장에 더 큰 충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부실기업 솎아내기에 나선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 풀이된다. 부실기업은 퇴출시키고, 회생시킬 기업을 확실히 살려주면 불확실성이 제거돼 시장에 ‘피’(돈)가 다시 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온 금융·기업구조조정이 상당부분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감위 관계자는 “지난해 공적자금을 추가조성해 구조조정을 더 가속화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경기 호전, 주식시장의 활황에 취해 추가구조조정에 미적거리고 올해 초에는 총선 일정에 휘말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화를 자초한 셈이다. 특히 이헌재 경제팀은 “공적자금을 추가조성할 필요가 없다”는 스스로의 발언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사진/부실기업 가려내기 작업이 한창이다.채권단회의에서 은행관계자들이 고민에 빠져있다)

(사진/금감원 이성로 신용감독국장이 부실기업 판정 기준을 발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