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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 정부가 재벌세금 낮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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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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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 경제부총리의 법인세율 인하 발언 논란…재벌개혁의 앞날을 예고하는가

“한나라당이 집권한 줄로 잠시 착각했어요.”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최근 법인세율 단계적 인하론을 제기한 데 대해 금융계 관계자가 한 말이다. 법인세율 인하는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재계의 요구를 수렴해 내세운 주요 공약 중 하나였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법인세율 인하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들어 임명된 경제부총리의 취임일성이 ‘법인세율 인하’였으니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세율 높지 않아


사진/ 법인세율 인하계획을 밝혀 논란의 초점이 된 김진표 경제부총리(왼쪽에서 네 번째)가 국책연구기관장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김 부총리는 3월4일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나와 “동남아 등 경쟁국들이 법인세를 낮추는 추세인 만큼 (우리나라의 법인세 부담도) 이들 국가들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법인세 감면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자영업자의 소득을 양성화해 거기서 얻어지는 세원만큼 세율을 낮추되 임기 5년간 세율 인하폭을 미리 예고해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법인세율 인하 주장이 나올 때면 으레 따라붙는 ‘투자 활성화’론이었다.

개인의 소득에 매기는 세금이 소득세라면, 법인세는 법인(기업)의 수익에 매기는 세금이다. 세율은 과표가 1억원 이상일 경우 27%, 1억원 이하일 경우 15%다. 그러나 27%를 적용받는 기업은 전체의 16%가량이고, 대부분의 기업이 15%를 적용받는다. 그래서 조세부담이 큰 대기업들은 이런 세율을 오래전부터 내려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지난 2001년에는 재계의 요구로 한나라당이 2%포인트 인하를 요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가 1%포인트 인하로 여야 간 타협을 보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김대중 정부로서는 재계의 강력한 요구를 마냥 거스를 수만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1%포인트 인하된 이후에도 재계의 세율 인하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5월 ‘법인세제 개편방안’이란 보고서를 통해 법인세율의 단계적인 대폭 인하를 거듭 요구했다. 다른 어떤 경제단체보다 전경련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법인세율 인하가 전경련 회원사인 재벌들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2001년에 국회가 세율을 1%포인트 내렸을 때 세수 감소분 7500억원 중 5500억원이 상위 0.3%의 대기업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선거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견해는 확고했다. 노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감세정책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감세로 인한 가처분 소득의 증가가 소비나 투자 등 지출 증가로 연결되지 않아 경기부양 효과는 미미하고 재정 건전성만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우리나라의 법인세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높은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은 최고 35%, 일본은 30%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도 31.4%다. 김 부총리가 언급한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홍콩이 16%, 싱가포르가 22%, 대만이 25% 등으로 우리보다 낮지만, 대만을 제외하면 도시국가여서 우리와 직접 비교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2001년 말 법인세율 인하 논란 때 국제통화기금(IMF) 서울사무소장 폴 그룬왈드는 “한국에서 법인세가 투자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감면혜택 축소’라는 자가당착

그래프: 우리나라의 내국세 수입 비중(2000년) 자료: 조세연구원

반면 법인세율 인하는 세수를 큰 폭으로 감소시킬 위험이 있다. 지난 2000년 내국세 수입 71조원 중 법인세는 17조8천억원으로 25.1%를 차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법인세율을 1%포인트 낮추면 세수는 1조원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지속적인 이자부담, 사회복지의 확충을 위한 정부지출 수요 증가 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재정형편은 갈수록 빠듯해지고 있다. 따라서 세금을 줄이기보다는 조세 형평성을 높이면서 세금을 더 걷는 방법을 찾는 것이 오히려 시급한 실정이다.

김 부총리의 발언 이틀 뒤 나온 한국조세연구원의 보고서는 그가 이런 문제를 얼마나 신중히 고려했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조세연구원은 6일 ‘참여정부의 재정운영방안’이란 보고서에서 올해 당장 정부 재정이 적자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국세수입 예산은 113조6152억원인데, 실제 국세 수입은 1조5천억원가량 모자라는 112조3천억원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상속·증여세를 강화하는 등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세제개편에 따른 세수증대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부총리는 이에 대해 “법인세율 인하로 감소되는 세수를 비과세 및 감면혜택을 축소해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또한 자가당착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은 “이럴 경우 기업의 세부담은 줄어들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기업의 세부담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업의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따져물었다.

세제실장을 지낸 자타가 공인하는 세제 전문가인 김 부총리는 재경부 차관 시절만 해도 법인세율 인하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는 2001년 말 국회 법사위 답변에서 “법인세율이 주민세까지 포함하면 30.8%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법인세율이 높지 않고 세경감을 통해 투자촉진 효과를 거두는 것은 간접적이고 제한적이다”고 강조했다. 경기가 불확실할 때는 세금을 깎아준다고 해서 투자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김 부총리는 조세 형평성 차원에서도 법인세 인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인세 경감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아무래도 대기업이다. 세금을 줄이고 세출을 축소하지 못하면 그 부담을 누군가 져서 메워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런 그가 불과 15개월 만에 자신의 견해를 바꾼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김 부총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그가 세율 인하의 근거로 내세운 홍콩이 법인세율을 오히려 높이기로 한 것이다. <아시안월스리트저널>은 3월5일 “홍콩이 현행 16%인 법인세율을 다음달부터 17.5%로 올리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홍콩이 20년 만에 법인세율을 올리기로 한 것은 늘어나는 재정적자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수습, 그러나 불씨는…

사진/ 자타가 공인하는 세제 전문가인 김진표 부총리는 재경부 시절만 해도 법인세율 인하에 반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법인세율 인하 논란은 노무현 대통령의 수습에 의해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노 대통령은 김 부총리의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다음날 수석 및 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법인세 인하 문제는 재경부의 진의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 조세형평이 후퇴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발언은 법인세 인하론을 완전히 일축한 것이 아니다. 재경부 최경수 세제실장도 “대기업들에 적용돼온 조세감면 혜택을 대폭 줄이고 법인세율을 인하하면 조세형평도 함께 높아질 것”이라며, 세율 인하를 계속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조만간 법인세 논란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한 경제학자는 이번 법인세 논란이 재벌개혁의 앞날을 암시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재벌이 정부를 압박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투자다. 재벌 비중이 높은 우리 경제에서 재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투자가 쉽게 살아나기 어렵다. 가뜩이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앞으로 재벌들이 ‘투자’를 내세워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이에 맞춰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재벌개혁은 또다시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어쨌든 재계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김 부총리의 법인세율 인하 발언으로 지금 한껏 부풀어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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