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전당포? 폰뱅크라 불러다오!

448
등록 : 2003-02-27 00:00 수정 :

크게 작게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구식 전당포의 때를 벗고 다시 태어난 신종 금융·유통 복합점포

지난 2월19일,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 2층 상가에 자리잡은 ‘캐시캐시’(www.cashcash.co.kr). 예닐곱평 남짓한 매장에 젊은 여성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루이뷔통·구찌·셀린느·페라가모….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짜리 명품 핸드백들이 제각각 가격표를 달고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프라다·발리·베르사체 구두에다 페라가모 벨트도 보이고, 까르띠에·롤렉스 시계에서부터 수천만원짜리 파텍필립 시계도 있다. 죄다 내로라 하는 명품이다. 고급스런 체리빛 오크무늬목으로 산뜻하게 꾸민 매장 내부는 명품숍을 닮았다.

‘명품 전당포’ 뜬다

사진/ 명품을 주로 취급하는 ‘캐시캐시’ 매장. 은은한 실내 조명 아래 아늑하게 꾸민 공간은 백화점 명품 매장을 뺨칠 정도다.
“어, 엊그제는 없었는데 여기 새로 물건이 들어왔네” 자주 들르는 편인지 한 젊은 여성고객이 명품 숄더백을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진열된 명품들은 새것도 있지만 대부분 중고품이다. 명품 판매는 캐시캐시의 영업분야 중 하나일 뿐이다. 물건을 담보로 저당잡은 뒤 돈을 대출해주고, 고객들한테 의뢰받아 중고 명품을 팔아주기도 한다. 이른바 ‘명품 전당포’라고 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나 금 등 보석류뿐 아니라 노트북도 저당물건으로 받아주지만 주로 거래되는 품목은 명품이다.


그 사이 매장에 들어온 30대 남자가 붉은 헝겊주머니를 사승리(캐시캐시 대표)씨에게 내밀었다. 순금 10돈이었다. 남자가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 한잔 하면서 기다릴 동안 사씨가 물건을 찬찬히 살폈다. 잠시 뒤 캐시캐시쪽은 대출장부를 꺼내 남자의 인적사항 등 몇 가지를 적은 뒤 40만원을 그 자리에서 대출해줬다. 대출이자는 2만원(월 5%). 캐시캐시의 대출이자는 대출금의 3.5∼5%다. 골동품이나 주식증서를 저당잡고 대출해준 적도 있다. 대치점·압구정점에 이어 최근 강남점을 오픈했고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 울산점이 문을 열었다. 사 사장은 캐시캐시를 “기존 전당포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고 고객한테 다가서는 신개념의 소비자금융 전문회사”라고 말했다. 캐시캐시 간판은 ‘폰뱅크’(Pawn Bank)라는 낯선 이름을 달고 있다. 전당포란 말은 찾아볼 수 없다.

매장 한쪽에서는 루이뷔통 가방 3개를 놓고 20대 여성 손님과 캐시캐시쪽 사이에 흥정이 한창이다. 20대 여성은 갖고 있던 명품 가방 3개를 맡기고 돈을 대출받을까, 아니면 그냥 팔아버릴까 망설이고 있었다. “가방 안쪽 지갑이 없으면 상품 가치가 반으로 떨어져요. 손님은 120만원 주고 샀지만 살 때 가격만 생각하면 안 되죠. 이걸로 대출받아 쓰고 나중에 갚아도 됩니다. 급하지 않으면 우리한테 팔아달라고 의뢰하든지 아예 저희한테 팔든지….” “그래도 그 가격에 팔기는 너무 아까운데….” “62만원에 3만원 더 쳐드리겠습니다. 어때요” 결국 루이뷔통은 65만원에 넘기기로 낙착됐다.

전당포가 확 달라졌다. 간판부터 옛 전당포 대신 ‘폰뱅크’라는 새 이름으로 바꿔 달았다. 은은한 실내 조명 아래 아늑하게 꾸민 공간은 백화점 명품 매장을 뺨칠 정도다. 강남 청담동에 있는 ‘캐시카페’(www.cashcafe.co.kr)처럼 고급 카페 분위기를 풍기는 곳도 생겼다. 캐시카페는 주로 신품과 중고 명품을 할인판매하지만 중고품을 들고 오면 감정을 거쳐 돈을 대출해준다. 수백, 수천만원짜리 명품을 거래하는 이런 명품 전당포는 막강한 자금력까지 갖추고 있다. 명품 전당포의 등장은 소비 위축 속에서도 고가품 소비가 늘어 나고, 옛 전당포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손때 묻는 손가방이나 구두가 이제는 ‘명품’이란 이유로 여전히 가치를 인정받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온라인 디지털 업체들도 등장

사진/ 압구정동 명품 전당포 옆에 있는 옛 전당포 홍익사. 구식 전당포들은 이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새로 생겨나는 전당포들은 고객의 물건을 잠시 보관하고 현금을 융통시켜주는 데 그치던 기존 전당포 고유업무뿐 아니라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직거래를 통한 전당물품 재유통과 고가품 위탁판매, 나아가 소액신용대출까지 하는 등 전당포 영토를 넓히고 있다. 금융과 유통시장 중간에서 틈새를 찾은 신종 금융·유통 복합점포라고 할 수 있다.

‘신 전당서비스’를 내건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캐시파크’(www.cashpark.co.kr)는 소매금융까지 취급하는 종합금융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다. 가전·컴퓨터·개인휴대단말기(PDA)에서 귀금속·명품까지 취급하는데, 노트북 등 중고 디지털 가전기기로 특화해나갈 생각이다. 캐시파크 최진수 과장은 “아무래도 명품은 쓰는 계층이나 지역이 제한적이라서 이전부터 명품을 거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명품 전문 전당포를 운영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명품 붐을 타고 명품 전당포들이 생기고 있지만, 가짜 명품이 판치는 상황에서 제품 안쪽 주머니나 꼬리표에 부착된 로고와 제품 고유 일련번호로 정품을 식별해내는 안목이 없으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캐시파크는 물건을 가져오면 중고품 시세의 70∼80%를 대출해준다. 시중 매장에서 새것이 100만원 하는 디지털 카메라의 경우 몇달 썼지만 전혀 흠이 없는 중고품이라면 40만∼50만원을 대출해준다. 이자는 월 5.5%다. 캐시파크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전국적으로 벌써 23개에 이른다. 전당포가 기업화·대형화·체인화하고 있는 셈이다. 캐시파크쪽은 “맡긴 물건을 되찾아가는 고객은 40% 정도다. 보석류나 명품이야 나중에 대출원금과 이자를 갚고 대부분 찾아가지만 카메라 등은 이제 쓸모 없어져 처분할 생각을 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온라인 디지털 전당포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기존 전당포들도 인터넷 홈페이지에 ‘ㅇㅇ전당포닷컴’ 등을 열고 온라인 영업에 나서고 있다. 국제전당포닷컴(www.kukjepawnshop.com)은 고객이 이메일로 대출상담을 하면 직원이 직접 찾아가 그 자리에서 물건을 감정한 뒤 대출 여부를 판단해 곧바로 돈을 빌려준다. 찾아오는 손님을 하루종일 기다리던 데서 탈피해 출장 감정까지 나가는 것이다. 선이자를 떼지 않고 이자 후불제를 실시하는데, 대신 1주일 이상 원금과 이자를 갚지 않으면 저당물을 임의로 처분한다. 전당포도 이제 사채업 양성화를 위한 대부업법에 따라 새로 등록해야 하는데, 대부업법이 정한 이자 상한선(연 66%)에 따라 대출금 이자는 월 5.5%를 넘을 수 없다.

생활에 쪼들리던 시절 전당포는 서민들의 갖가지 사연이 담긴 애환의 공간이었다. 책값에 쓰라며 장롱 깊숙이 넣어뒀던 가락지를 꺼내던 어머니, 살림이 어려워지자 혼수 은비녀를 뽑아온 아내, 빵값을 마련하려고 세이코 시계를 풀어온 학생, 코트를 벗어 맡긴 중년 남자…. 철창 사이로 손바닥만하게 난 창구와 안으로 굳게 잠긴 철문으로 상징되는 옛 동네 전당포는, 영업허가를 경찰청장이 내준 데서 보이듯 장물이 거래되는 어두운 면까지 안고 있었다. 그래서 전당포를 드나들 때는 괜히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하지만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을 맡기고 급전을 빌려쓰던 옛 전당포도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지고 있다.

동네 전당포는 명맥만 유지

사진/ 한 신종 폰뱅크 업체 직원이 고객이 맡긴 물건을 감정하고 있다. 새로 생겨나는 전당포는 소액 신용대출 등 기존 영역을 넓히고 있다.
수많은 신용카드의 등장으로 전당포 고객들은 현금 인출기로 옮겨갔고, 소액급전을 빌릴 수 있는 은행 금융상품이 속속 생기면서 전당포 시장은 급속히 잠식됐다. 1999년 전당영업법마저 폐지되는 등 이제 옛 전당포는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신세가 됐다. “현금이 안 도는 불경기일수록 전당포는 호황을 누린다”고 하지만 귀금속·악기·가전제품·골동품 등을 ‘취급품’으로 내건 동네 전당포들은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는 형편이다.

압구정동 명품 전당포인 캐시캐시의 복도 맞은편 구석에는 홍익사라는 옛 전당포가 있다. 폰뱅크와 옛 전당포가 공존하고 있는 격이다. 1평 남짓 비좁은 홍익사 전당포에 들어서자 녹슨 쇠창살에 붉은 글씨로 써붙인 ‘제한구역’이란 팻말이 눈에 띈다. 낡은 소파며 철창에 매달린 손때 전 초인종에 적힌 ‘벨을 누르세요’란 문구가 반대편 캐시캐시와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잠시 뒤 나온 전당포 주인 남아무개(50대 중반)씨가 한숨처럼 말했다. “요즘은 남들 쓰던 것 이용하려는 사람도 없고 돈 빌려줬다가 물건 안 찾아가면 골치 아파. 가끔 사업하다 직원들 월급 주려고 집안 패물을 들고 와 돈 빌려달라는 사람이 있지만 손님 뚝 끊겼어. 명품 취급 안 해. 우리가 명품을 아는가”

사진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글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