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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손길승, 당신이 막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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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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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회장직에 오른 손길승 SK 회장…동북아 경제허브 육성에 협력하며 재벌개혁 예봉 피할 듯

2월7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관 20층 경제인클럽. 손길승 SK 회장이 단상에 오르자 카메라의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직물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출발한 손길승 회장이 재계 수장인 전경련 회장에 올라서는 신화 탄생의 순간이었다.

말단 직원에서 최고경영자로, 최고경영자에서 재벌기업 총수로, 나아가 재계 전체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으로. 그의 성공은 한국의 기업 현실에서 봉급 생활자가 올라설 수 있는 통상적 한계를 벗어난 것이어서 더욱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전문경영인으로서 웬만해서는 넘어설 수 없는 오너의 벽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사진/ 손길승 SK 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한 전경련 제42회 정기총회. (김종수 기자)
손길승 회장의 취임은 물론 삼성·LG·현대차 등 주요 재벌기업의 오너들이 회장직을 고사한 데 따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재벌개혁 의지가 확고한 마당에 재벌기업 총수들이 총알받이로 나서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특히 출자총액제한, 집단소송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3대과제를 양보할 수 없는 재벌개혁의 핵심과제로 설정해놓아 새 회장은 이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처지다. 그런 뜻에서 손길승 신화의 탄생은 전문경영인으로서 개인의 능력과 외부적 조건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문경영인이란 한계를 안고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손길승 회장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오너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경련 입장에서는 노 당선자의 개혁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피해가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 기업은 권력 앞에 머리를 수그릴 수밖에 없다. 아직은 권력자의 힘이 재벌기업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손길승 회장의 취임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앞으로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손 회장은 먼저 “기업과 재계가 변화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새 정부의 국가 전략과 정책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표적 사례로 한국을 동북아 경제허브(중심축)로 육성하는 데 전경련이 생산적 싱크탱크 역할을 맡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재벌개혁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이냐”는 물음에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에 적극 협조하는 대가로 재벌개혁의 예봉을 피해가겠다는 의중으로 읽힌다.

비슷한 전례는 김우중 전 회장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김우중 전 회장은 수출을 통한 외화벌이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취지 아래 김대중 정부에 적극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김 대통령 역시 김우중 전 회장의 수출 드라이브에 고무돼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정부의 기업구조조정을 반대하고 이를 피해가려 했다. 대표적 사례가 5대업종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었다. 그는 빅딜을 앞세워 대우전자를 삼성에 넘기고, 그 대가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대우자동차를 살리려 한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동북아 경제협력 강조

사진/ 오너가 아닌 그가 전경련 호장이 된 것은 개인의 능력과 외부적인 조건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종수 기자)
손길승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북아 국가 간 경제협력을 강조해왔다. 그는 수시로 “동북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잠재력이 높은 시장이며, 세계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해왔다. 2~3년 전부터는 아예 중국에 제2의 SK를 설립한다는 목표 아래 중국시장을 밑바닥부터 다져왔다. 그는 회장 취임 전까지 전경련 중국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현재 아시아 26개국이 지역 내 경제협력을 위해 지난해 설립한 보아오포럼(BAF)의 이사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손길승 회장은 전경련 입장에서 노무현 새 정부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셈이다. 전경련은 새 회장 선출을 계기로 최근 당선자쪽과 빚은 마찰을 해소하는 한편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에 적극 협력하는 것으로 새 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재벌개혁이라는 화두는 전경련 입장에서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다. 당선자쪽은 연내 입법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다. 이를 피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과 같은 다른 사안에서 적극 협력하며 반대급부를 찾는 방법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역대 정권은 늘 나름의 국가 경영전략을 세우며 재벌기업의 협조를 필요로 해왔다. 재벌기업들은 정권에 협조하며 반대급부를 챙겨왔다. 군사정권 시절 이는 공기업 인수 등과 같은 특혜로 이어졌다. 김대중 정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그런 방식으로 대우의 경영난을 타개하려 했고, 현대그룹 역시 대북사업에 적극 협조하는 대가로 초반에 개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개혁 방침에 전경련이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다.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돼야 하고,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재벌개혁의 예봉을 피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손길승 회장의 취임으로 전경련에 일정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전문경영인이더라도 재계 총리라고 하는 전경련 회장의 역할과 위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과 재계가 변화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이 그의 색깔을 보여준다. 재벌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겠지만 ‘황제경영’으로 불리는 오너 중심의 전근대적 기업경영 행태를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가 평소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파트너십을 강조해온 것도 참고할 만하다. 회장직을 수락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 사람들의 솔선수범)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정부의 개혁 방침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재벌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힘겨운 과제를 떠맡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향후 SK의 위상이다. SK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수많은 중견기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주))를 인수하고, 최종현 전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던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하면서 그룹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역대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공기업 인수를 통해 재계 3위에 올라선 것이다.

SK그룹 위상 강화 측면도

사진/ 손길승 회장 취임은 전경련 차원에서 재벌개혁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SK그룹 차원에서 사세 확장과 그룹의 위상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승화 기자)
중요한 것은 그런 SK가 손길승 전경련 회장 추대를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마지못해 회장직을 떠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너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끝까지 고사했으나 이건희 삼성 회장의 강력한 권유에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손 회장 추대 과정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이번처럼 쉽게 후임 회장이 결정된 경우가 없었다. 몇 차례 사양했지만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SK그룹 관계자도 “사장단은 반대했지만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의 반대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손 회장 취임은 전경련 차원에서 재벌개혁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SK그룹 차원에서 사세 확장과 그룹의 위상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재벌기업들이 전경련 회장사를 하면서 사업을 크게 넓혀왔다. 전경련 회장은 정부와 마주앉아 대북사업이나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등 거시적 경제정책의 목표를 함께 논의하고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리기 때문이다.

손길승호의 출범은 재벌개혁을 둘러싼 노무현 새 정부와 전경련의 줄다리기가 시작됐음을 뜻한다. 전경련은 늘 겉으로는 권력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해왔지만 뒤로는 로비를 통해 개혁의 칼날을 피해갔다. 이번에도 전체적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경련을 통해 넓게는 재벌기업들, 좁게는 SK의 이익을 관철시켜야 하는 것이 손 회장의 입장이다. 다만 그가 어떤 방법과 수순으로 새 정부와 관계를 풀어갈지는 그의 능력과 수완에 달린 문제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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