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비준만 남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농가피해 보전대책은 논란 속으로
“아무리 대선 국면이라고 하지만 후보들이 농민 표를 의식해 ‘농업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일 때가 아니다.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이제는 자유무역협정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해야 한다.” 최세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경을 막고, 가격을 지지하는 정책에 의해 한국 농업이 유지되는 시대는 끝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은 멕시코?
국회 비준절차가 남아 있지만,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양국 간 협상이 타결됐다. 농민단체들의 한-칠레 FTA 반대 시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당국은 농가피해 보전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성난 농심을 달래기 바쁘다. 그러나 농민 시위의 목적은 한-칠레 FTA 저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칠레 FTA를 신호탄으로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또 다른 FTA’를 봉쇄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 그런 점에서 이후의 FTA 일정은 발등에 떨어진 이슈라고 할 수 있다.
국회 비준도 거쳐야 하고, 칠레와의 협정이 아직 발효되지 않은 만큼 차기 FTA를 거론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통상당국은 이미 차기 FTA 협상 파트너로 멕시코를 지목하고 있다.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한-멕시코 FTA에 대한 국내 연구작업은 벌써 끝났다. 농촌경제연구원쪽은 “농민들의 반대 시위가 가라앉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한-멕시코 FTA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국쪽의 준비가 완료되자 멕시코쪽도 이미 연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한-칠레 협상에서 칠레는 이런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우리쪽에 “대멕시코 FTA안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멕시코는 칠레와 달리 농업강국으로 불리는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멕시코가 한국에 대해 갖는 관심 역시 농산물이다. 칠레가, 정부의 말대로 FTA 협상 경험을 익히기 위한 스파링 파트너였다면 멕시코는 본격적인 FTA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칠레가 포도를 비롯한 ‘과수’ 강국이라면, 멕시코는 고추·양념·채소·마늘·참깨 등 ‘영양채소류’에 강점이 있다. 농촌경제연구원쪽은 “일본이 먼저 멕시코와 FTA를 체결하면 북미 시장에서 우리 수출업체들이 큰 피해를 본다”며 “그러면 우리와도 체결해달라고 멕시코에 졸라야 할 판이 된다”고 걱정했다.
통상당국은 싱가포르쪽과도 FTA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싱가포르는 농업이 취약한 만큼 국내 농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쉽게 FTA를 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싱가포르를 징검다리 삼아 FTA 분위기를 확산시킨 뒤 멕시코와 본격적인 협상에 나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지난 99년 이후 몇 차례 양국 간 업무협의가 진행된 한-타이 FTA 및 한-뉴질랜드 FTA 논의 역시 그동안 접어두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한-일 간 FTA 논의도 수출업계를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 한창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처럼 농민 저항을 우려해 개방 일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을 뿐, 정부는 여러 국가와 물밑에서 FTA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FTA를 구상하고 있는 나라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FTA 연구자들은 “농업부문을 제외한 채 한국과 FTA를 체결할 당사국은 일본뿐”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농업경쟁력이 우리보다 더 취약하기 때문에 농업부문을 자유화 대상에서 제외한 채 FTA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얘기다. 그만큼 한국을 FTA 파트너로 선택하는 국가는 모두 한국의 농산물 시장을 노리고 있다. 한국 농산물 시장은, 국내에서 보자면 ‘민감’ 영역이지만 잉여농산물을 팔아먹으려는 농산물 수출국들한테는 ‘관심’ 영역인 셈이다.
WTO보다 엄청난 파괴력
한국 시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가격경쟁력에 있다. 쌀값은 수매가 기준으로 미국산의 4.8배, 중국산에 견주면 5.8배가 비싸다. 사과와 배값도 국제가격에 비해 일본 다음으로 비싼 편이다. 이처럼 한국 농산물이 가격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원인은 비싼 노임 및 농지값 등 구조적인 요인이 강하다. 따라서 시장 개방이 닥쳤다고 해서 금방 생산단가를 낮추기도 힘들다. 이처럼 낮은 가격경쟁력에도 그동안 한국 농업을 간신히 버티게 해준 것은 평균 47%에 이르는 높은 관세였다. 따라서 무관세를 지향하는 FTA는 한국 농촌에 엄청난 시련이자 새로운 충격이다. 우르과이라운드로 대표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달리 개방이 ‘진짜로’ 시작됐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WTO 체제가 점차적인 관세 인하를 통해 한국 농업 전 분야에 ‘서서히’ 충격을 준다면, 대외장벽을 아예 없애는 FTA는 피해가 특정 농산물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다르다. 사실 WTO 체제는 출범한 지 오래됐음에도 관세인하 폭을 놓고 수많은 국가들끼리 공방만 거듭하고 있다. 경북대 김충실 교수(농업경제학)는 “개방 파고라는 측면에서 볼 때 WTO와 달리 개방에 전면 노출되는 FTA는 농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체결되는 것으로, 우리 농업에 엄청난 비극”이라고 말했다.
특히 FTA는 특정 농산물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를 넘어 한국 농업 전체를 속으로 골병들게 만든다. 한-칠레 FTA에서 쌀·사과·배 등 일부 민감품목은 관세자유화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사과·배라고 피해를 비켜갈 수는 없다. 이는 지난 2000년 미국산 오렌지가 물밀듯 들어온 뒤 대체소비 품목인 감귤은 물론 사과·배 등 다른 과일값까지 폭락한 사례가 그대로 보여준다. 값싼 칠레산 포도 수입으로 포도값이 폭락하면, 망한 포도 농가들은 다른 작목재배로 한꺼번에 옮겨가게 되고, 결국 그 작목 역시 과잉생산으로 값이 폭락할 공산이 크다. 멕시코가 농업 강국이 아니라 하더라도 막상 FTA를 맺고 나면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높다. 멕시코의 대규모 농업자본이 빗장 열린 한국 농산물 시장을 겨냥해 그때부터 대대적인 농산물 생산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수출업체에게? 세금으로?
FTA는 경제적 효과를 넘어 매우 정치적인 협정이다. 한국에서 농업이 정치적인 대상이란 점에서도 그렇지만, FTA를 둘러싼 민간 수출업체와 농민들 사이의 이해가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FTA에 따른 산업별 이해관계를 사회적으로 조절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익을 배분하고 손해를 보상하는 정치적 과정이 뒤따르는 것이다. 이 대목은 WTO 체제와 달리 FTA는 양국 간에 이해득실을 따져 협정을 맺을 수도 있고 안 맺을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라는 점과 맞물려 있다. 더구나 협상 대상국을 농업강국 여부를 따져 정부가 고른다는 점도 FTA에 따른 농가 피해를 어떤 형태로든 보전해야 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표면상 FTA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쪽은 우리 정부다. 확산되는 지역주의로부터 고립될 경우 한국의 손실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뒤에는 “다른 나라는 칠레에 무관세로 수출하는데 우리만 관세를 물면서 불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논리를 펴온 공산품 수출업체들의 치열한 로비가 작용하고 있다. 공산품 수출을 위해 어차피 경쟁력이 없는 농업은 희생을 감수하라는 식이다. 이 점에서 FTA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국면은 우리 사회에서 농산물과 공산품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둘러싼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FTA에 따른 농가피해를 보전하는 방안으로는 가칭 ‘FTA구조조정특별법’ 제정이나 ‘자유무역협력기금’ 조성이 거론된다. 문제는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어명근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FTA로 수혜를 보는 수출업자가 매출액의 몇%씩 갹출하고 정부도 매칭펀드로 출연하는 방식으로 펀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특정한 FTA 때문에 농가 피해가 난 것으로 판명되면 이 기금으로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익자부담원칙을 적용해 수출업체한테 이익금 중 일부를 농촌에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농림부는 “수출시장 확대를 꾀하자는 게 FTA인데, 현대자동차한테 한-칠레 FTA에 따라 번 이익금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느냐 농가 피해는 어차피 세금 형태로 정부 일반예산에서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다시 월급쟁이들로부터 “이익은 특정 수출업체들이 보는데, 농가 피해 보전을 위해 왜 우리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느냐”는 반발을 살 수 있다. 국회 비준을 앞둔 한-칠레 FTA가 점차 이런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농민단체들의 한-칠레 FTA 반대 시위가 지속되고 있다. 농민 시위의 목적은 앞으로 이어질 또 다른 FTA를 봉쇄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 (박승화 기자)
국회 비준도 거쳐야 하고, 칠레와의 협정이 아직 발효되지 않은 만큼 차기 FTA를 거론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통상당국은 이미 차기 FTA 협상 파트너로 멕시코를 지목하고 있다.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한-멕시코 FTA에 대한 국내 연구작업은 벌써 끝났다. 농촌경제연구원쪽은 “농민들의 반대 시위가 가라앉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한-멕시코 FTA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국쪽의 준비가 완료되자 멕시코쪽도 이미 연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한-칠레 협상에서 칠레는 이런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우리쪽에 “대멕시코 FTA안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최근 APEC 정상회담 기간 중에 열린 한-멕시코 정상회의. (청와대 사진기자단)

사진/ 마늘은 멕시코 농업의 강점이다. (한겨레21)









