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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종이 종말론’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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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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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서류 없는 사무실 예언은 빗나가…정보통신기기 발달이 오히려 종이소비 촉진시킨다

데이콤은 2001년 한때 <데일리뉴스>라는 웹진을 펴냈다. 온라인으로 발간하는 웹진사보였는데, 지금은 더 이상 웹진을 볼 수 없다. 몇 개월간 내다 접고 말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사보를 <뉴스레터>로 바꿔 2천부가량 오프라인 종이로 찍어내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웹진으로 사보를 펴냈는데, 몇번 펴내고 나서 관찰해보니까 모니터상으로 사보를 보는 직원이 점점 줄어들었다. 자기 업무도 바쁘고 그래서 잘 보지 않더라. 결국 다시 종이에 인쇄한 사보를 찍어내는 쪽으로 바꿨다.” 데이콤쪽 설명이다.

해마다 꾸준히 소비 늘어

사진/ 디지털 시대에도 종이 소비량은 매년 4% 가까이 늘고 있다. 신무림제지 진주 공장. (신무림제지 제공)
종이 사보를 재발간한 뒤 직원들은 예전처럼 사보를 열독하기 시작했다. 짬이 날 때 책상 위에 놓인 사보를 수시로 보거나 출·퇴근할 때 갖고 다니며 보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실에 들고 가 읽기도 했고, 사보에 난 내용을 놓고 직원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풍경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에 종이는 소멸할 것”이라는 ‘종이 없는 사회’ 도래는 오래전부터 입에 오르내렸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컴퓨터 단말기의 등장을 ‘서류 없는 사무실’이 개막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전자사무실로의 이행을 ‘사무실 지진’이 다가온다고 덧붙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 1999년 펴낸 <생각의 속도>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에 따라 ‘종이 없는 사무실’이 조만간 실현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대표적 정보통신업체인 데이콤의 웹진 사례는 이런 종이몰락 예언의 오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적어도 아직까지 앨빈 토플러나 빌 게이츠의 예측은 빗나갔다. 한국제지공업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종이 생산량은 981만t으로 2001년보다 5% 증가했다. 종이 생산량은 해마다 3∼5% 정도 꾸준히 늘고 있다. 올해 국내 종이 생산량은 사상 처음으로 1천만t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량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국내 종이 소비량은 2000년 676만t에서 지난해 734만t으로 늘었다. 1990년대 말 이후 해마다 4% 안팎씩 성장하고 있다.

종이와 인터넷 둘 다 인류의 삶을 바꿔놓은 획기적 발명품이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문명은 문자를 통해 저장되고, 종이를 통해 기록·전달되었다. 인류문명은 종이 위에 구축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강국인 우리나라에서 종이산업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는 까닭은 뭘까. 무엇보다 종이에 익숙한 ‘생활습관’을 들 수 있다. 단말기로 전자문서를 볼 수 있지만 종이로 뽑아보는 습관이 디지털 세상이라고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종이문서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손삼수 부장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는 죽을 거라고 점쳤지만 디지털과 종이산업은 현재 함께 성장하고 있다. 문서를 종이로 접하던 습관이 한순간에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나아가 정보통신기기의 발달이 오히려 종이수요를 촉진하고 있다. 컴퓨터·프린터·복사기 등 정보기기가 사무실이나 집집마다 보급되면서 종이소비가 더 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 이후 작성한 문서를 누구나 쉽게 종이에 출력할 수 있게 되면서 종이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인쇄용지의 국내 소비량은 2000년 118만t에서 지난해 134만t으로 크게 늘었다. 사무실마다 여전히 엄청난 양의 A4 용지에 묻혀 살고 있는 셈이다.

종이의 ‘향기’를 대체할 수 있을까

사진/ 전자파일을 종이에 출력 중인 한 사무실. (이용호 기자)
인터넷·이메일의 확산으로 정보량이 폭증하면서 종이에 인쇄할 지식정보도 크게 늘었다. 서울대 이학래 교수(임산공학과)는 “과거에는 정보량이 늘어난 만큼 종이소비량도 똑같이 증가했다. 이제는 종이소비량이 정보증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정보량이 워낙 큰 폭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종이소비도 자연히 증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린터·복사기업체인 한국휴렛팩커드(HP)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날마다 찍어내는 모든 인쇄물 가운데 단 4%만이 프린터 등 디지털 기기를 통해 인쇄되고 있다. 나머지는 아직도 아날로그식 인쇄를 하고 있는데, 정보들이 디지털 문서로 나돌아다니는 디지털 사회가 진전될수록 종이수요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종이가 가진 독특한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인터넷이 정보탐색과 조사에 독보적인 강점이 있고, 이메일, e-북, e-출판 등 새로운 정보전달 수단이 날마다 등장하면서 종이 위에 담겨 있는 정보들을 디지털화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음미하고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지식정보 제공수단으로서는 종이책을 따라잡을 수 없다. 모니터 위에 떠 있는 문서정보가 종이의 ‘향기’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한장 한장 넘기는 ‘책 읽는 재미’를 디지털이 채워주기도 어렵다.

‘e-편한 세상’이라지만 ‘보는’ 측면에서 종이매체의 편리함은 디지털 문서를 훨씬 앞선다. 노트북에 들어 있는 전자파일을 편히 누워 들여다보기는 아무래도 힘들다. 대신 종이책은 아무 데다 들고다니며 볼 수 있고, 여러 장을 펼쳐놓고 비교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게다가 디지털 문서는 종이와 달리 일부만 훼손되더라도 전체를 다 볼 수 없다. 디지털 문서를 모아둔 사이트가 사라질지도 모르고, 컴퓨터 바이러스 공격을 받아 전자파일이 몽땅 날아가버릴 위험도 있다. 인터넷에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떠돌지만 자료보관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오래돼 누렇게 변한 종이는 손만 대도 부슬부슬 떨어진다. 하지만 ‘지(紙) 천년 견(絹) 오백’(옷감에 쓰는 천은 500년 가지만 종이는 1천년 간다)이란 말이 보여주듯 종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만든 팔만대장경 목판은 조금씩 썩고 있지만 한지로 된 경전은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정도다. 용인송담대학 신준섭 교수(제지·패키징시스템)는 “종이는 굴뚝산업이 아니고 첨단과학이 집대성된 소재다. 기저귀 등 위생용지뿐 아니라 예전에 상상하지도 못한 여러 종이들이 자꾸 생겨나고 있다. 로켓 핵탄두 안에도 특수처리한 종이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종이가 디지털 시대에 맞게 새 옷으로 갈아입는 변신을 거듭하는 것도 종이소비 증가를 낳는 한 요인이다.

첨단 종이제품 쏟아진다

사진/ 한솔제지 장항 공장. 종이 수요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한솔제지 제공)

전자문서가 종이를 대체할 거라고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종이들이 다른 물질들을 끊임없이 대체하고 있다. 종이팩이 소주병을 대체하고, 미국의 장난감 제조업자는 종이로 만든 1회용 휴대폰까지 개발했다. 두꺼운 종이 위에 전자회로를 인쇄한 종이휴대폰으로, ‘디지털화한 종이’의 등장이다. 미세먼지도 허락하지 않는 반도체 공장에서는 찢어도 종이가루가 날리지 않는 무진지가 쓰이고 있다. 신 교수는 “종이를 가공처리하면 나무나 쇠보다 단단한 물질을 얻을 수 있다. 목재나 금속을 대체하는 종이개발도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종이소비량 가운데서 인쇄·필기용은 의외로 적다는 점이다. 국내 종이수요를 보면 골판지를 비롯한 각종 포장용 산업용지가 60%, 책을 만드는 데 쓰이는 종이는 24%, 신문용지가 12%, 나머지 4%는 화장지 등이 차지한다. 사과상자나 비스킷 포장지 등에 쓰이는 판지는 2000년 317만t에서 지난해 343만t으로 늘었다. 인터넷 쇼핑과 택배의 확산에 따라 종이의 쓰임새가 정보를 담는 매체보다는 포장용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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