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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경제, 큰코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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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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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의 ‘경고’보고서…대외 의존도 높아지면서 외풍에 너무 민감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민간 경제연구소들의 권고나 지적을 순수한 애국적 차원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대부분 재벌기업의 지원을 받는 이들 연구소들의 보고서는 재벌들의 이익이나 소속 재벌의 이익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 소속의 삼성경제연구소가 올 들어 한국 경제의 앞날에 대해 ‘경고’성 보고서를 계속 내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에서일까?

‘일본식 장기불황’ 간접 경고

사진/ 경기변동에 즉각 대응하는 단기 부양책이 아닌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는게 보고서의 요지다. 여의도의 증권가. (박승화 기자)
삼성경제연구소가 낸 보고서들의 큰 줄기는 “우리 경제의 취약한 구조에 대한 경고”다.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나마 점차 이완돼가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외부충격을 받을 때,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 대학교수는 “삼성이 이런 보고서를 낼 수 있는 것은 부실로부터 가장 자유롭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분석이 맞다면, 삼성 보고서들의 ‘경고’는 재벌 소속 연구소의 것이라고 해서 대충 흘려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삼성의 보고서가 주장하는 대로 한계기업들을 서둘러 퇴출시키면 물론 삼성에게도 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삼성이 심각한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계속 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올 하반기에 낸 보고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로 지난 9월18일 나온 ‘상반기 기업실적 호조의 허실’이란 보고서를 들 수 있다. 김종년 수석연구원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올 상반기 국내 510개 상장사가 사상 최고인 17조원의 순이익을 낸 데 대해 “자만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기업들의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과 자기자본비율은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매출액 성장률이 낮아져 장기적으로 이런 성장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특히 환율·금리 등 기업경영에 유리한 외부여건이 없었으면 그만한 순이익을 낼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김 연구원은 “99년 수준의 환율과 금리수준을 감안하면 기업실적은 오히려 18조원의 적자가 났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리하락으로 순이자 비용이 줄었고, 원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외화관련 순이익이 발생한 것이 실적을 좋게 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어 지난 10월7일 월례 금융통화위원회 개최를 나흘 앞두고 ‘저금리와 구조조정’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애초 지난 3월26일 작성됐으나, 발표는 6개월 이상 늦어졌다. 연구소쪽은 “저금리 기조의 부작용이 갈수록 우려됨에 따라 뒤늦게 보고서를 냈다”고 밝혔다. 당시 경제계에서는 금통위의 콜금리 인상 필요성을 놓고 치열한 논란을 벌이던 무렵이었다.이 보고서는 비록 콜금리 인상 필요성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 11월6일 경제 5단체장이 “콜금리를 올리면 경제가 급격히 후퇴할 수 있다”며, 금통위에 금리 동결을 공식건의한 것과는 뉘앙스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보고서 핵심 내용은 “정부정책이 구조조정의 추진 없이 저금리와 재정지출 확대에만 의존하면 우리 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위험성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저금리가 지속됨에도 우리 경제가 소비와 투자 회복의 선순환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로,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자신감 결여는 구조조정의 미흡이 큰 영향을 끼쳤다. 보고서는 저금리가 부동산 가격 급등과 같은 부작용을 낳았고, 기업들은 부채부담 감소로 경영개선 노력을 이완시키고 한계기업의 무리한 경쟁을 유도했으며,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 정리 노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저금리 메커니즘이 그러함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구조조정 노력이 이완되는 데 따른 우려는 분명하게 담았다.

외풍, 방어수단이 없다

지난 11월27일 연구소가 낸 ‘외환위기 5년, 한국경제의 흐름과 과제’라는 보고서는 이런 지적들의 종합판 성격을 띤다. 보고서는 외환위기 이후 5년간 우리 경제의 성과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성장률은 높아지고, 실업률은 3% 이하로 떨어졌으며, 물가도 상승률이 3%대로 안정됐다. 경상수지 흑자 기조도 5년째 이어지며, 외환보유고는 세계 4위 수준이다.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고 지적한다.

보고서는 가장 눈에 띄는 현상으로 우리 경제의 불안정성이 과거보다 높아졌다는 점을 꼽는다. 시장개방과 외자 유입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외풍’에 그만큼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성장률 변동폭이 외환위기 이전보다 3.7배나 높아졌다. 또 외환위기 이후 확대된 소득격차가 줄어들지 않아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부동산 가격급등, 가계부채 증가 등 경기부양정책의 부작용도 가시화됐다고 지적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외풍’이 거세졌을 때 방어할 수단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때는 정부 재정이 건전하고, 가계도 튼튼해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부채는 크게 줄었으나 그동안의 재정지출과 공적자금으로 정부 부채는 급격히 늘었다. 소비증가와 부동산 경기회복이 경제의 버팀목 구실을 했지만, 저변에서 가계 부채도 급증했다. 소비에 의존한 성장과 그로 인한 저축률이 하락이 계속되면 경상수지도 적자로 반전될 수밖에 없다. 내년 경상수지가 흑자 규모의 균형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점은 다른 경제연구소들도 지적하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무엇보다 구조조정 대상이자 주체인 정부·기업·금융기관 등이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우려한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권순우 수석연구원은 “누구든 일단 죽을 고비를 넘기면 여유를 갖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죽음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그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의 보고서는 어떤 외부충격이 현실화할 경우를 대비해 지속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권 연구원은 “경기변동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단기부양책에 의존하지 말고, 부실처리와 시스템 개혁을 통해 상황을 정면돌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의 조기 처리를 통해 경제주체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거시경제정책은 당분간 ‘중립기조’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책당국과 기업 최고경영자, 그리고 연구기관이 위기에 놓였을 때 대응책을 공유하고 상호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정치권이 대통령 선거에 매달린 상황에서, 그리고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의 권력 공백상황에서 구조조정의 이완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모르핀 재고는 바닥나고…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종인씨는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곧바로 2004년 총선 준비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구조조정을 또다시 미룰 가능성이 있고, 자칫 우리 경제가 또 한 차례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동안은 공적자금이라는 ‘모르핀’에 기댈 수 있었지만, 이제 모르핀 재고는 바닥났다. 앞으로 어떤 지도자가 마취제를 쓰지 않은 채 제거되지 않은 종양을 없애는 재수술에 대한 동의서를 경제주체들한테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삼성의 보고서는 “외환위기 5년을 거치며 사회가 심하게 균열돼 있는 상태며, 더 이상 진행되면 경제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갖고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면서 문제를 정면돌파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모두 거센 외풍이 없기만을 바라는 상황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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