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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역외펀드에 숨은 가짜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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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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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외펀드들이 국내 주식 대금 결제 못하는 사고 발생…외국 계좌 이용한 내국인의 주가조작인가

사진/ 붐비는 증권사 객장. 역외펀드 미수사고를 계기로 외국인 투자자를 가장한 내국인들에 대한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외국에서 만들어진 역외펀드들이 국내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했다가 매입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미수사고가 발생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홍콩에 근거지를 둔 ‘OZ캐피탈’ 등 12개 역외펀드는 12월11일부터 3일간 LG투자증권 홍콩 현지법인을 통해 삼성전자·LG전자·대신증권 등 8개 종목에 대해 모두 2천억여원어치를 매수한 뒤 결제하지 않았다. 또 이들 펀드들은 대신증권 홍콩 현지법인을 통해서도 삼성전자 등 8개 종목에 대해 1100억원어치를 매수한 뒤 결제하지 않았다. LG투자증권과 대신증권은 반대매매 등을 통해 손실을 최소화해 각각 124억원, 22억6300만원의 손실을 봤다.

증권사들 고객명단 공개 거부


이번 사건은 해외 역외펀드가 대규모 미수사고를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를 통해 차익을 노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지금까지 외국인 투자자는 주로 대규모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며, 국내 주식 중에서도 실적이 뛰어난 우량종목을 중심으로 투자한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국인 투자자들을 무조건 따라하는 국내 투자자들의 투자방식을 바꿔야 하며, 외국인 투자자를 가장한 내국인인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들에 대한 관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미수사고를 일으킨 역외펀드들의 실제 전주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12개 역외펀드 중 7개의 이름은 이들이 지난 8월부터 투자한 코스닥 등록기업 ㄱ사의 11월 유가증권 발행실적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7개 펀드는 EASTWEST(지분 3.32%), FOXFIELD(3.31%), MGDI(3.33%), CAVENDISH(0.93%), ARBINE(3.07%), CAVEND(1.55%), ORIENT(2.88%) 등이다. 대신증권은 이들 펀드에 대해 “홍콩 투자기관이 설립한 펀드”라며 “이들과 수년 동안 관계를 가져왔고, 최근 1년간 미수가 몇번 발생했지만 그때그때 갚아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당 홍콩 투자기관을 설립한 대주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LG투자증권도 “이들이 운용하는 펀드는 주주가 수십명에 이르며, 실제로 홍콩 현지법인과 거래를 하는 것은 일부 펀드매니저들에 불과하다”며 “이들이 외국인인지 검은 머리 외국인인지 정말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증권업계에서는 증권사들이 아무리 기관 고객이라도 모르는 고객에게는 위탁증거금을 면제해주지 않으며, 더구나 1천억원 이상의 거래를 하는 고객에 대해서는 파악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두 증권사가 일부러 명단 공개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두 증권사는 고객 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실명제에 저촉되고, 거액 고객들의 이탈을 초래할 것이라며 명단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진짜’ 외국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현재로선 ‘검은 머리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증권업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코스닥 등록기업인 ㄱ기업에 대한 이들 펀드들의 투자행태는 이들의 실체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금융감독원과 코스닥위원회 등에 따르면 문제가 된 12개 역외펀드 중 7개가 지난 8월 이후 ㄱ기업에 대해 시세조종을 한 혐의가 적발됐다. 코스닥위 관계자는 “ㄱ기업에 대한 감리 결과 이들 펀드가 단기간 지분을 집중적으로 매집하면서 주가가 2배로 뛰는 등 시세조종 혐의가 있어 감리에 착수해 이미 끝내고 금감원에 넘겼다”고 밝혔다.

ㄱ기업은 자동차용 오디오를 만드는 회사로 자본금이 40억원에 불과한 중소기업이다. ㄱ기업은 지난 8월6일까지 외국인 지분이 전혀 없었으나 8월7일 이후 외국인들이 매입에 나서 지난 10월29일에는 지분율이 27.84%까지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개인 투자자들은 외국인 선호 주식을 뒤따라 사는 추종매매를 보였고 외국인들도 서로 짜고 주식을 사고팔면서 주가는 8월7일 3100원에서 같은달 28일 6450원까지 두배로 뛰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위탁증거금이 면제되는 외국인 기관 투자가의 계좌를 이용해 돈을 한푼도 들이지 않고 시세조종에 나서 막대한 차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인이 왜 우리 기업 주식 샀을까”

사진/ 금융감독원과 코스닥위원회 등에 따르면 문제가 된 12개 역외펀드 중 7개가 코스닥 등록기업인 ㄱ 기업에 대해 시세조종을 한 혐의가 적발됐다. (한겨레 강창광)
ㄱ기업에 대한 투자는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매 패턴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단기화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일반적 매매 관행과 다르다는 게 코스닥위 관계자의 말이다. 코스닥위 감리팀 관계자는 “외국인은 컨트리 리스크를 감안해 시가총액이 큰 안정정인 주식을 산다. 그런데도 내재가치가 불확실하고 자본금이 적은 종목을 샀다는 점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언론들에서 외국인 투자가가 주가조작에 개입했다는 식으로 보도하는데 이는 잘못됐다. 정확히 말하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펀드를 이용해서 투자를 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헤지펀드의 개입 가능성도 거론되는데, 이들도 선물을 통해 헤지가 가능한 종목을 사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헤지펀드는 아닌 것 같다는 게 증권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ㄱ기업이 등록을 한다고 해서 전에 한번 가봤는데 외국인들이나 헤지펀드들이 투자할 종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ㄱ기업은 올해 상반기 매출이 110억여원, 순이익이 7억여원에 불과했다. 순이익은 전년동기보다 36%나 감소한 상태였다. 역외펀드들은 이 기업의 상반기 실적 발표를 일주일여 앞두고 이 종목을 샀는데, 실적 측면에서 보면 거의 매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ㄱ기업쪽도 “단기간에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는 점 이외에 외국인이 우리 기업의 주식을 왜 샀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우리도 이들 외국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려 했으나 알 수 없었으며 인수합병 등에 나름대로 대비도 했으나 특별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는 한국인이 만든 특정 헤지펀드가 자금을 운용하다 잘못돼 이번 사건이 일어났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또 국내의 특정 인수합병(M&A)팀이 시세조종 등 이른바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문도 나왔다. 증시업계 일부에서는 국내에서 기관계좌를 이용해 매매를 할 경우 금융당국에 쉽게 적발되지만 홍콩을 근거지로 삼으면 법인 설립이 쉽고 증거금도 면제되는 점을 이용해 이들이 외국인 행세를 하며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LG투자증권 감사본부 관계자는 “홍콩 법인에서 발생한 미수사고는 현재까지 조사 결과 전형적인 투기펀드의 차익 추구과정에서 발생한 운용착오가 원인”이라며 “미수사고를 낸 12개 기관계좌는 그동안 삼성전자 등 우량주를 주로 거래해 이들 종목의 비중이 70% 이상이었으며 ㄱ사 등 소형주는 일부가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들 기관이 삼성전자를 주로 거래한 것은 대형 우량주로서 리스크가 작고 소폭 상승해도 기대수익이 높기 때문”이라며 “부담능력 이상의 과다 주문을 낸 데다 주가가 빠지자 미수사고를 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들 기관이 법상으로는 외국 기관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가 외국인을 가장한 내국인에 의해 운영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를 밝히기는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인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현재 홍콩의 금융감독 기관과 조사 협조를 위한 양해각서(MOU)가 체결되지 않은 상태여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설령 금감원이 이들의 시세조종 혐의를 확인한다 해도 이들의 계좌에 대한 추적 등을 통해 자금흐름까지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들의 신원 파악조차 쉽지 않다. 이들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홍콩 현지법인을 통해 계좌 주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데, 현지법인이 홍콩 법규를 따라야 하는 만큼 절차가 복잡해 자료 수집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외국인 따라하는 투자방식 벗어나야

다만 시세조종 혐의는 국내 조사가 가능한 만큼 조만간 이들의 불법행위 여부가 어느 정도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 관계자는 “국내 조사를 통해 이들의 주문내역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시세조종 여부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홍콩 거주 외국인에 대한 자금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건의 실체는 검찰 고발 뒤에나 밝혀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증권사들이 기관과 외국인들에게 위탁증거금을 면제해주는 기준을 강화해야 하며, 증권사들이 지나친 약정경쟁으로 무리하게 영업을 하는 관행도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약정경쟁에 내몰려 외국인이나 기관들에게 증거금을 면제해주는 등 허술한 관리로 이번 사태를 자초했다”며 “감독당국이 나서 역외펀드에 대한 정밀 실태조사에 나서고, 기관이나 외국인들에 대한 증거금 면제 기준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내 투자자들도 통계상으로 나타난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수·매도 추이만 보고 이를 무조건 따라하는 투자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현 기자/ 한겨레 경제부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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