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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쌀 개방, 마지막 고비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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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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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2일 농산물 개방 초안을 앞두고 마지막 비공식 협상…관세화에 대비한 통상전략과 농업대책 시급

사진/ 양곡종합시장 창고에 쌓여있는 수입쌀. (김종수 기자)
설을 앞둔 농촌풍경은 예전과 다름없이 풍요롭다. 비록 추석 때처럼 각종 수확물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지만 설을 대비해 아껴둔 배·사과 등 최상품의 작물들이 이때 출시된다. 이번 겨울은 그다지 추위가 심하지 않은 탓에 사람들의 마음도 한층 여유롭다.

관세화 유예에만 초점 맞추면 위험

그러나 설을 9일 앞둔 1월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농산물시장 개방을 둘러싼 각 나라 대표들의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오는 2월 세계무역기구(WTO) 농업위원회의 농산물시장 개방 초안 제출을 앞두고 마지막 비공식협상이 열린 것이다. 1월2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회의는 어느 때보다 각 나라의 주장이 맞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 회의를 마지막으로 농업위원회가 초안을 작성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초안은 3월 말 확정될 농산물분야 관세·보조금 감축 세부협상원칙(modalities)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된다. 장거리 달리기에 비유하면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아 있는 셈이다. 농민들이 한가로이 설을 준비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서로의 농산물시장을 빼앗기 위한 경제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농산물시장은 쌀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품목이 관세화돼 있는 상황이다. 관세화란 관세를 부과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역장벽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시장의 개방을 뜻한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의 쌀에 대한 관세화 특례조치에 따라 쌀 관세화가 내년까지 유예돼 있다. 반면 참깨·마늘·보리·옥수수·감자·고추 등 거의 모든 품목은 관세만 내면 자유롭게 수입이 가능하다.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는 0~780%까지 천차만별이다. 전분류인 매니악이 780%로 가장 높고, 참깨(630%)·마늘(380%)·고추(285%) 등 주요 품목은 대부분 200% 이상의 관세가 붙어 있다. 문제는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 농산물 수출국들이 요구하는 관세감축의 목표가 현재 관세율의 5분의 1에서 30분의 1 수준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7월 모든 농산물의 관세를 25% 이하로 제한하는 이른바 ‘스위스 공식’을 제안했다. 평균관세율이 아니라 개별 품목의 관세율을 모두 25% 이하로 낮추자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를 경우 국내 식품매장에서 우리 농산물이 자취를 감추는 것은 시간문제다. 제주도(감귤), 강원도(감자·고구마) 등 몇몇 지역은 지역경제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농산물 수입국들은 관세의 평균감축률과 품목별 최소감축률을 정하는 기존 우루과이라운드(UR)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올해 세부협상원칙 확정 과정에서는 기존 우루과이라운드 방식을 주장하는 농산물 수입국과 스위스 공식에 따른 파격적인 관세인하를 주장하는 미국 등 농산물 수출국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중요한 것은 3월 말에 마무리될 세부협상원칙이 앞으로 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쌀은 관세화가 유예돼 있다. 그러나 내년 초부터 재협상을 시작해 연말까지 관세화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협상결과 관세화 유예가 이뤄지면 다행이지만 관세화로 결정되면 올해 합의한 관세감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올해 협상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 결정된 관세감축의 원칙이 내년 쌀시장 개방을 위한 재협상의 주요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진/ 쌀 개방 협상에서 관세화 유예에만 초점을 맞추면 의무수입량을 더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 백화점 물류창고에 쌓여 있는 수입농산물들. (김종수 기자)
그런 의미에서 쌀시장 개방을 위한 재협상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내년도 재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가기 위해서는 올해 협상과정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수단을 확보해놓아야 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낙균 무역투자정책실장은 “내년 재협상결과에 상관없이 쌀 수입 관세화를 전제로 한 대비책을 세워나가야 한다. 관세화 유예에만 초점을 맞춰 관세화됐을 때의 대책을 소홀히 한다면 나중에 큰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긴급 관세 유지도 쟁점

쌀 관세화에 대비할 때 중요한 것은 ‘관세상한선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다. 관세상한을 한번 정하면 쌀에 대한 관세도 이를 넘어설 수 없다. 현재 국내의 쌀가격은 국제 쌀가격의 5배 수준이다. 따라서 관세화를 하면서 쌀농사가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400%의 관세를 물려야 한다. 그러나 올해 세부협상원칙에서 관세상한선이 100%로 정해지면 이를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은 최대한 관세상한선을 끌어올려야 할 입장이다.

아니면 일반적인 관세상한선에 적용받지 않고 고율관세를 매길 수 있는 예외품목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세계무역기구에서 쌀에 관한 특례 적용국가는 한국·일본·대만·필리핀 4개국이다. 그러나 일본과 대만이 이미 쌀을 관세화하면서 시장을 개방했다. 남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뿐인데 주요 수입국은 한국이다. 한국은 모든 쌀 수출국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셈이다. 식량안보·식품안전·환경보전 등 농산물의 비교역적관심사항(NTC)에 관심을 갖는 그룹과 협력해 수출국들의 공세를 막아낼 수밖에 없다. 비교역적관심사항 그룹에 속하는 국가는 한국·일본·유럽연합·노르웨이·스위스·모리셔스 등 6개국이다.

특별긴급관세(SSG) 제도를 존치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미국과 케언스그룹(오스트레일리아·칠레 등 미국을 제외한 17개 농산물수출국모임)은 이 제도가 잠정적인 조치고, 사용하는 나라가 매우 적다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인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긴급관세보다 일반 긴급수입제한조치는 피해조사와 판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구제절차가 까다롭다. 반면 특별긴급관세는 신속한 관세 부과가 가능하다. 따라서 특별긴급관세제도는 쌀 관세화로 인한 충격이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경우 정부가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가운데 하나다.

사진/ 쌀 개방 반대 집회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공약에서 “쌀 관세화를 유예하도록 하겠다”고 약속으나 나중에는 “개방에 대비한 대책을 만들겠다”고 후퇴했다. (박승화 기자)
이처럼 쌀시장 개방과 관련한 주요 현안들에 대한 논의는 올해부터 이뤄진다. 그것도 2~3월에 집중적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농민들의 관심은 쌀 관세화를 막아야 한다는 데만 맞춰져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공약에서 “쌀 관세화를 유예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나중에는 “개방에 대비한 대책을 만들겠다”고 후퇴했다. 그러나 ‘쌀 관세화 유예’라는 키워드는 한국의 정치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국민 정서를 무시할 수 없는데다 관세화 유예만이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식의 언론보도 태도 때문이다.

관세화 유예를 성공적으로 이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내년 말로 끝나는 유예기간을 연장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개방을 유예하기 위해서는 협정문안대로 ‘이해당사국들이 수용할 만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서로의 주장이 맞서 타협을 이뤄내지 못하면 유예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관세화에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협상은 절대적으로 한국에 불리하다. 이를 알고 있는 이해당사국들은 유예의 대가로 많은 것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현재 국내 소비량의 4%로 돼 있는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을 크게 늘리는 것이다. 일본과 대만의 8% 이상은 물론이고 이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를 해올 것이 당연하다.

우리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박사는 “농림부는 2010년까지 관세화 유예 대가로 최소시장접근물량을 4%에서 6%로 늘리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최소한 12%를 내줘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쌀시장 개방 유예 대가로 쇠고기 등 다른 품목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게 된다. 그것도 불과 몇년뿐이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있는 수입쿼터제도 결국 이와 비슷한 것이다. 현재의 최소시장접근물량 허용방식은 낮은 관세를 매기는 물량을 쿼터로 정해놓고 해마다 이를 늘려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통상 전문가들은 쌀시장 개방협상이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관세화를 유예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개방을 몇년 늦출 수 있다 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관세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통상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농산물시장 개방 전문가들은 따라서 관세화 유예기간의 연장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부터 관세화에 대비한 통상전략과 농업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세계무역기구 농산물 개방 원칙협상이 1월 말에서 3월 말, 즉 김대중 정권 말기와 노무현 정권 초기에 걸쳐 이뤄진다는 것이다. 농산물 개방 협상은 지금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으며, 한번 결정되면 번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책 현안보다 중요하다. 3월 말 세부협상원칙이 확정되면 각 나라는 시장개방을 위한 이행계획서를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리는 제5차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에 제출해야 한다.

서진교 박사는 “쌀 시장이 개방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나중에 막상 시장이 열리면 농민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쌀이 관세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리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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