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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무디스 신용등급’ 제멋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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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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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기업에는 관대한 신용평가 기관이 북한 핵 문제 빌미로 신용등급 하향 조정한 진짜 이유는?

2월11일 오전 11시 권태신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마침 국회 본회의 경제분야 대정부 질의가 있는 날이어서 여의도에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 가운데 하나인 무디스의 토머스 번 부사장이었다.

허 찔린 한국 정부

사진/ 무디스 신용평가단이 지난 1월20일 과천종합청사 내 재정경제부 권태신 금융국장(가운데)의 안내로 회의실로 가고 있다. 왼쪽은 이번 평가단의 단장을 맡은 토머스 번 부사장. (한겨레 김진수 기자)
“북한 핵사태 진전을 반영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A3)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리기로 결정했다. 공식 발표는 12시(한국 시각) 이후로 해달라.” 번 국장의 통보를 들은 권 국장의 놀라움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권 국장은 이 소식을 곧바로 전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청와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한 데 이어 재경부 기자실에도 비상을 걸었다. “내용은 지금 말하기 어렵고, 12시 이후 중대 발표를 할 예정”이라며 기자들의 발을 묶은 것이다.


올 들어 뉴스의 초점이 인수위로 옮겨가 절간처럼 조용하던 재경부 기자실은 순식간에 ‘불난 호떡집’이 되었다. 구구한 추측이 나도는 가운데, 국가신용등급에 관한 발표가 아니겠느냐는 관측이 주류를 이뤘다. 국제금융시장의 동향을 점검하고 신용등급 업무를 맡고 있는 국제금융국의 임무로 보아 중대 발표를 할 사항이라고는 그것 외에 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표 시점을 12시 이후로 못박은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했다. 금융시장이 열리는 시간을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권 국장이 여의도에서 과천 관가로 허겁지겁 달려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었다. 기자실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기자실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은 권 국장은 번 부사장이 전화와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준 통보내용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이후 파장은 언론에 대서특필된 그대로다. 주식시장이 요동치고, 외환시장에선 원-달러 환율이 1200원을 넘어 치솟았다. 외국환평형기금 채권을 비롯한 해외에서 발행된 한국채권 값도 뚝 떨어졌다.

일개 신용평가기관이 이처럼 온 나라를 한번 들었다놓는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또 무디스의 이번 조처는 합당한 것인가 공식적인 설명대로 등급 전망 조정의 이유가 북한 핵사태 때문만일까

사진/ 무디스의 갑작스러운 신용등급 하양 조정 여파로 환율이 급등한 2월11일 오후 외환은행 본점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연합)
물론 이번 무디스의 조정은 등급을 떨어뜨린 게 아니라 같은 등급 안에서 ‘긍정적’, ‘안정적’, ‘부정적’ 등 3단계로 돼 있는 향후 전망을 낮췄을 뿐이다. 앞으로 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음을 낸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번 조처의 파장이 큰 것은 ‘긍정적’에서 ‘안정적’이란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정적’ 수준으로 떨어진데다 국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번 부사장을 비롯한 무디스 평가단은 1월20~21일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북한 핵사태 등에 대한 우리 정부쪽 설명을 듣고 오는 4월 방한할 때까지 현재 등급을 유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는 안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린 셈이다.

무디스는 이번 조처의 배경으로 북한 핵사태의 새로운 진전을 들고 있다. 재경부가 공개한 무디스의 전자우편 통보내용을 보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추방, 핵확산금지조약(NPT), 영변 핵시설 재가동 등 최근 북한이 취한 일련의 행동이 과거보다 과격한(provocative)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한국의 등급은 상향 가능성보다 하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평가 하나가 한 나라 경제를 흔든다

그러나 무디스의 이러한 설명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 사태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간 1994년에도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현행 A3보다 두 단계 높은 A1을 유지했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북한 핵위기를 문제로 삼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신용평가기관-월스트리트-미국 정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착관계가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실제로 무디스 등 미국의 신용평가기관들은 2001년 ‘9·11테러 사태’로 미국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을 때 미국이나 미국 내 기업들의 신용등급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늘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신용등급을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들도 결국 자국 중심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용평가기관이 매기는 국가신용등급은 한 나라가 국내외에서 발행한 국채(빚)를 갚을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지수로 나타낸 것이다. 해당국의 소득수준·경제성장률·대외채무·재정건전성 등 경제적 변수는 물론 정권의 안정성이나 전쟁 가능성까지 총망라하고 있어 국가 재정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신용평가업계에서 쌍벽을 이루는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 푸어스(S&P)는 신용등급을 17∼18단계로 평가한다. 무디스가 매기는 Aaa(S&P는 AAA)부터 Baa3(BBB-)까지는 투자등급, Ba1(BB+) 이하는 정상적으로 투자가 불가능한 투기등급으로 분류된다.

국제금융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의 연기금 등은 규정상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무디스, S&P, 피치) 가운데 두곳 이상으로부터 투자적격 평가를 받은 채권에만 투자하도록 하고 있다. 일부 연기금은 더욱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A등급 이상에만 투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결국 무디스 등이 국가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해당국의 돈줄이 끊기는 것을 뜻하며, 영향은 외환위기 때 겪은 것처럼 국가 전체에 큰 충격을 준다.

설사 투기등급으로 떨어지지 않고 투자적격을 유지하더라도 등급이 내려가는 데 따른 부담은 적지 않다. 신용등급이 A3에서 Baa1으로 한 계단만 떨어져도 해외 차입금리가 평균 0.35%포인트 올라가 정부·기업·금융회사 등의 한해 이자부담이 5억달러(약 6천억원)가량 늘어난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한 나라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무소불위의 기관처럼 보이는 무디스조차 그동안 행적에서 적지 않은 오류(또는 의도적 왜곡)를 범해왔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회계부정 사태로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엔론의 주가가 폭락할 때 무디스는 엔론의 신용등급을 조정하지 않았다. 무디스는 엔론이 파산신청을 낸 다음에야 뒤늦게 투자등급을 떨어뜨렸다. 이에 비판적 여론은 “사방에서 엔론을 둘러싸고 난리법석이 나도 ‘울리지 않는 고장난 경보기’였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두 나라의 대북정책 차이 때문일까

무디스에는 한국 사정에 대단히 밝은 국가신용평가 분야 전문가들이 많이 포진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한국을 방문한 토머스 번 부사장, 스티브 헤스 책임연구원, 한국계인 브라이언 옥 부사장 등 3명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1980년대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의 신용등급 평가 업무를 해오고 있는 이들은 모두 한국말 구사도 유창하다. 이 가운데 헤스 연구원, 옥 부사장은 국내 경제부처에서 에디터(자료 영문번역 담당)로 일한 경험도 있다. 특히 헤스 연구원은 한국인을 부인으로 맞아 이래저래 한국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한국의 신용등급을 매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미국 중심의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신용평가기관의 태생적 한계다. 앞에서 지적했듯 1994년의 북한 핵위기 때와 최근의 북한 핵위기를 견줘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북한 핵위기가 국제사회의 중요한 현안이 되었지만, 그당시처럼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은 것은 아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금강산 관광 등 다양한 남북교류사업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중요한 차이는 그때와 달리 노무현 새 정부가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정책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무디스는 북한 핵위기보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두 나라의 의견 차이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무디스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그들의 말대로 순수하게 북한 핵위기 때문일까 이번 신용등급 전망 조정에 의문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몇몇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은 국내경제 전문가 대다수의 시각일 것이다.

김영배 기자/ 한겨레 경제부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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