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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충수에 막힌 ‘경제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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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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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차·한보철강 매각 둘러싼 혼선의 연속… 처리방향 오락가락하며 면피용 책임론만

휴일이던 지난 10월3일 오후 3시께. 나석환 한보철강 사장(법정관리인)은 휴대전화로 급한 연락을 받았다. 한보철강 매각을 전담하고 있는 인수기획단의 서용석 자산관리공사 팀장이었다.

서 팀장은 긴장된 목소리로 한보철강 문제로 급히 논의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산관리공사로 서둘러 와줄 것을 요청했다.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아셈타워에 있는 자산관리공사 안의 인수기획단으로 뛰어간 나 사장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한보철강 인수자로 내정돼 있던 미국의 네이버스컨소시엄이 최종적으로 인수를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포드의 대우자동차 인수포기 발표에 이어 또 한 차례 국가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악재가 터져나오는 순간이었다. 나 사장이 인수기획단에 도착했을 때는 네이버스컨소시엄쪽을 대표해서 인수의향서를 체결한 스틸코프 인터내셔널 코리아의 앤서니 G.피트렐로 사장의 사인이 붙은 A4용지 1장짜리 공문도 와 있었다. 한보철강 채권단 대리인인 법무법인 우방을 거쳐 팩시밀리로 인수기획단에 전달된 것이었다. 물론 인수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한보까지 국가경제를 잡는구나


이전에도 한보철강 매각 협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추측성 전망이 간혹 제기되기도 했지만 막상 파국으로 결론이 내려지자 정부와 채권단은 커다란 충격 속에 빠져들었다. 대우자동차 매각 실패에 연이어 터져나온 악재여서 정부와 채권단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매각 협상이 결렬된 뒤 대우자동차, 한보철강의 앞날은 짙은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정부나 채권단 모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핵심을 벗어난 책임론만 무성하다.

지난 9월15일 포드쪽의 포기선언 이후 대우자동차 처리를 둘러싸고 정부와 채권단이 보여준 모습은 한마디로 혼선의 연속이었다. 현대자동차가 인수하는 것은 국내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는 결과가 되므로 불가하다고 했다가 현대도 인수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번복했다. 현대가 우선 대우차를 인수하고 나중에 전략적 제휴 파트너를 끌어와도 된다고 했다가 다시 말을 바꾸기도 했다. 또 한달 안에 선인수-후정산 방식으로 매각을 추진하겠다고 했다가 인수 후보자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슬그머니 철회한 일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갈지자 걸음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번복과 혼선 끝에 대우차 채권단은 일단 제너널모터스(GM)에 매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있다.GM이 대우차를 일괄인수 하겠다는 뜻을 공식 표명했기 때문에 이는 채권단만의 희망사항은 아니다.그렇지만 대우차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GM이 대우차 일괄 인수 방침을 들고 나오기 직전 대우차 채권단은 분할매각도 가능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산업은행 엄낙용 총재, 한빛은행 김진만 행장 등 대우차 주요 채권금융기관 대표들은 10월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에서 대우계열 구조조정 추진협약운영위원회를 열고 인수자가 원할 경우 주채권은행이 대우차 계열사 매각을 전담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주)대우자동차와 (주)대우자동차판매 매각은 산업은행이, (주)쌍용자동차는 조흥은행이, (주)대우통신 보령공장은 한빛은행이, (주)대우캐피탈 매각은 서울은행이 각각 맡게 됐다. 이는 채권단이 대우차를 사실상 법인별로 분할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채권단의 이런 결정 직후 GM이 '일괄인수'라는 뜻밖의 카드를 들고 나온 것에 대해 우선협상의 주도권을 틀어쥔 뒤 정확한 실사를 통해 입맛대로 골라잡으려는 속셈이 강하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5일 주요 채권단 회의를 통해 분할매각 방안을 새롭게 확정했지만 대우차 문제가 가닥을 잡은 것은 전혀 아니다. 매각 방식의 변경이 매각의 가능성을 얼마나 높여줄지 미지수인데다 법인별 분할매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GM의 대우차 '일괄인수' 카드의 속셈

(사진/대우자동차와 한보철강의 매각 협상 실패에 따른 책임론은 희생양 만들기라는 지적이 많다.대우차 주요 채권금융기관 대표들 회의장면)
한보철강의 앞날도 오리무중이긴 마찬가지다. 한보철강 채권단은 지난 10월4일 운영위원회를 열었지만 한보철강 처리에 대한 이렇다할 청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매각계약을 파기한 네이버스컨소시엄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애매한 의지 표명만 했을 뿐이다.

한보철강의 매각자문을 맡은 법무법인 우방의 최승순 변호사는 “채권단은 채권회수와 공장의 정상화를 위해 매각을 신속히 추진할 것”이라며 “현재 한보철강의 A지구 봉강공장이 정상 운영되고 있는데다 여유자금도 320원이나 있어 오는 2003년까지 신규자금 지원이 필요없기 때문에 서둘러 헐값에 매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우차나 한보철강 문제는 모두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솔직히 말해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게 정답 아닌 정답이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일부 언론의 마녀사냥식 문제 제기에 휩쓸려 대뜸 ‘매각실패 책임론’을 들고나와 문제를 더욱 꼬이고 만들었다.

“(대우자동차와 한보철강의 계약파기 사태에 대해) 이것은 누가 봐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경위와 결과를 엄밀히 조사해 계약 관련자들의 책임을 지우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김대중 대통령, 10월4일 4대부문 개혁과제 합동보고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우차 매각 실패의 원인이 포드 자체 사정에도 있다고 보지만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면 묻겠다. 한보철강 매각이 실패한 데 대해서도 이번주안에 정부와 채권단에 대해 책임추궁이 이뤄질 것이다.”(진념 재정경제부 장관, 10월5일 기자간담회). “대우차의 경우 오호근 대우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이 매각협상을 주도한 만큼 협상 과정에 잘못이나 실책은 없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조사결과 협상 과정에서 현저한 실책이나 잘못이 드러날 경우 대우구조조정협의회를 해산하거나 오호근 의장의 해임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금융감독위원회 고위관계자, 10월5일).

구속력 있는 조건은 국제관행 아니다

(사진/한보철강의 주요 채권 금융기관 대표들이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론이 말인즉 옳은 듯하나 대우차나 한보철강의 문제에 이르면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관료들이 민간부문에서 희생양을 찾아내 책임을 모면하려는 의도마저 엿보인다.

대우차 매각실패를 두고 책임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문제삼는 점 중 하나가 ‘우선 협상 대상자를 왜 포드 한곳으로 정해 선택의 폭을 좁혔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적절한 지적이 아니다. 포드가 제시한 가격이 7조원대로 4조원대를 써낸 GM이나 현대컨소시엄에 비해 워낙 차이가 컸다. 오호근 의장은 이와 관련해 “부수적인 조건까지 감안하면 GM쪽이 써낸 값을 받아들일 경우 채권단에 돌아갈 몫은 한푼도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언론을 비롯한 외부의 평가도 대우차 매각은 대성공이란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포드가 계약을 깰 경우에 대비해 위약금 부과 등 ‘구속력 있는’(binding) 조건을 걸었어야 했다는 비판 역시 딴죽걸기 수준을 넘지 못한다. 국제 상거래 관행상 계약체결 단계에 이르지도 않은 단계에서 위약금이나 보증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는 마치 집사러 온 사람을 상대로 집구경 값을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팔 집이 좀 그럴듯하고 구경할 사람이 줄을 섰다면 입장료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나 벽이 갈라지고 물이 샌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보철강과 관련한 책임론은 대우차보다 더욱 허구적이다. 대우차는 그나마 막판 입찰 단계까지 경쟁관계가 유지돼 형식적으로나마 3파전의 양상이 유지됐지만 한보철강은 네이버스컨소시엄 외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애물단지 매물이었다. “동국제강이 막판까지 네이버스컨소시엄과 경쟁하다 입찰에는 참여하지도 않았다.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유찰 끝에 수의계약 방식을 통해 네이버스를 우선 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인수 의향서를 맺었던 것이다.”(금감원 관계자)

출발 때부터 매도자쪽이 많은 한계를 안고 있던 실정에서 위약금을 물리고 보증금을 받았어야 했다는 주장은 현실성을 결여한 실익없는 주장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책임론이 타당하다손 치더라도 대우차, 한보철강 문제에서 시급한 일은 정부, 채권단, 그 밖의 이해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 지혜를 짜내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일이다. 그래도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길 기대하기 어려운 판에 책임론 제기는 너무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통령이 “책임 운운” 한마디 하자마자 재경부, 금감위가 기다렸다는 듯이 누구를 조사하고 누구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 모양새는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소모적 논쟁은 그만, 확고한 처리방향을…

한보철강은 그나마 법정관리 상태에 있어 당장 자금 투입이 급하지 않으나 대우차는 사정이 다르다. 대우차는 지난해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지금까지 신규자금을 2조2천억원이나 지원받았다. 지금도 한달 평균 1천억원 이상의 자금이 지원돼야 가동될 정도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처리 방향을 빨리 결정지어야 할 이유이다. 처리를 늦출수록 회사는 더욱 망가질 뿐이라는 지적이 많으며 지금까지 나타난 현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우자동차 관계자는 “매각 외의 다른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시뮬레이션(가상실험)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우차의 가치가 어떻게 되는지를 우선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뒤에 매각을 하든, 청산을 하든 결정을 내리는 게 올바른 수순이란 지적이다.

물론 이런 제안 역시 정답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다. 대우차 문제는 채권단의 경제적인 논리(채권 회수율)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인 거대 이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모적인 책임 논쟁에서 벗어나 처리방향을 결정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점이다.

대우자동차 매각추진 일지

99년 3월 22일

 대우,삼성차 자동차-전자 빅딜
 (대규모 사업교환)방침

6월30일

 대우·삼성간 빅딜 무산
 (삼성차법정관리)

11월25일

 대우차 기업개선 작업(워크아웃)  방안 확정

2000년 2월11일

 대우차 매각등을 포함한 대우계열
 기업개선 및 매각작업을 총괄하는 '대우계열구조조정추진협의회 설치

2월15일

  대우계열 구조조정추진협의회,국내 외 자동차업체를 대상으로 입찰참여 초청장 발송

2월말

 현대·GM·포드·다임러크라이슬러·피아트 등 5개업체의 인수의향서 접수

3월6일~6월9일

 1차 실사 실시

5월15일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5개사 앞으로 입찰제안서 발송

6월26일

 1차 입찰 제안서 접수

6월29일

 우선 협상 대상업체로 포드 선정

7월10일~8월19일

 포드,2차 정밀실사 실시

9월15일

 포드,대우차 인수 포기 선언

한보철강 매각 추진 일지

97년 1월23일

 부도

4월15일

 채권금융기관 운영위원회,제3자 매각 결의

7월29일

 1차 입찰 결과 응찰자 없어 유찰

8월21일

 동국제강,포항제철 등 공동의 자산인수 의향서 접수(매각방식등 문제로 무산)

98년 4월20일

 국제매각 주간사로 BTC선정

7월2일

 채권금융기관운영위,국제입찰에 의한 매각 결정

12월17일

 2차 본입찰유찰 및 수의방식으로 매각 추진 결정

99년 7월13일

 미국 네이버스 컨소시엄을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

8월4일

 의향서 체결

2000년 3월8일

 데이버스 컨소시엄과 본계약 체결

5월19일

 매수인 국내법인 설립 (스틸코프인터내셔널코리아)

9월30일

 본계약종료예정

10월3일

 네이버스컨소시엄,계약 파기 일방 선언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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