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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비행기 대신 파리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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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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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질위험·경기침체에 전쟁까지, 악재에 악재가 겹친 한국 항공사들은 지금 떨고 있다

사진/ 3월21일 김포공항 도심공항터미널 4층에서 열린 아시아나항공 주주총회. 아시아나항공은 구조조정의 부진과 경영여건 악화로 올해 사업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승화 기자)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여행사인 L관광. 하루 수백명의 해외여행 예약을 받아온 이 여행사에 3월17일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아침부터 예약 취소자들이 대거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하루 동안 들어온 예약 취소자는 300여명. 평소 70~80명과 비교할 때 4배 가까운 수준이다. 그뿐 아니다. 하루 평균 500~600명이던 해외여행 예약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알고 보니 중국에서 발생한 괴질이 동남아로 번지면서 해외여행업계 전체가 신경마비 증세에 빠진 것이다.

운항편수 감축, 허리띠 졸라매기


이런 상황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됐다. 그리고 목요일인 3월20일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그러잖아도 전 세계적 경제불황 때문에 침체 분위기에 빠져 있는 관광업계 입장에서 보면 온갖 악재가 한꺼번에 터진 셈이다. 이 여행사의 해외여행 담당 상무는 “상황이 너무 어렵다. 광고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19일부터 모든 광고를 중단했다”고 말했다.

관광업계의 이런 사정은 항공사의 경영악화로 그대로 이어진다. 경제불황과 전쟁, 괴질 위험 등으로 인한 불안심리가 관광객들의 해외여행 발길을 꽁꽁 묶어놓는 것이다. 사실 항공업계는 세계적으로 9·11 테러 이후 제2의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간신히 정상을 되찾은 항공수요가 올해 들어 다시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2위 항공업체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 최근 파산을 신청하면서 항공업계는 흉흉한 분위기가 더해가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도 비상이 걸렸다. 승객이 크게 줄어들면서 몇몇 노선은 적자운항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항공사 경영상황을 보여주는 탑승률(유료승객/좌석)을 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대한항공의 탑승률(국제선 여객 기준)은 올 1월 74%에서 2월 75%를 유지하다 3월 들어 70%선으로 크게 떨어졌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3월이 항공업계 비수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생각보다 큰 폭으로 탑승률이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나항공은 더 심각하다. 1월 75%, 2월 70%로 하락추세를 보이다 3월 들어서는 65% 안팎으로 하락했다. 그나마 국내선 탑승률은 50~55% 수준이다. 좌석을 절반밖에 못 채우고 운항하고 있다는 얘기다.

항공사로서는 줄어든 승객을 억지로 늘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상황 타개를 위해 비용감소에 나섰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운항편수 감축이다. 대한항공은 3월19일부터 5월31일까지 인천-샌프란시스코 6회, 인천-호놀룰루 2회 등 모두 29편의 항공기 운항 감편에 들어갔다. 또 3월27일부터는 방콕 노선을 주 14회에서 11회로, 자카르타 노선을 주 5회에서 3회로 줄인다. 승객 감소도 감소지만 항공유 가격 상승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은 3월 초부터 마닐라 노선을 주 7회에서 주 5회로 감축 운행하고 있다.

전쟁 끝나면 북핵 위기 기다리고

사진/ 대한한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경제불황과 이라크 전쟁 등 갖가지 악재로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다. 운항 중인 대한한공 항공기와 출항을 준비 중인 아시아나 항공기.

아예 운휴에 들어간 노선도 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해외 여행지 가운데 하나인 괌·사이판이다. 이 노선은 국내 항공사들의 경쟁이 치열한 탓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각각 날마다 한편씩 항공기를 운항해왔다. 승객이 적더라도 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좌석이 썰렁한 항공기를 운항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3월3일 인천-사이판 노선 운휴에 들어갔다. 4월 말까지 한시적인 것이지만 재개 여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마찬가지다. 3월30일부터 인천-괌 노선 운휴에 들어간다. 일단 비수기가 끝나는 6월 말까지 운휴하기로 했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 괌 노선을 대한항공에, 사이판 노선을 아시아나항공에 몰아주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

운항편수 감축만이 아니다. 운항편수를 그대로 두면서 취항 항공기 규모를 작은 것으로 바꾸는 방법도 동원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3월 들어 인천-홍콩 노선에 취항하던 항공기를 소형 기종으로 변경했다.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항공유 값이라도 줄여보려는 생각이다.

항공업계 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근본적으로 깊어가는 경제불황에 원인이 있다. 지난해까지 호조세를 보이던 국내경기가 올해 초부터 위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용대출과 신용한도 축소로 인한 개인 자금유통 장애, 주식시장 침체, 경상수지 적자전환 등으로 국내경제가 몇달 사이 급속하게 위축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이라크전, 북한 핵위기, 괴질파동까지…. 항공사들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9·11 테러의 충격을 극복하고 2002년 비교적 양호한 경영실적을 거뒀다. 대한항공은 6조2천억원의 매출에 1119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아시아나항공은 2조5천억원의 매출에 1940억원의 흑자를 냈다. 2001년의 대규모 적자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올 초부터 항공업계에 드리운 불안의 그림자는 시간이 갈수록 현실화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세계경제가 불황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다 해도 우리에겐 북한 핵위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위기는 특히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항공사 관계자는 “외국인들은 북한 핵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내국인들의 여행수요가 위축된 데 이어 외국인들의 한국 방문까지 줄어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항공사 경영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보다 승객의 증감이다. 그리고 유가와 환율이다. 기본적으로 탑승률이 일정수준 이상을 유지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또 유가와 환율이 오르면 항공사 경영은 급격히 악화된다. 대한항공의 경우 항공유 가격이 배럴당 1달러 오를 때마다 300억원씩 순손실이 난다. 5달러만 올라도 1500억원의 현금이 그대로 날아간다는 얘기다. 환율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은 부대비용까지 합쳐 연간 1조원어치의 항공유를 도입한다. 환율이 5% 오르면 500억원의 비용이 그대로 추가된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마찬가지다. 환율이 오르면 또 항공기 도입에 따른 리스비용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

생존의 기로에 서다

경제불황·이라크 전쟁·북한 핵위기는 모든 상황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유가는 안정되겠지만 경제불황과 북한 핵위기는 여전히 항공업계를 압박할 것이다. 가장 안정적인 중국노선 현황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경제불황·이라크 전쟁과 상관없이 호황을 유지해온 한-중 노선의 승객들이 감소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올해 1월 중국노선 탑승인원은 지난해 1월에 비해 35% 증가했다. 그러나 증가율이 2월 27%, 3월 8%로 크게 위축되는 추세다.

국내 항공업계로서는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맞을 듯싶다. 따라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올해의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앞으로 회사의 운명이 갈릴 전망이다. 특히 부채가 많고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을 마무리짓지 못한 아시아나항공은 상황이 악화될 경우 생존의 기로에 설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소사장제 도입이나 적자노선 감편운항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올해 항공업계 위기는 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회사 차원의 대응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북한 핵위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국내 항공사들은 9·11 테러 때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1년 뒤 국내 항공사들의 운명을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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