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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조흥은행, ‘버티기’로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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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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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매각 방침에 반발하는 조흥은행 노조… “자력갱생 가능한데 서두를 필요 있느냐

사진/ "왜 하필 지금인가." 조흥은행 임직원은 현 정부가 임기말에 매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저희 지점은 남자직원 6명 가운데 4명이 삭발을 결의했습니다. 105년 전통의 힘을 보여줍시다”, “지점 분회장입니다. 오늘 후배 행원이 가족여행을 위해 모아온 적금통장을 깨 지급표와 함께 들고왔습니다. 투쟁기금 모금에 속도를 냅시다.”

요즘 조흥은행의 인터넷 사내 게시판은 ‘강제합병 저지와 민족은행 사수’를 촉구하는 의견과 투쟁구호들로 온통 도배질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내 직장에 손을 대는 놈은 죽여버리자”, “하루를 살더라도 화끈한 부나비가 되자”는 등 살벌한 문구들도 적지 않다. 조흥은행 노조는 지난 11월9일 서울 종묘에서 대규모 규탄집회를 연 데 이어, 20일에는 금융산업노조와 함께 총파업에 돌입하는 등 갈수록 투쟁수위를 높이고 있다. 11월 초에는 인수 희망자들의 실사를 저지하겠다며 은행의 주요 대출서류를 빼돌리는 실력행사에 나서기도 했다. 노조는 총파업에 대비해 1~3급 직원 1042명으로부터 100만원씩, 4급 2310명과 5급 이하 3424명으로부터 각각 60만원과 50만원씩 모두 41억4천여만원을 목표로 파업기금을 걷고 있다.

빠듯한 매각일정으로 졸속시비


사진/ 조흥은행의 자력갱생을 위해 노력해온 위성복 이사회 회장.
조흥은행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정부의 보유지분 일부매각’(블록세일)이란 애초 방침이 최근 ‘11월 중 경영권을 포함한 일괄매각’으로 급선회하며 비롯됐다. 특히 신한금융지주회사가 외국계 투자기관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조흥은행쪽 반발은 극에 달한 상태다. 민영화 일정은 당연히 차기정권에서 다룰 것으로 여긴 임직원들은 한마디로 “뒤통수를 맞아도 세게 맞았다”는 분위기다.

조흥쪽 반발은 정부가 권력 교체기에, 그것도 주가가 떨어져 제값을 받기 힘든 상황에서 경영권을 매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마디로 헐값·졸속 매각이라는 것이다. 특히 임직원들은 그동안의 ‘자력갱생’ 노력이 외면당했다는 데 크게 분노하고 있다. 조흥은행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1998년과 견주면 경영상황이 크게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0.9%에 그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10.6%(6월 말 기준)로 끌어올렸고, 당기순이익도 1조9천억원 적자에서 539억원 흑자를 일궈냈다. “올해도 순이익 감소를 감수하며 누적손실에 대한 대손충당금을 1조원 넘게 쌓았습니다. 충당금 적립이 마무리되는 내년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합니다.” 위성복 조흥은행 이사회 회장도 “내년에는 기업가치가 올라 주당 1만원은 받을 수 있지만 지금 팔면 제값을 받을 수 없다”며 정부의 경영권 매각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노조와 임직원들이 졸속매각 여론 형성에 힘을 쏟으며 파업불사의 강경대응에 나서는 것은 “매각 일정이 워낙 빠듯해 여론을 움직이면 매각을 봉쇄할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일부 시민단체 등이 매각 시기가 적절치 않고 절차가 투명하지 않다는 동조의 목소리를 내는 점도 노조쪽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고 있다. 실제 정부가 이달 안으로 공정자금위원회(공자위)를 열어 매각을 최종 결정하려면, 2~3주 안에 인수후보 실사-우선협상대상자 선정-최종 실사-가격 협상 등을 모두 마무리해야 한다. 이 가운데 한 단계만 삐긋해도 물리적으로 매각을 진행하기 힘들 것이란 계산이다. 여기에는 물론 대선 일정도 감안했다. 노조가 20일을 총파업일로 잡은 것은 늦어도 다음주에는 우선협상대상자가 정해지고 25일께는 공자위가 열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조흥은행이 얼마 전 하나은행과의 합병과정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진’ 서울은행과는 사뭇 다를 것이란 견해가 많다. 시중은행의 한 노조위원장은 “하나-서울은행 합병 당시에는 서울은행 직원들은 겉으로는 크게 반발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조흥은 아직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더 강경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은행과의 질긴 악연

사진/ 조흥은행 인수 후보로 부상한 신한은행. 조흥은행과의 질긴 악연이 이어지고 있다.
유력한 인수후보로 떠오른 신한은행과의 질긴 ‘악연’도 문제다. 조흥은행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왜 하필이면 신한이냐”는 볼멘소리까지 터져나온다. 악연의 출발은 신한은행이 출범한 1982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신한은행은 당시 전산직의 중요한 요원들을 시스템이 같은 조흥은행 직원들로 충원했다. 신한은 정당한 스카우트를 했다지만, 조흥 처지에서는 햇병아리 신생은행에 유능한 직원들을 빼앗긴 셈이다. 지금도 은행 합병설이 흘러나올 때마다 신한-조흥의 짝짓기의 장점은 전산시스템이 같아 통합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곤 한다. 조흥은행 본사의 한 부장은 “신한은행이 김포공항 지점에 입점할 때 조흥은행 같은 지점 직원들을 고스란히 빼가서 배치하는 바람에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조흥은행이 지점을 내면 얼마 뒤 코앞에(신한이) 새 점포를 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한 대출계 직원은 “기업대출 입찰 때 다른 은행은 몰라도 신한쪽에 빼앗기면 잠을 못 잤다는 선배들이 많다”고 말했다.

조흥은행이 정부와 신한컨소시엄 사이의 사전 밀약설에 강한 의혹을 보내는 이면에는 이런 악연과 불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나 대우차 등의 부실채권 처리과정에서 국민과 신한은 늘 먼저 발을 빼거나 신규지원에 참여하지 않아 정부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 고위관계자가 공식석상에서 신한에 유리한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등 뭔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본부장급 임원) 일부에서는 이런 두 은행의 악연을 들어,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의 경영권을 인수하더라도 합병이 원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 매각 의지는 단호

조흥은행쪽은 또 이번 지분매각 과정에서 자신들이 철저히 배제된 데 대해서도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나-서울 합병 때는 예금보험공사가 강정원 전 행장 등 간부들에게 절차나 진행상황 등을 비교적 상세히 전해줬지만, 이번에는 설명은커녕 예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시기가 좋지 않다거나 매각일정이 촉박하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정부의 매각 의지는 단호하다. 정부는 “조건이 맞으면 언제든지 전략적 투자자에게 경영권을 매각한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헐값 매각 주장에 대해서도 “주가는 매일 변동하는 것인데 주가가 떨어졌다고 팔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몇몇 정부 관계자는 나아가 조흥은행이 부실을 대부분 털어내고 정상화를 앞둔 지금이 매각의 적기라는 적극적인 주장도 펼치고 있다. 정부는 특히 조흥은행쪽 반발에 대해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다”고 단언하고 있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시켜놓은 기업의 임직원들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고위관계자는 “조흥은행의 반발은 합병 이후 구조조정을 우려한 밥그릇 챙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노조의 파업이 매각의 변수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처럼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도 매각 성사 여부는 매우 불투명하다. 대선을 앞둔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시간을 끌수록 조흥은행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흥은행의 의도대로 이 문제에 정치권이 개입하면 매각은 쉽사리 무산될 수 있다. 매각의 키는 정부가 쥐었지만 시간은 조흥은행 편에 서 있는 셈이다.

김회승 기자/ 한겨레 경제부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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