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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재벌 2세의 초고속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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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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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선 현대백화점 부사장 30살 나이에 그룹 총수 등극… 전문경영인 체제 사실상 막내려

사진/ 현대백화점 정지선 부사장은 상상을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을 해 입사한 뒤 5년 만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다. (김종수 기자)
1997년 25살에 과장으로 입사. 2년 미국 유학. 2000년 기획실 차장 승진. 2001년 1월 임원(기획실장) 승진. 2002년 1월 부사장 승진. 2002년 12월 총괄 부회장으로 사실상 그룹 총수 등극.

“경영수업은 좀 받아야 되는 것 아냐?”

상상을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화제의 인물은 현대백화점 정지선 부사장이다. 그는 5년 전 25살의 나이에 과장으로 입사한 뒤 5년 만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다. 아니, 유학기간 2년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3년 만이다. 불과 30살의 나이에 자산 3조3천억원, 계열사 10개(2001년 말 기준)를 거느린 재계 서열 24위(공기업 제외) 대기업의 경영권을 한손에 거머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고속 승진의 비결은 물론 아버지를 잘 뒀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백화점 최대주주인 정몽근 회장 장남이다. 오너의 장남이니까 어떻게 보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어차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회사를 조금 일찍 물려받는다고 문제될 것은 없으니까.

사진/ 정지선 부사장의 기업 승계는 다른 재벌 2세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재계 안팎에서는 정 부사장의 총괄 부회장 승진을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다. 심지어 비슷한 재벌기업쪽에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정몽근 회장이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인 이병규 사장이 실질적으로 경영의 책임을 맡아왔다. 세간의 예측은 정지선 부사장이 올해 초 부사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3~4년 정도 경영수업을 한 뒤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르리라는 것이었다. 이 사장은 99년 4월 사장을 맡은 이래 회사를 크게 성장시켜왔고, 안팎으로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대백화점은 이러한 예상을 뒤엎고 12월18일 이사회를 열어 내년 1월부터 이 사장을 고문으로 물러나게 하고, 정 부사장을 총괄 부회장 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그동안 현대백화점을 크게 성장시켜온 전문경영인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리는 셈이다.

물론 현대백화점은 “계열사 사장들이 책임경영을 하고 정 부사장은 계열사 간 협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정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회장에 취임하더라도 모든 계열사 경영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그러나 그룹 총수가 단순히 조정 역할만 할 수는 없다. 그룹의 주요 현안은 모두 그를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 부사장이 재계의 관심을 끄는 까닭은 지금까지 재벌 2세 가운데 경영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고 그처럼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에 오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4대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총수 아들이라도 경영수업을 어느 정도 쌓고 40살은 돼야 그룹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역대 그룹 회장 가운데 가장 젊은 나이에 총수 자리에 오른 인물은 한화 김승연 회장이다. 그는 77년 25살의 나이에 태평양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로 경영에 참여한 뒤 4년 만인 81년 그룹 회장이 됐다. 김승연 회장 역시 초특급 코스를 거쳤다. 그러나 김승연 회장은 선대 회장인 김종희 전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회장을 맡은 사례다.

다른 재벌과 비교해도 초고속 승진

사진/ 최태원 SK(주)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정의선 현대자동차 전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왼쪽부터).
SK의 경우 98년 8월 최종현 전 회장이 지병으로 숨진 뒤 최태원 부사장(42)이 SK(주) 회장으로 승격했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있다. 최 회장은 91년 SK상사(현재의 SK글로벌)에 부장으로 입사한 뒤 94년 그룹 경영기획실 이사, 97년 SK(주) 부사장 등을 거쳐왔다. 98년 SK(주) 회장에 오르기까지 7년의 경영수업을 했고, 그 이후까지 합하면 모두 11년 동안 그룹 회장으로 가기 위한 경영수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물론 손길승 회장에 이어 4대그룹 회장에 취임하기로 예정돼 있다. 그러나 SK는 앞으로 당분간 전문경영인과 오너경영인의 파트너십 경영체제가 계속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보(34) 역시 마찬가지다. 이재용 상무보는 23살이던 91년 12월 삼성전자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이어 94년 9월 과장으로 승진한 뒤 해외에서 연수를 받아왔다. 물론 이때까지는 회사에 이름만 올렸을 뿐 정식직원으로서 일을 하지는 않았다. 이 상무보가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1년 3월 상무보로 승진하면서부터다. 이 상무보 역시 아무런 실무경험 없이 삼성전자 상무보를 맡았다는 점에서 재벌 기업들의 잘못된 후계 관행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 상무보는 앞으로 적어도 5~10년 정도 경영수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형식적으로 몇개의 자리를 거친 뒤 2~3년 만에 총수 자리로 끌어올리는 방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삼성의 설명이다.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아들인 정의선(32) 전무는 97년 고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어 99년 12월 현대차에 이사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매총괄본부에서 일하다가 2001년 상무로 승진하면서 기획과 마케팅을 담당했고, 2002년 3월 다시 전무로 승진해 국내 영업본부 부본부장과 AS총괄 부본부장을 맡고 있다. 비록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분야별로 충실하게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런 주변의 전례들과 비교하면 정지선 부사장은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재벌 2세 가운데도 가장 어린 나이에, 가장 먼저 총수 자리에 오른 셈이다. 따라서 현대백화점 사례는 한국 재벌기업들의 잘못된 후계자 승계 관행에 비춰봐도 지나치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그동안 재벌기업들이 후계자 문제로 수없이 비판받아왔지만 30살의 사회 초년생을 대기업 총수 자리에 앉힌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 부사장의 경영능력이다. 그가 비록 기획실장과 기획담당 부사장을 거쳤다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영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경영을 전혀 모르던 그는 하버드대에서 2년 동안 경제학을 공부한 뒤 회사에 돌아와 3년의 실무 경험을 거쳤다. 경영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우려를 반영하듯 현대백화점 주가는 -2.85%(18일), -6.25%(20일) 등의 큰 폭으로 하락했다. LG투자증권 박진 연구원은 “백화점 업계 경영여건은 12~1월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이병규 사장의 일선 후퇴와 정지선 부사장의 총괄 부회장 선임이 투자자들에게 우려를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악화된 경영여건 극복할까

최근 들어 백화점 업계 경영여건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정부의 경기부양책 덕에 상반기까지 급증하던 국민의 소비지출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 역시 마찬가지다. 매출은 꾸준하지만 순이익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올해 분기별 순이익을 보면 1분기 374억원, 2분기 275억원, 3분기 108억원의 추이를 보인다. 4분기(10~12월) 들어서는 매출 또한 크게 줄어들고 있다. 업계에서는 현대백화점을 비롯해 모든 백화점들이 11~12월 두달 연속 큰 폭의 매출 감소를 보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정 부사장의 부회장 등극으로 사실상 후계체제로의 이양을 마무리지었다. 현대백화점쪽은 “안정적인 경영구도 확립”이란 표현을 쓰지만 정 부회장 체제가 자리잡으려면 적어도 5~10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정몽근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영에 관여해오지 않았으며, 부인 우경숙 고문이 주로 관여해왔다. 그래서 재계 안팎에서는 “어머니인 우경숙 고문이 경영에 더 깊숙이 개입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주식 지분으로 따지면 정몽근 회장(23.48%)과 정지선 부사장(1.25%) 부자가 최대주주다. 그러나 그들이 회사의 진짜 주인은 아니다. 주인은 51.24%의 지분을 갖고 있는 소액주주들이다. 따라서 정 부사장은 부모로부터의 낙점이 아니라 하루빨리 소액주주들로부터 경영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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