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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짜다 짜, 서민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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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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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으로 서민금융기관 위축되고 대형은행은 소액 신용대출 꺼려

사진/ 외환위기 이후 전통적인 서민금융기관이 크게 줄어 서민들이 대출받을 길이 좁아졌다. (류우종 기자)
가계빚 총 400조원, 가구당 빚 3천만원 육박. 가계대출 급증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은행들은 부랴부랴 가계대출 억제에 나서 대출심사를 까다롭게 하면서 돈줄을 죄고 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급격한 가계대출 억제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연착륙’을 강조하고 나섰다. “97년 말 외환위기가 기업부문에서 시작됐다면 앞으로의 경제위기는 가계부문에서 비롯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가계대출은 폭증해 난리인데…

이처럼 가계대출이 폭증해 난리인 판국에 한쪽에서는 또 다른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있다. “죽어가는 서민금융을 살려라”는 저소득층의 외침이다. 가계대출이 급증하고 있는데 웬 서민금융 얘기냐고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 가계대출은 집 가진 중산층의 주택담보대출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집 없는 저소득층이 주요 고객인 서민금융과는 성격이 다르다. 서민금융은 가계대출 고공행진의 그늘 속에서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서민금융 열악화는 외환위기 이후의 두 가지 큰 변화에서 비롯되고 있다. 먼저 전통적인 서민금융기관이 크게 줄어들었다. 서민금융은 그동안 상호저축은행(이하 저축은행·옛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 새마을금고가 주로 맡아왔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금융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이들 서민금융기관은 크게 위축됐다. 저축은행은 97년 말 총 231개에서 현재 116개로 절반이나 퇴출됐다. 신협은 97년 말 1666개에서 1235개로, 새마을금고도 2743개에서 1701개로 무려 1천개 이상 줄었다. 자연히 대출금액도 크게 감소했다. 저축은행의 총 대출금은 지난 97년 28조원에서 2001년 16조원으로 감소했고, 신협의 대출액도 12조원에서 10조원으로 줄었다.


시중은행은 어떤가. 지방은행은 상당수 퇴출됐고 일반은행들은 저마다 합병을 통한 대형화의 길을 걷고 있다. 대형화한 은행들은 규모가 큰 대출에만 관심을 둘 뿐 소액대출은 비용이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취급을 기피한다. 한밭대학교 조복현 교수(경제학)는 “서민금융과 주택금융을 전담하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은 서민들의 금융 접근 기회를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영세민 대출, 학자금 대출, 주택자금 대출 등 정책자금 성격의 소액대출 기능이 약화되었다”고 말했다. 가계대출 폭증은 수익성을 더 중시하는 대형은행들이 서민금융에서 일반 가계금융으로 주력업종을 전환한 데 따른 결과다. 은행 대형화를 유도해온 정부정책 뒤쪽에서 서민금융은 점점 더 취약해진 것이다.

사진/ 명동의 사채시장 골목.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지 못한 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금리가 높은 사채시장을 찾는다. (김종수 기자)
저소득층이 겪는 고통은 대출의 어려움뿐 아니라 금리에서 더욱 악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은행권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사채시장이나 카드대출 등 고금리 사금융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은행에 지고 있는 기존채무를 갚으려면 새로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재직증명서와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을 들고 은행창구를 찾으면 “재산세 납부 영수증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맞고, 결국 고금리 사금융에 의존해야 한다. 2001년 말 현재 서민금융시장(약 160조원)을 보면, 사금융(약 80조원)과 카드론(약 37조원)이 무려 73%를 차지한 반면, 저축은행·신협·새마을금고 등 제도권 서민금융기관의 대출은 27%에 지나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사채의 연평균 금리는 120∼240%에 이른다.

카드와 사금융으로 고금리 부담

서민금융기관이 해온 저소득층 대출이 카드와 사금융으로 대체되면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팍팍해졌다. 중산층·고소득층은 쉬운 금융 접근과 함께 낮은 금리를 이용해 부를 증대시킬 기회를 더 많이 갖는 데 반해, 저소득층은 대출 곤란에다 고금리로 인해 낮은 소득마저 금융비용으로 잃고 만다. 벌어들인 돈이 이자로 나가고, 부를 축적할 기회를 갖기는커녕 오히려 부의 감소라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사금융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권 금융기관들조차 저금리 기조 속에서도 서민의 소액금융에는 높은 고금리를 물리고 있다. 한솔상호저축은행의 무보증신용대출상품인 ‘스마트론’은 최고 1천만원까지 연 13.5∼29%를 부과하고 있다. 신용상태가 크게 나쁘면 무려 연 48%(‘스마트론에이스상품’)를 물어야 한다.

은행권이라고 금리가 싼 건 아니다. 무보증신용대출상품의 경우 제일은행의 ‘제일편한대출’은 8.5∼17.9%, 한미은행은 8.4∼15.5%를 적용하고 있다. 한미은행의 ‘퀵머니론’은 1천만원까지 11.9∼12.9%(고정금리)를 적용하는데, 여기에 수수료 4%가 따로 붙으므로 실제금리는 16.9%에 이른다. 담보능력도 없고 신용실적도 약하게 마련인 서민들은 대부분 15% 이상의 금리를 물어야 한다. 반면 집 가진 중산층·고소득층한테 부과되는 주택담보대출금리는 6.4∼7%대다. 두배 이상 금리 차이가 나는 셈이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은 금리도 싼데다 대출한도 역시 수억원에 이르고, 그 돈을 대출받아 산 또 다른 집값이 폭등해 이자를 내고도 엄청난 차익을 챙긴다. 이자는 코 묻은 돈에 지나지 않는다. 대출액도 몇천만원에 지나지 않고, 고금리에 허리 휘는 서민층과 대조적이다.

사진/ 합병으로 대규모화한 일반 은행들도 서민을 위한 소액대출은 꺼리는 형편이다. (김종수 기자)
기업이든 가계든 내 돈보다는 남의 돈을 꿔 장사해서 부를 축적하게 마련이다. 금융은 경제성장은 물론 소득형평에도 기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집을 담보로 제공해 연 6%로 쉽게 3천만원을 융통한 중산층 A가 있는 반면, 무보증신용대출로 연 15%에 3천만원을 빌린 서민층 B가 있다고 하자. B가 곱절 이상의 이자를 물고 있는 현실은 일그러진 한국의 금융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금융기관이 차입자의 갚을 능력과 신용위험을 따져 금리를 정하는 건 당연하다. 또 B가 연 15%의 금리를 부담하더라도 대출받겠다고 약속한 것도 틀림없다. 그런데 나중에 꼬박꼬박 이자를 내고 원금까지 다 상환했다면 B는 결과적으로 억울하게 금리피해를 봤다고 느낄 수 있다. 재산을 모을 기회측면에서 저소득층이 불이익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은행들은 개인금융에 관한 한 땅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해왔다. 국민은행연구소 김정인 연구원은 “그동안 은행들이 대출금을 떼일 염려가 없는 주택담보대출에만 의존하다 보니 축적된 신용평가 자료도 없고, 그래서 무보증신용대출이라도 누구는 8%, 누구는 9%를 적용할 수 있는데도 그냥 뭉뚱그려 죄다 12%, 15%씩 적용하고 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신용도를 면밀히 따져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집 있으면 저금리로 대출해주고 서민층에게는 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편하게() 고금리를 물리고 있는 것이다.

서민금융기관에서조차 대출받기 어려워

은행 접근이 어려운 저소득층들은 서민금융기관에서조차 대출받기 어렵다. 지역에 기반을 둔 신협이 고객밀착형 관계를 통해 신용도 높은 차입자를 선별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 없이 저소득층이 찾아오면 막연히 대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노태식 비은행감독국장은 “신용협동조합들의 경우 예금은 많이 들어오는데 마땅히 돈을 빌려줄 데를 찾지 못해왔다. 그래서 다들 돈을 신협중앙회에 맡겼는데 중앙회도 부실해졌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은 떼일 위험이 없는 주택담보대출상품 세일에 나서면서 앞다퉈 대출금리를 내렸다. 대출수수료도 면제하고 중도상환수수료도 없앴다. 이것이 지금의 가계대출 폭증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 무담보신용대출금리는 요지부동이다. 은행의 입장에서 볼 때, 고금리를 물어온 저소득층 대출자들이 주택담보대출자들의 낮은 금리를 보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고금리를 매개로 중산층·고소득층의 재산축적에 흘러들어간 꼴이다.

서민금융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도 문제다. 사채업자들의 최고이자율을 연 66%로 제한한 대부업법을 보자. 물론 ‘사금융에 대한 수요’는 현실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수요를 저금리로 충족시키고, 고금리 금융활동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노력은 포기한 채 사채업을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자율도 기존의 이자율상한(40%) 또는 일본의 최고이자율(29.2%)보다 높다. 조복현 교수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 등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금리의 무담보 소액대출기관 신설을 검토하거나 각 은행의 서민층에 대한 대출비율을 조사해 공표함으로써 은행이 서민금융에 나서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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