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교체기와 사회주의 발언 파문에 부담 느껴 회장직 수락을 고사하는 재벌 총수들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자리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자리에 대한 오랜 불문율이다. 지난 2001년 회장 선출 때도 전경련은 회장직을 흔쾌히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막판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급기야 김각중 회장을 재선임해놓고 “회장단에서 그렇게 결정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라며 연임을 기정사실화했다. 싫다고 해서 추대한 것까지 거절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전경련이 2년 뒤 김각중 회장의 후임 선출을 놓고 또다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맡아줬으면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김 회장은 고령(78) 때문에 물러나는 쪽으로 양해가 이뤄진 상태다.
회장의 지위는 절대적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경련은 회원사의 총수들이 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등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정권 초 재벌개혁을 강조하던 김대중 정부가 경기침체를 맞아 재계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기 시작한데다, 친재벌 성향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차기 회장으로 구체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뒤 상황이 급변했다. 지금은 이른바 ‘빅4’가 모두 회장 자리를 고사하고 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최근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차기 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완고하게 거절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애국할 수 있는 길이 있겠지만 삼성 회장으로서 국가에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전경련 회장 선임을 위한 회장단 및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고 아예 해외출장을 떠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도 “정몽구 회장은 경영에 전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K 손길승 회장도 고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LG 관계자도 “구본무 회장은 원래 그런 활동을 하지 않는 분이다. 공식적으로 고사한다는 뜻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장이야 누가 맡으면 어떨까 싶지만, 전경련에서 회장 자리는 아주 중요하다. 지위도 거의 절대적이다. 전경련 한 관계자는 지난 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벌어진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1위로 올라선 김대중 후보가 ‘반재벌’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전경련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이회창 후보는 전경련을 방문한 뒤였다. 회장단 중 다수가 오시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최종현 당시 회장은 ‘민감한 문제이니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결국 김대중 후보는 전경련을 방문하지 못했다.” 전경련이 그만큼 회장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는 조직이라는 설명이다.
과거 전경련 회장은 전경련의 재정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비를 더 내는 것은 아니지만, 각종 연회의 비용을 회장사의 예산에서 직접 지출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재정적 기여는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재계의 수장으로서 전경련 회장의 막강한 영향력에는 변함이 없다. 회원사 간 결속력 면에서나 정부정책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나 다른 경제단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한해 예산은 한해 400억원가량이나 된다. 산하에 한국경제연구원을 두고 있고, 공식적으로는 별도 기관이지만 자유기업원도 영향권 아래 두고 있다.
전경련이 차기 회장 선임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정권 교체기라는 특수상황이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재벌개혁’이 항상 화두로 등장하는데다, 특히 노무현 당선자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강력한 재벌개혁을 공약한 상태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빚어진 김석중 상무의 ‘사회주의 발언 파문’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김 상무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는 전경련이 공식 해명을 하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사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형식상 파문이 일단락됐지만, 새 정부의 재계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인수위 관계자는 “노무현 당선자가 그렇게 반재벌적이냐. 내가 보기에는 친재벌 같은데…”라는 말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인수위로서는 일부 언론이 재벌개혁을 특정재벌 때리기로 몰아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더 이상의 반응은 자제했지만, 재벌개혁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분명해진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인수위원회나 새 정부 경제팀은 지난 2001년 5월 자유기업원 민병균 원장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좌파적’이라고 공격하며 우익의 궐기를 촉구한 이메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민 원장의 이메일 파문 이후 재계는 정부에 집중공세를 폈고, 결국 김대중 정부의 재벌정책을 급격히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 전례를 기억한다면 노무현 정부 경제팀이 앞으로 재계의 반발에 더욱 치밀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전경련의 위치마저 흔들리진 않을 듯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재계는 김 상무의 발언 파문을 상당한 악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실수이든 발언 내용이 와전된 것이든 김 상무의 발언에 대한 비판이 훨씬 많은 상황에서 전경련의 정책적 발언도 당분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흔쾌히 나서려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전경련 사이트에는 김 상무의 발언에 대한 비판이 지지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올라와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실세 오너를 회장으로 옹립해야 대정부 관계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매우 어려워졌다. 정기총회 때까지 차기 회장을 선임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전경련의 힘은 크게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계의 중심으로서 전경련의 위치마저 흔들리지는 않으리라는 게 전경련을 잘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전경련 회원사는 현재 380여곳이다. 그 중 4대 재벌 계열사가 일반회계의 50%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벌개혁을 놓고 재계와 새 정부 사이의 긴장이 깊어질수록 재계 또한 더욱 똘똘 뭉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새 정부가 단독으로 개혁입법을 추진하거나 법을 개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인 만큼 당분간 재계와 정부가 정면으로 부딪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전경련은 1월28일 회장단 및 이사회를 열어 2월6일 정기총회에서 선임할 차기 회장 문제를 논의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완곡히 고사하는 분에게 강제로 회장직을 떠맡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28일까지 확정을 못 짓는다고 해도 정기총회 직전까지는 추대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지난해 12월20일 송년모임을 갖고 있는 전경련 회장단.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경련은 회원사의 총수들이 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등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연합)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경련은 회원사의 총수들이 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등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정권 초 재벌개혁을 강조하던 김대중 정부가 경기침체를 맞아 재계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기 시작한데다, 친재벌 성향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차기 회장으로 구체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뒤 상황이 급변했다. 지금은 이른바 ‘빅4’가 모두 회장 자리를 고사하고 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최근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차기 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완고하게 거절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애국할 수 있는 길이 있겠지만 삼성 회장으로서 국가에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전경련 회장 선임을 위한 회장단 및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고 아예 해외출장을 떠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도 “정몽구 회장은 경영에 전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K 손길승 회장도 고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LG 관계자도 “구본무 회장은 원래 그런 활동을 하지 않는 분이다. 공식적으로 고사한다는 뜻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장이야 누가 맡으면 어떨까 싶지만, 전경련에서 회장 자리는 아주 중요하다. 지위도 거의 절대적이다. 전경련 한 관계자는 지난 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벌어진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1위로 올라선 김대중 후보가 ‘반재벌’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전경련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이회창 후보는 전경련을 방문한 뒤였다. 회장단 중 다수가 오시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최종현 당시 회장은 ‘민감한 문제이니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결국 김대중 후보는 전경련을 방문하지 못했다.” 전경련이 그만큼 회장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는 조직이라는 설명이다.

사진/ 1월13일 전경련 사회주의 발언과 관련해 국상호(맨 왼쪽), 정태승(가운데)씨가 사과문을 정순균 전경련 대변인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